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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 극렬했던 그리스 빨갱이 & 그리스군 참전기념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10. 22:06
30년 만에 여주 영월루를 찾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산천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싱그러운 강바람도 그대로이다. 하지만 주변 환경은 크게 달라졌으니, 남한강변에 오랫동안 자리했던 짓다 만 호텔의 흉물스러운 철골도 이제는 번듯한 건물로 바뀌었고 처음 보는 고층건물도 여러 채이다. 무엇보다 눈을 끄는 것은 영월루 아래, 영월근린공원에 자리한 신전 형태의 그리스군 한국전 참전기념비이다.

그리스군 참전기념비 
중앙의 고대 그리스군 투구와 창과 올리브 나무잎 문양 
참전기념비 기둥 
참전 약사가 새겨진 동판 
안내문 
참전기념비와 영월루 
참전기념비에서 굽어본 남한강
1974년 10월에 3군사령부 주관으로 세워진 그리스군 참전기념비는 여주 한적한 야산에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확장되며 휴게소가 개장하고, 이어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게 되며 같은 장소임에도 입지가 달라졌다. 이른바 교통의 요충지가 된 것으로, 이에 참전비 주위로 대형물류창고와 상업용 입간판, 농산물판매장, 수소충전소 등이 들어서며 주변이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참전비가 가려지게 되었고, 참전비에 가기 위해서는 좁은 통로를 이리저리 지나 올라가게 되어 오히려 접근성이 나빠졌다.
이에 2010년 내방한 그리스참전용사협회장이 주한 그리스대사관을 통해 환경정화 등을 건의했고,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전 계획이 추진되어, 지금의 남한강변 영월공원 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로부터 석재를 공수하여 새로 만들어진 모뉴먼트에는 기존 기념비 중앙의 그리스 신들의 부조를 없애고, 고대 희랍전사들의 투구와 창을 디자인하여 간결미를 더하였던 바, 본래의 심플하고 그리스적 이미지를 잘 살렸다는 평을 듣던 기념비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최초의 그리스군 참전기념비 / 국가기록원 사진
그리스군 참전은 1950년 6.25전쟁 발발 나흘 뒤인 6월 29일 그리스의회에서 한국전 파병을 전격 결정하며 이루어졌다. 그리스가 한국전 파병을 이토록 신속히 결정한 것은 무엇보다 공산주의에 넌더리가 났던 까닭인데,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에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분개했다.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리스는 우리 대한민국 건국 초기와 같이 빨갱이들의 발호가 극렬하였으니 1944년부터 약 5년간 치열한 내전을 치르기도 했다. (잔불이 다 진화된 1963년까지 20년간을 내전 기간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리스 공산당(Κομμουνιστικό Κόμμα Ελλάδας, KKE)은 1918년 설립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으로,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18년 11월 창당됐다. 그리스에 공산주의가 침투되는 과정은 구 유고연방이 있을 때를 상기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니 당시 발칸반도에 있던 유고슬라비아 · 알바니아 ·불가리아 · 루마니아 등의 국가가 모두 공산국가로서, 그 위쪽에는 바로 종주국 소련이 있었다.

그리스 공산당 당기
이처럼 그리스는 우리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공산화되기 쉬운 환경에 있었으나, 유럽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공산국가로 만들 수 없다는 영국의 기치가 먹혀 마침내 미국도 정부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한 덕에 그리스의 공산화를 막아낼 수 있었다. KKE는 사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2차대전 중 그리스를 침공한 이탈리아 뭇소리니 군대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고, 이후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자 1941년 국민해방전선(EAM)과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을 결성해 무장 저항 운동을 벌였다.
그리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1944년 이후부터는 다시 EAM과 ELAS가 그리스·영국 연합군과 맞섰다. 그 양(兩) 세력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자 그 대안으로써 히틀러 괴뢰정부 당시 카이로로 망명했던 총리 요르요스 파판드레우가 아테네로 돌아와 1950년부터 내각을 이끌었다. 본래 그가 사회주의 정당인 그리스 사회민주당의 당수였기에 KKE에서도 반발이 적었던 것인데, 그렇지만 이번에는 영국의 지원으로 통합 정부를 구성하며 KKE를 국가의 주요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산당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해방 후의 혼란 / 1944년 12월 3일 아테네에서 데케므브리아나라고 불리는 좌파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그리스 군이 EAM계 집회 참가자들에게 발포해 28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다.
KKE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 이후 전국에서 공산당 탄압이 시작되자 산지로 숨어들어 빨치산을 조직해 활동했다. 그러다 1946년 봄 ELAS 빨치산이 유고슬라비아 방면의 산악지대에서 그리스 국경에 침입하며 그리스 민주군(Δημοκρατικός Στρατός Ελλάδας, DSE)과 본격적인 내전이 일어났다. 그리스는 전 국토의 80%가 산악지대로서 빨치산이 활동하기 용이한 환경을 지니고 있었던 바, DSE는 쉽게 공산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활동 반경을 넓힌 KKE는 1947년 12월 24일 알바니아 국경에 있는 그라모스 산에서 '임시민주정부'(Προσωρινή Δημοκρατική Κυβέρνηση)를 선포했다.


