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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영환이 근대교육을 실시한 흥화학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2. 7. 16:28

     

    지금 용인시박물관에서는 2025년 기획전으로 "흥화(興化) 잊혀진 교실을 열다"가 전시중이다. 일본과의 을사늑약에 반대해 순국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서거 120년을 기념해 그가 세운 흥화학교(興化學校, 1898~1911)를 알리고자 기획한 전시로서, 그간 우리가 몰랐던 흥화학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차제에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민영환의 일생과 흥화학교를 주목하고자 한다.  

     

     

    포스터 / ~2월 22일까지

     

    민영환은 1861년 민씨 척족(戚族)의 중심인물이자 탐관오리였던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는데, 생부와 양부 두 사람의 일생이 모두 기구하다. 두 사람은 민씨 척족으로 일세를 풍미하였지만 생부인 민겸호는 1882 6월 임오군란을 일으킨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창덕궁 중희당 계단 아래서 주살되었고, 양부인 민태호는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에 의해 경우궁 앞에서 죽었다.

     

     

    별기군과 민겸호로 추정되는 인물
    민태호
    민영환
    종로 조계사 앞 민영환 집터 표석 / 길가에 있으나 표석에 써 있는 대로 집은 지금의 조계사 경내에 위치했었다.
    민영환 집의 1930년대 사진

     

    1878년(고종 15) 정시 문과에 합격한 이후 관료로 재직하던 민영환 역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 제거 대상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요행히 살아남았다. 갑신정변 이후 그는 사직서를 내었다. 자신이 시대의 요구인 개혁에 접합치 못한 인물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인재 부족과 명성황후의 척족이라는 배경 등으로써 다시 기용되어 난세의 관료로 복직되었고, 이후 이조참의, 이조참판(행정안전부 차관), 형조판서(법무부 장관), 한성부윤(서울시장) 등을 지냈다. 그리고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됐다.

     

    이때는 미국과 일본은 일말의 제국주의적 거래도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그가 미국공사로 부임했다면 필시 큰 역할을 했을 것이요, 그리하여 향후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세력 약화 내지는 축출을 기대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한반도의 시운(時運)은 불운하게 흘렀으니 그해 10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면서 부임을 못한 채 사직하고 말았다. 이후 친러파가 축출되고 김홍집의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민영환은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민영환은 친러파였다. 당시 미국은 수교는 했으되 조선에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던 바, 조선에서의 일제 축출을 바랐던 민영환은 자연 러시아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새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자 '아라사 황제폐하 즉위 축하사절단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돼 영어통역인 학부협판(교육부 차관) 윤치호 등과 함께 1896년 5월 거행되는 대관식에 참가하기 위해 장도에 올랐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 (가운데) / 왼쪽이 영어 통역인 윤치호다.
    고종이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맞춰 선물한 '흑칠나전이층농' / 크렘린박물관
    민영환 일행의 세계일주 경로(1896.4.1.~10.21.) / 국가유산진흥원 자료

     

    1896년 4월 1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한 특사단은 상하이, 요코하마를 경유해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육로로 뉴욕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런던, 베를린, 바르샤바 등을 경유해 5월 20일 모스크바에 당도했다. 민영환은 5월 23일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고 대관식에 참석한 뒤 3개월 동안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러시아 관리들과 군사교관 파견, 차관(借款), 고문관 파견 등에 관해 논의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 서구문물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됐고 조선이 중국과 일본의 압박과 간섭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개화와 함께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때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서구 열강이라 일컫는 나라들을 모두 방문했는데 그중 개화의 파트너로 가장 선호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우선은 어찌 됐든 조선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나라였고, 또 국경이 맞닿은 나라로서는 중국 외에 유일한 나라이기도했다. 
     
