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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신자는 잘 산다 / 예식진과 연남생의 경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8. 21:07

     

    흔히들 배신자의 최후는 비참하다고 말한다. 최근의 정치적 상황을 대입하자면 이혜훈이라는 정치가가 그렇게 되었고, 한동훈은 그쪽으로 진행 중이다. 그 밖에도 김상욱 등 귀추가 주목되는 사람들이 있다. 금번 지방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니 곧 결과가 나올 듯싶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배신자들의 최후가 반드시 비참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영전해 잘 살았다. 오늘은 그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식진과 연남생은 김자점, 이완용 등과 더불어 민족 배신자에 속한다. 예식진과 연남생은 중국에 붙어 민족을 배신하였을 뿐 아니라 나라까지 멸망시켰다. 우리 민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대표적인 배신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학창시절 백제 의자왕이 당나라 침입군 장수 소정방에게 항복을 함으로써 나라가 망했다고 배웠다. 나당연합군과의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열흘만이었다. 의자왕은 소정방과 신라 장수 김법민에게 모욕을 당한 후 당나라 수도 장안에 끌려가 죽었다.

     

    의자왕은 왜 그렇게 쉽게 항복을 했는가는 지난 20세기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로 여러 추측만 난무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 2006년 중국 낙양 골동품상에서 백제인의 묘지명(墓地銘) 하나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비석의 주인공은 대당 좌위위 대장군(大唐左威衛大將軍) 예식진(祢寔進, 615~672)으로 660년 의자왕 항복 당시 웅진성 방령(方領, 성주)이던 사람이었다.

     

     

    예식진의 묘지명

     

    그 묘지명을 2012년 12월, KBS 역사 프로그램 '충격보고서, 의자왕 항복의 비밀'에서 전격 공개함으로써 세인들은 비로소 백제 망국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비밀에 접근하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KBS 취재팀은 먼저 낙양 제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지하창고에 보관된 예식진 묘지명을 어렵사리 카메라에 담았다. 그 묘지명에서 처음 주목된 문장은 그가 백제 웅천인(熊川人), 즉 충남 공주 사람이며 그의 아버지 예사선(祢思善)과 할아버지 예다(譽多)는 모두 좌평 벼슬을 지낸 백제 명문가의 자손이라는 것이었다.

     

     

    예식진 묘지명의 뚜껑돌
    예식진 묘지명

     

    KBS는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 나오는 '백제의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 항복했다'(其大將禰寔 又將義慈來降)'는 기록과, <삼국사기>에 나오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데리고 스스로 성을 나와 항복했다'(義慈 率 太子及雄鎭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는 내용, 그리고 <신당서>에 실린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其大將禰寔  與義慈降)는 기록을 근거로써, 웅진성을 지키던 성주 예식이 의자왕을 붙잡아 소정방에게 항복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과정에서 예식은 예식진과 동일인으로 예식진은 당나라 귀화 후 얻은 이름이며,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술된 '將'과 '與'는 왕을 '사로잡았다'와 '사로잡아 데려갔다'는 의미로 풀어야 한다는 중국학자의 해석이 있었다. 즉 백제장수 예식은 웅진성에서 농성하던 의자왕을 오히려 붙잡아 포박해 당나라에 바침으로써 대당 좌위위 대장군(大唐左威衛大將軍)이라는 큰 벼슬을 받았고, '우무위대장군', '좌무위대장군', '사반주자사', '절충도위' 등을 역임하며 당나라에서 대대손손 잘 살았던 것이다. 

     

     

    웅천 방령 예식진이 지키던 웅진성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 묘지명
    의자왕이 묻힌 낙양 북망산 / 낙양시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부터 왕후장상의 묘지로 사용되었다. 가요 '성주풀이'에 나오는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뇨..."가 바로 그 내용이다.
    최근의 북망산 / 하지만 문화혁명 시절 밭으로 개간되며 산은 사라지고 많은 묘지가 황폐화되었던 바, 던 바,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의 무덤은 찾을 길 없다. 다만 부여융의 묘지명이 이 일대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예식진의 것과 함계 발견된 아들 예소사 묘지명 / 옆줄 친 곳에 예식진이 의자왕을 붙잡아 귀순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연남생(淵南生)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수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634년에 연개소문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641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태막리지(太莫離支)로써 정권을 장악하자 9세 때인 642년 선인(先人)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이후 중리소형(中裏小兄), 중리대형(中裏大兄)이 되었고, 23세에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 24세에는 장군직을 겸하였으며, 28세에는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莫離支 兼 三軍大將軍)이 되었다.

