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배신자 시리즈 I ㅡ 낙랑군 왕굉과 양읍의 경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7. 21:25

     

    111년(영초 5년) 부여가 낙랑을 공격한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다. <후한서/後漢書> 안제(安帝)본기와 부여전 등에 기록되어 있어 사실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그중 <후한서> 안제본기의 내용은 '111년 3월 부여가 변방의 요새를 넘어와 관리를 살상했다'(安帝 永初五年 三月 夫餘夷犯塞 殺傷吏人)는 것이고,

     

    부여전의 내용은 '111년 부여왕이 보·기병 7~8천 명을 이끌고 낙랑군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했으나 후일 귀부하였다'는 것이다.(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당대의 말머리 금동장식 / 국립중앙박물관 낙랑 유물
    당대 무기인 쇠뇌와 투창 / 국립중앙박물관 낙랑 유물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쇠뇌병 / 중국 시안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선사실의 세형동검과 투창
    국립중앙박물관 부여실의 유니크한 부여 금귀걸이

     

    이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부여는 우리의 인식과 달리 한(漢)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정도의 군비를 갖춘 강국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일반적으로 평양 일대에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漢)의 낙랑군이 실은 요서(혹은 요동)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낙랑이 평양 일대에 위치했다면 부여가 변방의 요새를 넘어 낙랑군을 공격할 수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낙랑과 부여 사이에는 고구려가 자리하고 있기에)  

     

    아울러 적어도 서기 111년까지는 낙랑군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바,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에 세운 4군(郡) 중의 낙랑군은 요서에서 최소 119년을 존속했다. 그러나 한 번은 큰 위기가 있었다. 서기 25년, 낙랑군에서 조선인 사인(士人, 태수 보좌관) 왕조(王調)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왕망(王莽, BC 45~AD 23)이 세운 신(新)나라가 무너지고 광무제 유수(劉秀, BC 6~ AD 57)가 세운 후한(後漢)이 중원을 접수하던 시기여서 먼 낙랑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즉 후한 광무제가 신나라 황제 왕망과 싸우느라 정신없는 사이, 조선국 유민인 왕조가 그 틈을 이용해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독립하였 바, 스스로를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라 칭하였다. 하지만 서기 30년, 후한 광무제가 드디어 왕조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였으니, 왕준(王遵)을 새로운 낙랑태수로 삼고 그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왕조와 왕준의 군대는 충돌하지 않았다. 삼로(三老, 지방직 우두머리왕굉(王閎)과 군결조리(郡決曹吏) 양읍(楊邑)이 배신하여 왕준의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왕조를 죽이고 한(漢)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조선인이면서 어찌하여  왕조를 배신하고 한나라에 투항했을까? 역사는 그에 대한 대답을 간단·명확히 해준다. 그 조상이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왕굉은 기원전 177년 일어난 제북왕 유흥거(劉興居)의 난(亂) 때 낙랑으로 망명한 왕중이란 자의 9대손이었고, 양읍 역시 조상이 산동성에서 건너온 중국인으로 중국 친화적 사고를 가진 자였던 것이다. 이들은 왕조를 죽이고 투항한 공으로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졌는데, 왕굉은 작위를 사양하였다. 황제가 기특히 생각하여 낙양으로 불러올렸으나 상경길에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고구려를 배신하고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봉해졌다가 얼마 후 병에 걸려 죽은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과 같은 경우라 하겠다. 

     

    낙랑군은 이후 220년 한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약 100년을 더 존속하다 313년 미천왕에 의해 멸망하며, 장장 400년간이나 이어진 한사군의 역사를 끝맺는다. 그런데 위의 낙랑 유물, 그리고 아래의 유명한 황금 버클은 요동에 있던 낙랑군의 유물이 아니라 평양 일대에 자리하던 최씨낙랑국의 유물이다. 아래의 버클은 중국식이 아닌 스카타이 계통의 영향을 받은 유물로서, 당시 중국에서는 이와 같은 금세공기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최씨낙랑국은 1세기경 한반도 북부(수도는 평양으로 추정됨)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삼국사기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낙랑공주는 낙랑왕 최리(崔理)의 실제 딸이다. 낙랑국은 고조선 유민 출신인 최숭(崔崇)이 건국했다고 전해지며 32년(대무신왕 15년) 고구려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아들로 낙랑국을 멸망시키고 요서로 진출했으나 태자하 전투에서 후한에 패해 전사했다.  

     

     

    7마리의 용 부조와 터키석 44개로 장식된 낙랑국 순금 허리띠 버클 / 평안남도 대동군 용악면 상리 희창동에서 발견됐다.
    낙랑국 토기
    낙랑토성에서 발견된 1세기 낙랑윤마(樂浪輪馬□) 봉니 / 낙랑국 시기 공문서를 봉함할 때 사용된 유물로, 당시 수레(윤)와 말(마)을 관리하던 관직인 '윤마□'와 관련된 봉니이다. 봉니(封泥)는 죽간이나 목간으로 된 공문서를 노끈으로 묶은 뒤, 그 이음매에 진흙을 붙이고 인장을 찍어 기밀을 유지하던 방식의 도장 자국이다. (도쿄국립박물관)
    1916년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낙랑국 박산향로(博山香爐) / 국립중앙박물관
    2009년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정백동(貞柏洞) 364호분에서 발견된 낙랑국시대 논어 죽간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정백리 낙랑국의 토축 성곽과 고분 / 현 평양직할시 낙랑구역 정백동이다.
    토성 내에서 발견된 낙랑국 건물지
    토성 내에서 발견된 낙랑국 건물지
    낙랑군과 낙랑국
    평양직할시 낙랑구역의 낙랑국 토성 / 좌표:   38°56'24"N   125°37'32"E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