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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땅에 이원익 같은 경제관료는 없는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2. 21:30

     
    이름도 생뚱맞은 전쟁추경을 꾸려 국민에게 돈을 나눠주겠다고 한다. 당연히 이번에도 현금이 아닌 지역화폐 형식일 텐데, 현금이건 지역화폐건 간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명분으로 들고 나온 것이, 이란전쟁으로 유가가 오르고 국민생활이 어려워졌으니 국가에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는 것인데, 그 십여 만 원의 돈이 과연 국민가계에 도움이 되겠는가? 국민에게 나눠 줄 돈은 총 26조 원이라 하며, 정부 말로는 0.2%의 경제성장 효과가 있다고 한다.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인지....? 그럼 260조 원을 뿌리면 우리나라 평균 경제성장률 1%의 두 배나 되는 2%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따로 추경을 꾸릴 것도 없이, 또 애써 경제를 신장시키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 예산 750조에서 260조를 할애해서 국민에게 나눠주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런 반박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번 돈 뿌리기는 6월 지방선거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속셈이므로 미래 세대의 빚부담 증가 등, 제 아무리 설득력 있는 얘기를 들이대도 지역화폐는 지급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돈을 뿌리면 서민을 돕겠다는 표면적 의도가 오히려 무색해지리라 본다. 오히려 인플레가 심해져 돈이 없는 서민들은 더욱 고통을 받을 것이다. 어느 임산부에게 들은 경험담을 빌려 설명드리자면, 그 임산부는 2023년~2024년 일부 지자체에서 실시한 취약계층 또는 일반 산모를 대상으로 산후조리원 비용(보통 50만 원~150만 원)을 지원받아 산후조리원에 등록했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비용이 그새 100만 원이 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산후조리원의 경우는 한정된 대상에 한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사회적 충격이 제한적일 수 있지만, 이재명 정부처럼 전 국민을 대상으로 남미(南美)식 돈 뿌리기가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은 스테그플레이션 속에 일부 남미 국가와 같은 추락을 맛보게 될 것이 뻔하다. 우리는 지금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은 흔히 "포퓰리즘이 초래한 경제 몰락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도 뒤지지 않는다. / 우리는 왜 이처럼 실패한 나라들을 답습하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앞서도 말한 조선 중기의 관료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보다 근본적인 치유법을 찾았다. 1587년(선조 20) 부친상을 마친 이원익이 평안도 안주목사(安州牧使)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조정이 서둘러 그를 안주목사에 임명한 이유는 당시 안주 일대가 심각한 기근으로 백성들의 삶이 몹시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원익과 같은 뛰어난 행정가가 필요했던 것인데, 현지 사정을 목도한 이원익은 지금의 이재명 정부처럼 지역화폐를 발행했다. 관아에서 식구 수에 맞춰 발행한 물표를 가져오면 쌀을 나눠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주목(安州牧) 관아에 쌀이 있을 리 없을 터, 우선 조정에 청해 광흥창 비축미 1만여 석을 빌려 구휼미로 지급했다. 아울러 굶주림에 종곡(種穀)까지 먹어치운 백성들에게는 내년 봄에 농사지을 종곡을 따로 나눠주었다. 그리고 구휼의 일환으로써 연 4번제인 군인들의 의무 근무기간을 줄여 6번제를 시행하였다. 즉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 하게끔 하여 백성들이 군역을 덜고 생업에 종사토록 만들었다.
     
    나아가 잠업(蠶業)을 권장했다. 농업의 흉작을 대신할 대체 수단을 잠업에서 찾은 것이니, 이때부터 안주에서는 대대적인 뽕나무 식목(植木) 사업이 시작되었다. 지역화폐를 발행하는 일 따위는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의 미봉책에 불과하므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해 안 가 안주에 숲을 이룬 뽕나무는 누에의 풍부한 먹이가 되었고, 집집마다 잠사(蠶事)가 이루어져 개인 소득증대는 물론 지역경제가 활성화되었다. 이후 안주 사람들은 뽕나무를 이공상(李公桑, 이원익 상공의 뽕나무)이라고 불렀는데, 이공상은 이원익의 이임(移任) 후에도 안주 백성들의 생계를 떠받친 든든한 밑천이 되었다.  
     
     

    서울시기념물 1호 잠실리 뽕나무 / 조선초 왕실에서 시흥군 잠실리에 조성한 뽕밭이 시원이다. 그때 식재된 뽕나무들은 1972년경 마지막 1그루가 고사하며 모두 사라지고 1982년 이식(移植)된 뽕나무 3그루가 잠원동 55-11번지 한신 16차 등 아파트 120동 앞에서 명백을 잇고 있다.
    1972년 대한잠사회가 촬영한 잠원동 마지막 뽕나무 / 이미 고사한 듯 보인다. 위 아파트 앞 철제 받침한 고사목 같다.

     
    백성들에게 보다 도움이 된 이원익의 경제정책은 세제(稅制) 개혁이었다. 그는 안주목사 시절에는 아전들이 담당하던 전세(田稅) 운반을 자신이 직접 수행함으로써 아전들의 부당 징수와 횡령을 근본적으로 봉쇄했다. 그리고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 영의정으로 조정에 복귀한 후에는 저 유명한 대동법(大同法)을 만들어 세제개혁을 실시했다. 그해 발족한 경기선혜청이 시작이었다.
     