그리스 내전에 관한 포스터 
공산군에 포격을 가하는 정부군 

전장의 시신들 
그리스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빨치산 ELAS 공산당 대원 
영국군 베레모를 쓴 그리스 정부군
즈음하여 벤 플리트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내전에 참전하였고, 1948년 5월 공산군의 거점인 그라모스 산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이후 공산군은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은 패배하며 1949년 8월 KKE는 해체되었다. (이때 공을 세운 벤플리트 장군은 이듬해 일어난 한국전쟁에도 미육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후 KKE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으로 탈출하였고 일부는 아예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그리스 산악지대 공격에 나선 우익 연합군 
1949년 8월 29일, 우익 연합군은 마침내 그라모스 산봉우리에 깃발을 꽂았다. 
그라모스 산 점령 후 기념촬영을 한 우익 연합군 장교 
독일군 무기로 무장하고 시가전을 벌이는 공산 게릴라 
영국군 무기로 무장하고 시가전을 벌이는 우익 군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1892~1992) 장군 /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을 지내며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국군 현대화의 기틀을 마련하여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린다. 
한국전 때의 밴 플리트와 이승만 / LIFE지에 실린 사진이다.
하지만 내란은 종식되지 않았으니, KKE는 불법 정당으로 해체되었으나 그 잔당들이 좌파계열의 통합민주당(Ενιαία Δημοκρατική Αριστερά, ΕΔΑ)을 지지하며 다시 불씨를 피웠다. 공산당 세력은 1967년 쿠데타로 그리스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더욱 탄압 대상이 되었지만, 그것으로 와해되지는 않았다.
KKE는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해 프라하의 봄 유혈 사태를 일으키자 일부 양심세력이 이탈하며 조직이 붕괴되었다. 하지만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의회 민주주의가 회복된 후 그리스 공산당은 다시 합법화돼 활동을 재개하였던 바, 2023년 그리스 총선에서는 제4당이 되었다.

되실아난 공산당 / KKE 지지지들이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6·25전쟁 때 그리스군은 유엔군 중 다섯 번째로 많은 총 5,532명의 병력을 파병하여 186명이 전사하고 610명이 부상당했다. 특히 유엔군이 일방적 유세를 보였던 공군에서의 그리스 전투비행단의 활약은 발군이었던 바, 2천916회의 출격 임무와 13만 7천700시간을 비행을 수행하며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 백령도 지원작전 등에 참가했다. 그리스 육군은 미 제1기병사단에 귀속, 이천과 철원, 연천, 김화에서 전투를 치렀다.
여주 영월근린공원 내 그리스군 참전기념비 조성 사업 당시의 사진들을 보다 뜻하지 않은 얼굴을 발견하였다. 다름 아닌 전현희 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당시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전 사업을 주관했고, 주한 그리스대사와 주한 그리스대사관 국방무관, 보훈처 차장, 여주시장, 국방부 국방정책실장 들과 함께 조정서에 서명했다. 부산 유엔군 묘지에서의 일을 거짓 증언한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문형배와 달리 진정성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사실 그리스군 참전기념비 이전은 쉽지 않았다. 참전비를 옮길 공간, 예산 등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으니, 결국 국민권익위원회가 중재에 나서며 관계기관 협의 등을 거쳐 최종 중재안을 이끌어냈다. 전현희 권익위원장은 "그리스군 참전기념비를 여주 영월공원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중재가 이뤄졌다"며 "앞으로 시민들과 가까운 곳에서 참전 정신을 이어갈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에카테리니 루파스(Ekaterini Loupas) 주한 그리스대사는, "그리스군이 한국전쟁에서 열심히 싸웠다는 점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희망과, "그리스 참전기념비를 보다 나은 곳으로 이전하는 것은 그리스, 한국을 위한 것이며 많은 그리스 참전용사에게 존경을 기리는 중요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는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신념을 다 같이 기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행사장의 주한 그리스대사(왼쪽)와 전현희 위원장 아제는 세인(世人)에게 잊혔지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빌린 돈 15억 3천만 유로(약 1조 9천억 원)를 상환하지 못해 선진국 중 처음으로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는 불행을 맞았고,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고질적인 재정 적자와 방만한 복지, 긴축안 거부가 빚은 사태로서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리스는 2015년 7월 국민투표를 통해 긴축안을 반대했으나, 결국 3차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긴축을 수용하며 2018년 8월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공식 회복세로 돌아섰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탈락한 첫 번째 유럽국가라는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그 역시 선진국 문턱에서의 탈락 직전인 우리나라와 비슷한데, 좌·우파가 으르렁대는 것까지 흡사하다. 이런 경우 대부분 추락을 하니 그리스와 아르헨티나, 그리고 최근의 베네수엘라가 그러하다. 우리 대한민국도 강력한 후보군이다.

영월루 / 원래 여주목 관아의 정문 누각이었으나 1925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영월루 안내문 
영월루에 바라본 일몰 
남한강의 새로운 명물 515m 여주 출렁다리 
돈을 받지 않는 이 다리를 건너면 신륵사에 이른다.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 제공 출렁다리 사진 
영월루 아래의 고려시대 석탑 2기 
영월루 아래의 영의정 홍순목 만세불망비 /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 홍영식의 부친이다. 갑신정변 실패 후 손주와 며느리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다. 
그리스군 참전기념비 앞 토끼 
신기하게 토끼가 많다. 
사람을 따르지 않지만 무서워 하지도 않는다. 
여주대교 야경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양민 학살이 자행된 남한강변 상리 얼음창고 터 
남한강 수위관측소와 출렁다리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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