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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은 혼노지(本原寺)에 / 오다 오부나가 & 아케치 미츠히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2. 3. 23:07

     

    앞서 1583년 일본에서 벌어진 하시바 히데요시의 5만 군사와 시바타 카츠이에의 3만 군사가 벌인 시즈가타케(賤ヶ岳) 전투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때 하시바 히데요시가 승리를 거둬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잇는 쇼군(將軍)이 되니 이 자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시즈가타케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혼노지'(本原寺)의 변(變)'으로써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됐기  때문이니, 이때 그 유명한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이 나왔다. 정확히 444년 전의 일이다. 

     

    전국시대의 장군 오다 오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에서 나고노 성의 성주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명(大命)> 등의 소설에서는 그의 유년은 조금 얼뜨고 천방지축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그러했으니 그는 여러 가지 기행으로 '우츠케(우매한 녀석)'라 불리며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그가 가문의 계승자로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오다 가문의 휘장
    오다 노부나가 나고 자란 나고노 성의 후신인 나고야성

     

    노부나가는 이 같은 우려 속에 1552년 오다 노부히데 사후 성주의 뒤를 이었다. 그가 18세 되던 해였다. 하지만 그의 동생 오다 노부유키(織田信行)가 반발했다. 노부유키는 결국 가신(家臣) 그룹을 이끌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1556년 이노 전투에서 형에게 패배했다. 노부유키는 어머니 도타고젠의 중재로 사면을 받았지만 이듬해 다시 반란을 꾀하다가 밀고를 받은 노부나가의 꾀병에 속아 기요스 성을 방문했고, 결국 형에 의해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노부나가는 이후 자신의 직속군대를 조직하였는데, 기존의 병제(兵制)와는 다른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군대였다. 농사를 지으며 훈련을 받다 전투가 벌어지면 곧바로 투입되는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 또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순수 용병부대를 꾸리기도 했던 바, 모두가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거의 기상천외한 발상들이었다. 그는 이렇게 일군 병력으로 스루가국(현재의 시즈오카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명문인 이마가와 가문의 제9대 당주로서, '도카이도 제일 무사(東海道一の弓取り)란 별명으로 불리던 장수였다. 게다가 당시 이마가와 군은 2만5천 명(오다 군은 약 2천 명)의 대군이었으니 그 엄청난 병력 차이에 이마가와 쪽으로 돌아서는 가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위의 훈련된 병력과 뛰어난 작전으로써 오케하자마(桶狭間)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여세를 몰아 주변의 미노국도 평정했다.

     

     

    오케하자마 전투를 묘사한 그림
    오케하자마 전투 전황도 / 노부나가의 기습공격으로 승리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공원으로 조성된 오케하자마 고전장(古戰場)

     

    이후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室町 幕府)의 부흥을 꾀하던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회동해 천하통일을 논한 후 그 실천 방안으로서 에치젠(지금의 후쿠이현)의 아사쿠라 가문 정벌에 나선다. 이때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와 혼인한 오우미(지금의 시가현)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가 아사쿠라 편으로 돌아서며 소강상태에 이르지만 1571년 9월, 노부나가는 일본 천태종의 본산인 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를 공격하여 적의 기세를 꺾는다.

     

    노부나가가 엔랴쿠지를 공격한 이유는 엔랴쿠지의 승병(소헤이)들이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을 숨겨주고 군사적으로 도왔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종교적 권위를 지닌 엔랴쿠지가 광활한 토지까지 보유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키운 강력한 승병으로써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자 이를 정벌코자 한 것이었다. 이때 노부나가는 약 3만 명의 대군으로 산을 포위한 뒤, 사찰 건물은 물론 주변 마을까지 모두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펼쳤던 바, 승병뿐만 아니라 학자, 여성, 어린이를 포함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본 전국시대의 다이묘 세력도 / 출처 : blog.naver.com/nonkitov
    무로마치 문화의 정수 로쿠온지(鹿苑寺) 금각(金閣)
    엔랴쿠지(延曆寺) / 시가현   오쓰시 에 있는 사찰로 788년  헤이안 시대  초반에 세워진 일본  천태종 의 본산이다. 노부나가에 의해 불태워진 후 도쿠가와 시대 때 재건됐다.

     

    아사쿠라 가문을 평정한 노부나가는 다시 서(西)로 나아갔으나 이번에는 정토진종의 본원인 혼간지(本原寺)를 중심으로 일어난 코잇키(一向一揆)가 발호하며 곤란을 겪는다. 잇코잇키는 승려, 농민, 상공업자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무라이들까지 합세한 광범위한 민·군 연합체로서, "아미타불의 자비로 누구나 평등하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정토진종의 평등 이념이 그들을 묶는 구심체였다. 

     

    노부나가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본거지로 한 잇코잇키와 10년 전쟁(이시야마 합전)을 벌이며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켄신 같은 다이묘들보다 더욱 강한 적으로써 고전을 했으나 1574년 이세 나가시마(현재의 미에현 구와나시)에서 발호한 '나가시마 잇코잇키'와의 전쟁을 마지막으로 잇키 세력을 종식시킨다. 노부나가는 이때 남녀 1,000명을 붙잡아 참살하고 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를 불태웠다. 이시야마 혼간지는 1583년 그 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축성하며 영원히 사라졌다.  