     

    남대문시장 입구 선혜청 터 표석

     
    그는 선조 때부터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야만 나라가 산다고 주장했는데, 새로운 왕 광해군이 즉위하자 젊은 관료 김육(金堉, 1580~1658)과 더불어 드디어 경기지역에 대한 대동법을 시범 시행할 경기선혜청을 발족시켰던 것이다. 대동법의 대동(大同)이란 문자 그대로 '크게 똑같다', '다 똑같다'의 의미이다. 무엇이 똑같은가 하면 세금이 똑같다는 것이니 곧 조세의 형평성을 의미함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조세 정의의 실천'이 곧 대동이랄 수 있는데, 이 대동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똑같지가 않고 오히려 차별적이다. 즉 부자들은 세금을 더 많이 내고 그로 인해 가난한 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만드는 세법(稅法)으로, 오늘날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부자 증세법 같은 것이었다.
     
    대동법은 그간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던 공납(貢納)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토지 소유량에 따라 쌀로 납세를 통일한 세법이었다. 그래서 양반이나 평민이나 징수 방법이 다 똑같아진 것이니, 토지 1결 당 12두(또는 이에 해당하는 포목이나 돈) 징수를 원칙으로 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에게는 많이 거두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었다.
     
    아울러 그전 공납의 경우에 횡횡하던 방납(防納)의 횡포, 즉 아전이나 상인들이 백성 대신 특산물을 미리 사서 관청에 내고, 농민에게는 원래 가격의 몇 배를 받아 챙기던 조세 비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림 출처: 생방송한국사
    이원익의 화폐에 대한 인식 / 국가유산포털

     
    이원익은 당색(黨色)에 치우침이 없이 오로지 정무에만 진력하였던 바, 인조반정 후에도 중용되어 삼도(충청 전라 강원)에 대한 대동법 추진에 매진했고, 그 추진기관으로 재성청 설치를 주도했다. 재성(裁省)은 국가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삭감한다는 의미로서, 요즘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지출을 늘이고 세금을 증대하는 정책과는 정반대의 시책이었다.
     
    이때 이원익은 76세의 고령이었으나 체력적 한계나 기득권세력의 저항에 굴함이 없이 대동법 시행에 매진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김육과 그의 아들 김좌명(金左明, 1616~1671)에 의해 대동법이 확장되었던 바, 숙종대인 1708년에는 평안·함경·제주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대동법이 실시될 수 있었다. 


     

    남양주시 삼패동의 김육 신도비(왼쪽)와 김좌명 신도비
    <호서대동사목> / 김육이 1654년(효종 5)에 편찬한 충청도 지역의 대동법시행에 관한 제반원칙 등을 기록한 책
    평택 소사벌의 대동법시행기념비
    탁본 / 비의 원이름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 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이다.
    오리선생문집
    오리영우 / 광명시 소사동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관징이 쓴 현판이 후손에 보존돼 전한다. / 사우(祠宇)가 1694년(숙종 20) 건립되었음을 말해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사당에 모셔진 이원익(1547~1634) 영정 사본의 원본 / 평양의 서리들이 이원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생사당(生祠堂)에 봉안된 초상으로 알려져 있다.


    오리(梧里) 이원익은 임진왜란 평양전투의 공훈과 이순신을 발탁해 임진왜란을 극복한 전쟁 영웅으로서도 유명하나 무엇보다 청백리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판서와 재상을 지냈으면서도 내내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집에 비가 샐 정도로 청빈한 삶을 영위했다. 현 광명시 오리로 347번지에 있는 '관감당(觀感堂)'은 오리대감 댁에 비가 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인조가 1630년(인조 8)에 새 집을 지어 하사하면서 붙여준 당호(堂號)이다. 이원익의 청렴하고 소박한 삶을 '보고 느낄 만한 집'이라는 뜻이다. 

     

    관감당은 높은 석축 위에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건립되었다. 본래 지어진 집은 병자호란 때 훼철되어 수리돼 오다가 1915년 현재의 집이 새로 지어졌다. 구조는 중앙에 2칸 대청이 있고 그 왼쪽으로 2칸의 온돌방, 오른쪽에 한 칸의 온돌방이 위치하는 특이한 형식인데, 17세기 당시의 가옥은 아니더라도 경기도 살림집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20세기 초, 목재를 다듬는 수법이 잘 드러나 있어 가치가 높다고 한다.

     

    끝으로 <경기일보>에 실린 아래 글 하나를 첨부한다. 

     

    '오리선생문집'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많은 내용은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문이다. 그러나 인조는 이원익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조정에 출입하기도 어려운 상태였음에도 강권했다. 그만큼 인조는 이원익을 의지했다. 1634년 정월, 이원익은 마침내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향년 88세. 실록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광명시 소하동)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관감당
    본래의 현판이 유물 전시관인 충현관에 보존돼 있다.
    소하동 산137ㅡ1의 이원익 묘 / 오른쪽은 부인 영일정씨의 무덤이다.
    묘표
    후경
    묘소 오르는 길 / "풍수지리와 상관없이 그저 빈 땅에 묘를 써라"고 한 유언에서마저 그의 인품이 빛난다.
    묘소 입구의 신도비각
    이원익 신도비 / 전체 높이 약 335㎝, 비신 높이 185㎝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85호)
    신도비 탁본 / 마멸이 심해 두전 외에는 식별이 원활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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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