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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힘든 건국과정 & 그 나라와 맞짱뜨겠다는 이재명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14. 14:27
이재명 대통령이 며칠 전 이스라엘군을 비판하며 리트윗 했다가 논란이 된 X 계정 'Jvnior'(@Jvnior_13)가 유명한 가짜뉴스 유포 계정으로 알려져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한마디로 가짜뉴스에 낚인 것이다. 이스라엘 외무부는 당연히 강력한 공식 항의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에 이재명은 뜬금없이 '보편적 인권'을 들먹여 대응하며 일을 키웠다. "실수했고, 미안하다"하면 끝날 것을, 끝까지 이겨먹겠다며 한국식 찍어누르기로 나오면서 외교 분쟁 가능성까지 대두되고 있다.
아무런 실익도 없는 그런 오기를 왜 부리는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러한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의 게시물이 영어로 자동 번역돼 확산되며 전 세계 대화창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중에는 서안지구의 한 팔레스타인 주민이 이재명 대통령의 리트윗을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고 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난과 조롱 일색이다. 이스라엘 AI 연구자로 X에서 팔로워 약 85만 명을 보유한 엘리 데이비드 박사(@DrEliDavid)를 비롯한 여러 저명 인사는 이재명 리트윗의 오류를 지적하고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재명의 게시물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그것이 대한민국의 망신임을 지적한 글도 떴다. 앞서도 말했지만 제정(帝政)로마 시대, 유다 지방의 유대인은 간단없는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서기 13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 반란은 3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제국에서 내쫓기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른바 유대인 2천년 방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에 의해 홀로코스트(The Holocaust)가 자행되었고 이로 인해 당시 유럽 유대인 인구의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對) 로마항쟁의 상징과 같은 이스라엘 마사다 요새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 
야드 바셈의 '이름의 전당' /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600만 명의 유대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이와 같은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이스라엘 건국 운동, 이른바 시오니즘이 불타올랐고 1948년 드디어 옛 가나안 땅에 자신들의 나라 이스라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후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네 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며 지금의 단단한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 고난의 과정이 한국과도 흡사한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와는 1962년 수교 이래로 우방이다. 경제적으로는 FTA 체결로 상호 무관세 교역을 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 중 독도(Dokdo)와 한국해(Korea Sea)를 같이 표기하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은 6일만에 끝나 '6일전쟁'으로도 불린다. /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가자 지구, 시나이반도 등을 점령하며 영토를 대폭 확장했다. 그런 이스라엘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이 왜 척을 지려 하는지 못내 괴이쩍은데, 차제에 건국 과정에서의 잘 안 알려진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이 건국되고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을 받아들일 때, 어디까지를 유대인으로 인정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유대인이 나라를 잃고 떠돈 지가 무려 2000년, 혼혈이 이루어져도 한참이 이루어졌을 터, 그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이를테면, 부계 모계가 모두 유대인이라야 유대인인가, 그 한쪽만 유대인이면 유대인인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더라도)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으면 유대인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쿨하게 이 모두를 유대인으로 인정했다.(일단은 국민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을 터. 다만 유대교를 믿어야 한다는 조건은 붙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인은 피부색이 없다. 서유럽 계통의 백인이 있는가 하면 러시아 쪽에서 온 슬라브 계통의 백인들도 있고, 흑인들도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와 같은 모습의 극동 아시아계의 사람들도 있었다. 아랍계 형상의 유대인들 또한 당연히 있었다.(근본을 따지자면 이들 유대인이야말로 원조 유대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곧 피부색의 여하를 불문하고 주권을 위한 '건국전쟁', 이른바 1차 중동전쟁에 투입된다.(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운 국가의 3요소에 영토, 국민, 주권이 있었음이 기억난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다. 
누구...? / 맨체스터 대학 리처드 니브 교수가 복원한 예수의 얼굴이다. 당시의 예수가 백인의 모습일 리 없었을 것이기에. 시오니스트들이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타협으로 만든 영토, 개방적 이주정책으로 만든 국민,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주권..... 이렇게 국가를 만들었지만 그에 앞서 선결되어야 할 요건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언어를 써야 할 것인가'였다. 유대인들이 과거 사용하는 언어가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와 문자는 진작에 사어(死語)가 되었으니, 기원전 28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만들어진 히브리어의 희랍어 번역판성서 '셉투아긴트'(Septuagint, '70인역 성서')는 이민자들의 모국어가 얼마나 빨리 사어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70인역 성서')
이스라엘 공화국 초기 이주자들의 모습 그와 같은 고민을 벤 야후다(1858~1922)라는 인물이 해결했다. 당시 러시아 땅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유대인 벤 예후다(본명은 레이제르 이츠호크 페를만)는 세 살 때부터 종교의식 등에만 남겨져 사용되는 히브리어를 접했고 이후 엄격한 유대인 가정환경 속에서 고대 히브리어와 토라(유대교 경전)를 공부하였던 바, 대학 진학 전(前) 성서와 탈무드, 미슈나, 토라 등의 여러 유대교 경전과 히브리어에 해박하였다. 그는 고교 졸업 후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진학해 그곳에서 현대 히브리어를 만들었고, 이것을 이산(離散)된 유대사회를 결집시킬 수 있는 언어, 즉 유대인의 공용어로 만들 것을 결심했다.
더불어 그는 당시의 유대인 국가 건립 운동, 이른바 시오니즘 운동에 뛰어들었던 바, 오스만제국령이던 팔레스타인으로 일찌감치 이주해(1881) 고대 유대인의 언어를 현지에 되살리려는 노력을 했다. 없던 언어(혹은 문자)를 만들어 통용시키려는 일은 일국의 왕(세종대왕)도 하기 힘들었지만, (사실 다른 시오니시트는 언어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니 대충 현지어인 터키어나 영어를 쓰면 되지 않겠나 하는 분위기였다) 점차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여러 곳에서 이주해온 유대인 사이의 공용어 문제가 부상하면서 벤 예후다의 염원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 놀라운 것은 벤 예후다가 복원시킨 히브리어가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 건국 후 공용어가 된 것이 아니라 1922년 11월, 오스만제국에 뒤이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 정부에 의해 지역의 공식 언어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평생을 괴롭혀 온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꼭 한 달 전이었다.(그가 죽고 난 뒤 미완성의 16권의 히브리어 대사전이 그의 부인과 아들 예후다에 의해 발간된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자신의 당대에 실현되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언어의 복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복원시키는 대역사(大役事)가 되었다.
초기 이스라엘 공화국에 이주해온 사람들의 언어는 당연히 제각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각 언어권에서 온 사람들이 제각각의 권역을 형성할 수도 있었지만, '단일 언어를 쓰는 단일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시대의 애국적 분위기에 편승해 그동안 자신들이 사용해온 언어를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히브리어를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그들은 서로 불편했지만 소통을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어와 히브리어의 중간 언어로서 유럽계 유대인이 사용하던 이디시어마저도 축출되었다. 그와 같은 언어의 소멸과 탄생 과정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역사기행>의 작가 오가와 히데키(小川秀樹)는 다음과 같이 논했다.
지금 이스라엘에서 이디시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승려복을 입고 19세기의 동유럽 생활방식을 완고하게 지키고 있는 종교적인 사람들뿐이다.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이디시어로 간행되던 일간지가 폐간되었다는 뉴스를 1995년 프랑스에서 접한 적이 있다. 어찌 되었건 한 민족의 언어가 이만큼 드라마틱한 과정을 겪은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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