    특히 민영환은 1850년부터 공사를 시작한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간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주목했다. 자신은 모스크바에 가기 위해 지구의 2/3를 돌았으나 현재 시베리아 구간까지 개통된 철도가 전면 개통되면 모스크바까지 단 며칠이면 갈 수 있었다. 그는 1897년 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합 특명 전권대사로 발령받아 1897년 3월 1일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했다. 그는 이때 더욱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니 귀국 후 탁지부대신(기획재정부 장관)에 올라 개화를 서둘렀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유럽 열강의 제도를 모델로 한 정치·군사 개혁안을 개진했는데, 정치 개혁에 있어서의 주된 요지는 입헌군주제였다. 하지만 고종이 전제군주제를 폐지할 리 만무하였던 바, 정치 개혁은 없던 일이 되고 군사 개혁만이 수용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와 광무개혁 후 새로이 만든 군제인 원수부(元帥府)의 수장(首長)으로 육군을 총괄했고, 민영환은 국무대신(국방부장관)으로 표훈원 총재(국가보훈부 장관)와 헌병 사령관을 겸임했다. 계급은 육군 부장(지금의 중장급)이었다.

     

     

    표훈원 총재 시절의 민영환
    표훈원 인장

     

    민영환은 위의 두 차례 이때의 러시아 방문과 세계일주를 통해 대한제국의 후진성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서구의 근대화를 좇아가려면 그들의 선진 문물을 모방한 학교가 필요하다고 절감한 것이었으니 영국 방문 이듬해인 1898년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앞에 '흥화학교'라는 근대 사립학교를 설립한다. 학교 이름은 흥화문의 이름을 빌린 것도 있지만 나라를 흥하게 하고 백성들을 교화(敎化)시키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기도 했다.  

     

     

    경희궁 흥화문
    경희궁 숭정문
    본래의 흥화문 자리 표석 / 서울역사박물관 옆 캐비스커피숍
    구한말의 흥화문
    흥화학교 터에 자리한 흥국파이낸스 그룹 빌딩
    1907년 경성전도에 표시된 흥화학교 설립당시 위치(1898~1899)와 이전한 장소(1899~1911)
    흥화학교 바로 뒷편에 자리한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전망탑만 남았다.
    해방 후까지 전체 형태가 존속되었으나 6.25전쟁 중 폭격으로 파괴되고 전망탑 부분만 남았다. 오랜 공사 끝에 최근 보수를 마쳤다.
    러시아공사관은 한러수호조약이 체결된 1885년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1896년에 일어난 아관판천의 현장이기도 하다.
    영화 '가비' 속 CG로 재현된 모습
    흥화학교는 1900년 종로구 청진동 191-1 지금의 종로문화원 부근으로 이전했다.
    종로문화원
    종로문화원 부근 옛 건물의 주초

     

    흥화학교는 보통과와 고등과로 나누었으며, 보통과의 졸업 연한은 3년, 고등과는 2년이었다. 이후 심상과(尋常科), 특별과와 함께 당시 조선에 전국적인 토지측량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측량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양지과(量地科)를 설치하였다. 교육내용은 영어 · 일어 · 측량술 등이 강조되었으며 입학 연령은 15세 이상 30세 미만이었다. 1900년 7월 13일자 <황성신문>에 당시 학생 수가 130여 명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로서는 적잖은 규모의 학교였다.
     
    교육과목은 국어 · 수신(도덕) · 영어 · 작문 · 역사 · 지지(지리) · 동사(동양사) · 서사(서양사) · 산술 · 대수 · 기하 · 부기 · 법제 · 경제 · 물리 · 이학 · 생리 · 동물 · 박물 · 어학 · 도화(미술) · 창가(음악) · 체조 등이었고, 왕실 사찰인 돈암동 흥천사에서 봄·가을로 운동회도 열렸다. 흥화학교 교사진은 거마비(교통비)의 명목으로 교감은 매월 20원, 평교사는 15원을 받았다. 당시 일본어 교사는 월급 외 거주비로 월세 20원을 지급받은 것을 보면 충분한 급여는 아니었던 듯하다. 한국인 교사로는 주시경과 이중화와 등이 재직하였다. 

     

     

    1930년경의 흥천사
    지금의 흥천사 대방

     

    외국어의 경우, 초기에는 일본어는 가르치지 않았으나 1905년 일본어 과정을 별도로 설치하여 영어와 일어를 같이 교육했다. 대한제국 내에 증가한 일본의 영향력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당시 대부분의 근대적 학교들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던데 반해,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는 조선인이 세운 신뢰할 만한 학교로 인식되었고, 더욱이 야간 과정이 개설되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1899년 12월만 해도 학생 수가 주간 47명, 야간 79명으로 126명에 달했고, 12월 말에는 주간 60명, 야간 90명, 총 150명으로 늘었다.
     