     

    그리고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32세의 나이로 태막리지 직을 계승해 국가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과의 알력이 있던 바, 연남생의 지방 순시 때 그 두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다. 666년 연남건과 연남산은 수도 평양성을 장악하고 연남생의 아들인 연헌충을 살해하였다. 연남생은 옛 수도였던 국내성에서 농성하며 두 동생과 맞섰고, 한편으로는 아들 연헌성을 당나라에 파견해 도움을 청했다.

     

    마침 잘 됐다 싶었던 당나라는 적극적으로 연남생을 도왔다. 당나라의 관료(시어사) 가언충(賈言忠)은 당 황제 고종에게 "예전엔 고구려에 틈이 없었지만 이젠 남생 덕분에 내부사정을 다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것"(<삼국사기> 보장왕 조)이라고 자신하며 파병을 권했다. 이에 당나라는 글필하력(契苾何力)을 사령관으로 하는 50만 대군을 파견하였고, 연남생은 666년 6월 국내성을 비롯한 9개 성을 들어 바치며 투항했다.

     

    666년 9월 연남생은 그 공으로 당고종으로부터 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遼東都督 兼 平壤道安撫大使)라는 벼슬을 제수받고 현도군공(玄莬郡公)에 봉해졌다. 그리고 당나라 군대의 향도(길잡이 장수)가 되어 평양성으로 쳐들어왔다. 강국 고구려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으니 수도 평양성을 중심으로 2년간 끈질기게 항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당군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668년 말, 연남생과 내통한 승려 신성(信誠)이 평양성 문을 열어주며 승부가 기울었다. 

     

     

    일제강점기 평양성 대동문 / 내성의 동문으로 평양성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보존 상태가 훌륭하다.
    연광정 / 관서팔경의 하나로 대동문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을밀대 / 1894년 청일전쟁 때 양국간의 격전이 있었다.
    평양성 칠성문 / 북성의 북문으로 을밀대와 만수대 사이에 위치한다. 고려와 거란군과의 격전이 펼쳐진 곳이다.
    평양성 전금문 / 북성의 남문으로 부벽루와 을밀대 사이에 위치한다. 빼어난 풍광으로 유명하다.
    부벽루의 봄 / 모란봉 동쪽 절벽인 청류벽 위에 위치한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꼽힌다.
    1921년에 찍은 평양성 북성 전경

     

    이에 물밀듯이 밀려온 당나라군은 평양성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고구려군을 이끌던 연남건은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며 보장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크게 공을 인정받았던 바, 고종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봉해졌고 식읍 3,000호를 하사 받았다. 이후 고구려 고토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연남생은 안동도호부 관리로 요동에 파견되었고, 2년 후인 679년 46세의 나이로 안동도호부 관사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연남생이 죽자 당나라 조정은 극진한 예우로써 장례를 치렀으니, 장례 물품과 비용 일체를 내려주었고, 3일간 정무를 중지했다. 안동도호부의 시장도 3일간 철시하였고 농사도 중지됐다. 아울러 5품 이상의 관리는 빈소를 찾아가 조문토록 하는 등 사실상 국장에 가까운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묘지명에는 연남생의 죽음에 대해 '훙(薨)'이라 표기했던 바, 그를 제후에 준해 대우했음을 알 수 있다. (황제는 '붕'·崩, 왕과 제후의 죽음은 '훙'이다) 

     

    그의 아들인 천헌성(泉獻誠), 증손자 천비(泉毖) 등도 관직을 받고 호의호식하였던 바, (당고조 이연의 '연'을 피휘하여 '천'으로 성을 바꾸었다) 천남생(연남생), 천헌성, 천비 등의 묘지명이 1922년 1월 20일 중국 하남성 낙양시 북쪽 교외의 밭에서 연이어 출토되며 연남생과 그의 후손들이 당나라에서 잘 먹고 잘살았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지금 나라꼴을 보니 앞으로 우리나라 사람도 중국에 아부하여 투항하면 필시 잘 살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그 불명예는 이처럼 돌에 새겨져 길이길이 민족반역자로 기록될 것인데, 어느 쪽을 택하는가는 취사선택의 문제이다.  