     

     

    교토시에 있는 정토진종의 니시혼간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

     

    노부나가가 아사쿠라 가문 정벌과 잇코잇키 진압으로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노부나가의 동맹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가 '전국시대 무패'의 장수였던 다케다 신겐에게 공격당한다. 이에 노부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해 1573년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장에서 다케다 신겐과 맞서지만 패배한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역사상 최악의 패전을 경험한 후 겨우 도망친다) 

     

    게다가 그간  노부나가와 틀어진 무로막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노부나가 군의 미카타가하라 패배를 기화로 (오다군 결성, 다케다 신겐을 필두로 하는 다케다·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을 이끌고 노부나가 군을 포위하고 공격해들어왔다. 오다 노부나가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 1573년 자신의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던 다케다 신겐이 갑자기 병사하고 말았다.

     

     

    다케다 가문의 문장
    다케다 신겐(1521-1573)의 초상 / 첩보전과 기마전술에 능했던 전국시대 유일의 무패 장수로, '가이(지금의 야마나시현)의 호랑이', '전쟁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 등으로 불렸다. 그의 군대는 지금도 전국시대 최고의 전투부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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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 노부나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상대를 역습해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을 전멸시켰다. 노부나가는 다시 그 여세를 몰아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폐위시키니 무로막치 막부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1336-1573) 바야흐로 노부나가의 1인 독주 시대가 열리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다케다 신겐은 죽었지만 그의 아들 다케다 카츠요리가 이끄는 군대는 아직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의 군대는 자타가 인정하는 전국 최강의 정예 기마병이었던 바, 오다 오부나가로서도 절대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때 다시 한번 운명의 여신이 노부나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1543년 규슈(九州)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선의 선원으로부터 도주(島主) 토키다카가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서양의 철포가 오다 노부나가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조총으로 알려진 무기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이 철포로써 다케다의 기마군을 궤멸시킨다. 이때 1만5천 명의 케다 기마군은 3000명의 조총부대 앞에 8시간 만에 궤멸당했던 바, 케다 카츠요리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킨 병사는 단 6명뿐이었다고 한다.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전투에 철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싸움으로, 칼과 창 같은 근접 무기가 주류였던 구시대 전투가 사라지고 전쟁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통일과정에 있어서의 주요 전투
    재현된 나가시노 전투

     

    노부나가는 나가시노 전투 후 조정으로부터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보다 높은 관위를 받아 천하의 주인이 되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필두로 한 다이묘들이 여전히 반기를 들고 저항했다. 1582 3, 덴모쿠산 전투에서 다케다 가문의 잔존 세력까지 완전 진압한 오다 노부나가는 나머지 세력을 일소해 천하통일을 이루기 위한 공격에 나섰다. 그 나머지 세력이란 아래 지도 오른쪽 노란색 지역의 호조 가문, 파란색 지역의 우에스기 가문, 그리고 왼쪽 보라색 지역의 모리 가문 뿐이었다.

     

    노부나가는 그중 가장 비우호적인 모리 가문을 정벌하기 가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냈다. 사실 이  정벌은 시간의 문제였으니, 이 무렵 탄생한 그들의 속담대로 모리군은 철포(뎃뽀)를 갖추지 못한 거의 무뎃뽀(むでっぽう)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모리군의 저항은 의외로 강했던 바, 정벌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은 오히려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급히 SOS를 청했다.

     

    이에 노부나가는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이끌어 구원하게 하고는 자신도 지원을 위해 가는 도중 교토의 혼노지(本能寺)라는 절에 머물게 된다. 

     

     

    전국시대 말기 지도와 혼노지의 위치
    교토 혼노지(本能寺) / 혼노지의 위치는 현재와 과거 사건 발생지가 다르다. 현재 위치는 교토 시청 바로 맞은편에 있으며, 과거 위치는 현재 사찰에서 남서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호리카와 고등학교와 노인 복지 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혼노지 터'임을 알리는 석비만 남아 있다.

     

    그런데 그날 6월 2일 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케치 미쓰히데는 그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 本能寺に あり!)"고 외치며 노부나가가 묵고 있던 절로 쳐들어간다. 오다 노부나가는 불더미 속에서 이들과 맹렬히 맞서 싸웠으나 그의 병력은 호위병으로 데려온 100명 정도가 전부였던 바, 결국은 궁지에 몰려 자살을 택하고 만다. 이때 아케치 미쓰히데가 한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말은 역으로 '적은 내부에 있다'는 뜻의 속담이 되었다.  

     

     

    오다 오부나가( 織田信長, 1534~1582)의 초상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1528?~1582)의 초상

     

    아케치 미쓰히데가 왜  오다 노부나가를 공격했는지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다.(아케치 미쓰히데는 13일 오다군과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싸우다 죽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에 넘어갔고 결국은 그가 천하를 통일하지만 다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일 일본의 주인이 된다.   

     

    천하를 통일한 노부나가였지만 내부의 배신을 막지 못했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비극적 교훈은 444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가까이로는 윤석렬을 배신한 한동훈이 그랬고, 미구에 이재명을 칠 정청래가 그러하다. 정청래는 그것을 위해 조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할 태세이고 우군인 김어준은 벌써부터 지원사격에 나섰지만, 이재명 측에서는 알고도 당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것을 보면 세상 일에 있어 유치한 것이란 없고, 더불어 만만한 일 또한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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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