    이러한 학생 수 증가는 교사(校舍)와 재정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이에 민영환 외 여러 유지들이 출연(出捐)하여 1899년 8월 현재의 종로구 수송동 · 청진동 일대인 수진동으로 학교를 옮겨, 교사를 늘리고 학과를 확대하였다. 또한 흥화학교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도 분교를 설립하여 보수적 도시인 대구와 안동에서도 근대식 교육을 실시되었다. 1905년 민영환이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자결한 뒤에는 교장에 민병석, 교감에 임병항, 총무 교사는 백상규가 맡아 운영했다.

     

     

    민병석 교장 때의 졸업증서 / 1911년 윤희검이 고등과 3학년 과정을 마친 후 받은 졸업증서다.
    흥화학교 포증서 / 1909년 윤희검이 고등과 2학년 재학 중 성적우수자로 받은 표창장으로 유길준이 저술한 <프로이센 7년 전쟁사>와 공책 1권을 포상한다고 쓰여 있다.
    흥화학교 윤희검이 고등과 2학년을 마친 후 3학년으로 진급할 때 받은 증서이다.
    흥화학교 회계부 / 흥화학교의 운영 상황을 보여주는 문서로, 화폐단위는 1905년 화폐정리사업 이후 쓴 ‘원(圜)’을 사용했다. 현재 경기도 등록문화재 로 지정되어 있다. (이상 용인박물관 소장품)

     

    흥화학교는 을사조약 후에는 설립정신을 교육구국(敎育救國)을 위한 인재양성으로 전환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민영환이 자결 순국한 후 각계의 후원이 끊기며 재정난이 심화되었고, 이에 처음의 무상교육 원칙이 무너지고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걷기 시작했다. 이후 흥화학교는 학생들의 수업료, 황실과 학부 보조금, 유지들의 의연금 등으로 근근이 지탱하다가 1911년 결국 폐교되었다.

     

     

    종각 면세점 건물 앞의 민영환 자결터 모뉴먼트
    가평군 조종면 삼충단 / 구한말 순국한 최익현·조병세·민영환 3충신을 기려 제사 터를 세웠다.

     

    민영환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때 부인의 산소를 이장하는 일로 용인에 머무르고 있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급히 서울로 올리온 민영환은 의정대신(국무총리) 조병세와 함께 경운궁 대안문 앞에서 조약 체결에 앞장선 다섯 명 매국노의 처단과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였다. 하지만 입장이 곤란해진 고종은 오히려 그를 구금하였고, 11월 29일 석방된 민영환은 다음날 아침, 노모가 계신 집(지금의 조계사 경내)을 나와 그곳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청지기 이완식의 집(공평동 SM 면세점 건물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때는 11월 30일 오전 6시경으로, 그때 나이 44살이었다. 그의 옷에서는 '경고대한2천만동포유서'(警告大韓二千萬同胞遺書 /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고함)라는 제목의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와 각국 사절, 고종에게 보내는 유서가 나왔는데, 그중 동포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 뒤를 전 국무총리 조병세와 주영서리공사·駐英署理公使 이한응, 김봉학, 홍만식, 이상철 등이 따라 순절하였다) 
      
    嗚呼라.
    國恥民辱이 乃至於此하니
    我人民은 將且殄滅於生存競爭之中矣리라.
    夫要生者는 必死하고 期死者는 得生이니,
    諸公은 豈不諒只아.
    泳煥은 徒以一死로 仰報皇恩하고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하노라.
     
    泳煥은 死而不死하고 期助諸君於九泉之下하리니,
    幸我同胞兄弟는 益加奮勵하고
    堅乃志氣하여 勉其學問하며,
    決心戮力하여 復我自主獨立이면
    則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리라.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하는 가운데에 모두 멸망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더욱더 분발하여 힘쓰기를 더하고
    그대들의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주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민영환의 자결기사가 실린 일본 신문 / 민영환이 을사늑약에 분노해 순국한 사실을 <동경일일신문>이 비교적 비중있게 실었다. (용인박물관)
    런던에서 자결한 주영서리공사 이한응의 관에 붙어온 철제 패찰 (용인박물관)
    조계사 부근에서 충정로로 옮겨진 민충정공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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