     

     

    천남생의 묘지명 / 92X92cm
    중국 낙양시 북망산 인근 밭의 연남생 일가 무덤 / 이 위치는 2005년 확인됐다. (권덕영 부산 외국어대교수 제공 사진)
    연남생 묘지명의 탁본(부분)

     

    * <역주 한국고대금석문>(1992)에 의거한 연남생의 묘지명

     

    大唐故特進行右衛大將軍兼檢校右羽林軍仗內供奉上柱國卞國公贈幷州大都督泉君墓誌銘幷序 
    中書侍郎兼檢校相王府司馬王德眞撰 朝議大夫行司勲郎中上騎都尉渤海縣開國男歐陽通書 
    若夫虹光韞石卽任土而輝山蠙照涵波亦因川而媚水洎乎排朱閤登紫蓋騰輝自遠踰十乘於華軒表價增高裂五城 
    於奧壤況復珠躔角氐垂景宿之精芒碧海之罘感名山之氣色擧踵柔順之境濫觴君子之源抱俎豆而窺律呂懷錦繡 
    而登廊廟移根蟠壑申大廈之隆材轉職加庭奉元戎之切寄與夫隋珠薦䄣楚璧緘繩豈同年而語矣於卞國公斯見之 
    焉公姓泉諱男生字元德遼東郡平壤城人也原夫遠系本出於泉旣託神以隤祉遂因生以命族其猶鳳產丹穴發奇文 
    於九苞鶴起靑田稟靈姿於千載是以空桑誕懿虛竹隨波竝降乾精式摽人傑遂使洪源控引態掩金樞曾堂延袤勢臨 
    瓊檻曾祖子遊祖太祚竝任莫離支父蓋金任太大對盧乃祖乃父良冶良弓竝執兵鈐咸專國柄桂婁盛業赫然凌替之 
    資蓬山高視確乎伊霍之任公貽厥傳慶弁幘乃王公之孫宴翼聯華沛鄒爲荀令之子在髫無弄處卝不羣乘衛玠之車 
    塗光玉粹綴陶謙之帛里暎珠韜襟抱散朗摽置宏博廣峻不疵於物議通分無滯於時機書劍雙傳提蔗与截蒲俱妙琴 
    碁兩翫雁行与鶴迾同傾體仁成勇靜迅雷於誕據抱信由衷亂驚波於禹鑿天經不匱敎乃由生王道無私忠爲令德澄 
    陂万頃游者不測其淺深繚垣九仞談者未窺其庭宇年始九歲卽授先人父任爲郎正吐入榛之辯天工其代方昇結艾 
    之榮年十五授中裏小兄十八授中裏大兄年廿三改任中裏位頭大兄廿四兼授將軍餘官如故廿八任莫離支兼授三 
    軍大將軍卅二加太莫離支摠錄軍國阿衡元首紹先疇之業士識歸心執危邦之權人無駮議于時 蘿圖御㝢楛矢褰 
    期公照花照萼內有難除之草爲榦爲楨外有將顚之樹遂使桃海之濱隳八條於禮讓蕭墻之內落四羽於干戈公情思 
    內款事乖中執方欲出撫邊甿外巡荒甸按嵎夷之舊壤請羲仲之新官二弟產建一朝兇悖能忍無親稱兵內拒金環幼 
    子忽就鯨鯢玉膳長筵俄辭顧復公以共氣星分旣飮淚而飛檄同盟雨集遂銜膽而提戈將屠平壤用擒元惡始達烏 
    骨之郊且破瑟堅之壘明其爲賊鼓行而進仍遣大兄弗德等奉表入朝陳其事迹屬有離叛德遂稽留公乃反旆遼東移軍 
    海北馳心 丹鳳之闕飭躬玄菟之城更遣大兄冉有重申誠効曠林積怨先尋閼伯之戈洪池近遊豈貪虞叔之劍 
    皇帝照彼靑丘亮其丹懇覽建產之罪發雷霆之威丸山未銘得來表其先覺梁水無孼仲謀憂其必亡乾封元年公又遣 
    子獻誠入朝   帝有嘉焉遙拜公特進太大兄如故平壤道行軍大摠管兼使持節按撫大使領本蕃兵共大摠管契 
    苾何力等相知經略公率國內等六城十餘万戶書籍轅門又有木底等三城希風共款蕞尒危矣日窮月蹙二年奉 
    勅追公入朝總章元年授使特節遼東大都督上柱國玄菟郡開國公食邑二千戶餘官如故小貊未夷方傾巢䴏之幕 
    大君有命還歸蓋馬之營其年秋奉   勅共司空英國公李勣相知經略風驅電激直臨平壤之城前哥後舞遙振崇 
    墉之堞公以罰罪吊人憫其塗地潛機密搆濟此膏原遂與僧信誠等內外相應趙城拔幟豈勞韓信之師鄴扇抽關自結 
    袁譚之將其王高藏及男建等咸從俘虜巢山潛海共入隄封五部三韓竝爲臣妾遂能立義斷恩同鄭伯之得儁反禍成 
    福類箕子之疇庸其年与英國公李勣等凱入京都策勲飲至獻捷之日男建將誅公內切天倫請重閽而蔡蔡叔上感 
    皇睠就輕典而流共工友悌之極朝野斯尙其年蒙授右衛大將軍進封卞國公食邑三千戶特進勲官如故兼檢校右羽 
    林軍仍令仗內供奉降禮承優登壇引拜桓珪輯中黃之瑞羽林光太紫之星陪奉輦輅便繁左右恩寵之隆無所与讓腎 
    腸之寄莫可爲儔儀鳳二年奉   勅存撫遼東改置州縣求瘼卹隱襁負如歸劃野疎疆奠川知正以儀鳳四年正月 
    廿九日遘疾薨於安東府之官舍春秋有六 震扆傷鼙台衡怨笛四郡由之而罷市九種因之以輟耕」
    詔曰懋功流賞寵命洽於生前縟禮贈終哀榮賁於身後式甄忠義豈隔存亡特進行右衛大將軍上柱國卞國公泉男生 
    五部酋豪三韓英傑機神穎悟識具沈遠秘筭發於鈐謀宏林申於武藝僻居荒服思効款誠去危就安允叶變通之道以 
    順圖逆克淸遼浿之濱美勣遐著崇章荐委入典北軍承宴私於紫禁出臨東陼光鎭撫於靑丘佇化折風溘先危露興言 
    永逝震悼良深宜增連率之班載穆追崇之典可贈使持節大都督幷汾箕嵐四州諸軍事幷州刺史餘官竝如故所司備 
    禮册命贈絹布七百段米粟七百石凶事葬事所須竝宜官給務從優厚賜東園秘器差京官四品一人攝鴻臚少卿監護 
    儀仗鼓吹送至墓所往還五品一人持節䝴璽書吊祭三日不視事靈柩到日仍令五品已上赴宅寵贈之厚存歿增華哀 
    送之盛古今斯絶考功累行諡曰襄公以調露元年十二月廿六日壬申窆於洛陽邙山之原禮也哀子衛尉寺卿獻誠夙 
    奉庭訓早紆朝黻拜前拜後周魯之寵旣隆知死知生吊贈之 恩弥縟茹荼吹棘踐霜移露痛迭微之顯傾哀負趍之潛 
    度毀魏墳之舊漆落漢臺之後素刊翠琬而傳芳就黃壚而永固其詞曰 

    三岳神府十洲仙庭谷王產傑山祇孕靈訏謨國緯舃弈人經錦衣繡服議罪詳刑(其一)伊人閒出承家壘祉矯矯鳳鶵昂昂 
    驥子韞智川積懷仁岳峙州牧廌刀橋翁授履(其二)消灌務擾鄒盧寄沈文樞執柄武轄操鈐荊樹鶚起蘆川鴈沈旣傷反袂 
    且恨移衾(其三)肅影麟洲輸誠 鳳闕朝命光寵          天威吊伐殄寇瞻星行 
    師計月夷舞歸獻凱哥還謁(其四)彎弧對泣叫閽祈帝遽徙秋荼復開春棣鏘玉高祑銜珠近衛寶劍舒蓮香車褭桂(其五)

    輕軒出撫重錦晨遊抑揚穟穴 
    堤封亶洲贍威仰惠望景思柔始襜來軸俄慌去輈(其六)劍革勤王聞鼙悼 扆九原容衛三河兵士南望少室北臨太史海 
    就泉通山隨墓起(其七)霜露年積春秋日居墳圓月滿野曠風疎幽壤勒頌貞珉瘞書千齡暐曄一代丘墟(其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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