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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립과 같이 갔던 조선군 장병들은 어찌되었을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15. 23:53
지난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1619년 파병의 진실, 광해군의 파병은 중립외교였나"는 매우 흥미로운 영상으로 시작되었다. 중국 요녕성의 한 시골마을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박씨(朴氏) 주민들을 여러 명 조명한 것이었다. 박씨는 김씨와 더불어 대표적인 신라 성씨로 중국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씨다. 그런데 왜 그 마을에서는 박씨가 그렇듯 흔할까?
그들은 모두 중국인들로, 광해군 치세인 1619년 명나라의 파병 요청에 따라 만주에 출병했다 주저앉게 된 조선군의 후예로 밝혀졌다. 명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힘을 키워 국경을 위협하자 조선에 여러 번 파병을 요청했다. 우리는 흔히 명나라의 파병 요청이 1619년 후금 정벌 때 한 번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나 실은 국초(國初)부터였으니,
첫 번째는 1449년(세종 31)에 명(明)이 몽골 원정에 나설 때였고,
두 번째는 1467년(세조 13) 명이 건주여진을 정벌할 때이고,
세 번째는 1479년(성종 10) 명이 건주여진을 칠 때였다.
이처럼 명나라는 국초에도 조선에 몇 차례의 파병 요청을 했지만 조선은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정확히 알리고 이해시켰던 바, 이를 테면 정통제(正統帝, 1435~1449)의 야선(也先, 몽골 오이라트의 지도자 에센 타이시의 한자 음차) 정벌 당시 10만 명의 군사 요청을 받았을 때, "만일 출병하면 왜(倭)나 여진이 그 틈을 노려 침범해 와 나라가 위태로워질지 모른다"는 이유를 내세워 완곡히 거절하고, "그 대신 조선의 강토를 굳건히 지켜 번국(藩國)의 도리를 다 하겠다"며 빠져나갔다. 병력의 요청을 군마(軍馬)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정통제가 야선을 정벌할 때 조선이 파병에 응했다면 그야말로 낭패를 볼 뻔했다. 1449년 명나라 정통제는 몽골족의 일족인 오이라트(衛拉特)에 대한 친정(親征)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 하북성 장가구시)에서 패하며 명군(明軍) 수십만이 죽고 정통제는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으로, 중국 역사상 황제가 전장(戰場)에서 붙잡힌 유일한 예로 남아 있다. 아울러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이웃나라인 조선을 긴장시키기 충분했는데, 이때 양성지는 당황하는 세종에게 '비변십책'(備邊十策)이라는 국방력 강화 방안을 올렸다.
풍운의 토목보는 지금 관광지가 됐다.
'비변십책'은 '변방을 강화하는 10가지 방책'이라는 뜻으로, 그 요지는 의외로 자주국방과 자존심 외교, 배짱 외교로 귀결된다. 즉, 만일 야선이 조선에 쳐들어온다 해도 처음부터 비사후폐(卑辭厚弊, 몸을 낮추어 예물을 많이 바침)로써 평화를 구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려가 요·금과의 전쟁에서도 죽어라 싸워 먼저 승리를 구한 후 평화를 도모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오이라트가 침입해도 무조건 허리를 굽혀서는 안 되고 우선은 결사 항전을 해 1승을 구(求)한 후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쉽게 말하자면, 돈이나 굴종으로 얻은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조선의 이 같은 외교정책에 대해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의 저자 계승범은, "명나라를 상대로 전개된 사대정책에서 '사대'의 형식인즉 그 전후가 달랐으니, 특히 15세기는 겉으로는 비록 조선왕조였지만, 고려가 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므로, 중원 국가를 대하는 태도는 오히려 고려 때의 인식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즉 고려는 조선보다 훨씬 자주적인 나라였으므로 할 말은 하는 외교정책을 취했고, 15세기의 조선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능한 이재명 외교에 타산지석이 될 수 있는 책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도 / 1588년(선조 21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이 여진족의 시전부락을 정벌한 과정을 담은 그림으로, 강성해지는 여진족의 추이를 살필 수 있는 기록화이다. (경기도박물관) 
경원 여진글자비 / 함경북도 경원의 옛 절터에 있던 금(金)나라 비석으로 4면에 오롱초사의 창건에 관한 여진 문자가 새겨져 있다. 건립시기는 1156년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여진 문자 비석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17세기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같은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당시 후금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명은 공식·비공식으로 모두 서너 차례에 걸쳐 조선에 병력을 요청했는데, 비변사를 필두로 거의 모든 신료들이 찬성론을 펴고 광해군이 외롭게 반대하는 형세로 논쟁이 전개되었다. 파병 찬성론의 근거는 군부(君父)의 나라인 명에 대해 재조지은(再造之恩,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해 망할 나라를 새로 만들어준 은혜)을 갚아야 한다는 것과 200년 사대 전통을 어길 수 없다는 것"으로, 사실 이것이 대세였다.
따라서 광해군은 고독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는 황제의 칙서가 없다는 등의 핑계로써 명의 요청을 질질 연기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1616년(광해군 8) 후금(後金)을 건국한 데 이어 1618년 만주의 전략 요충인 무순(撫順)을 공격해 함락시키자 명의 압박이 일층 강해졌다. 그리하여 파병에 대한 광해군의 미온적 태도에 "조선을 먼저 손봐야 한다"는 험악한 주장까지 흘러나왔다. 이에 광해군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바, 결국 조총수를 주력으로 하는 1만3000명의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 내렸다.
그러면서도 광해군은 조선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니 형조참판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을 사령관인 도원수(都元帥)에 임명한 후 '관형향배'(觀形向背)의 밀명을 내렸다. 즉, '무조건 명나라의 명령에 따르지 말고 형세를 살펴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문관 출신의 강홍립을 도원수에 임명한 것도 어전통사(御前通事, 국왕 통역사)를 지냈을 정도로 능통한 중국어 실력을 높이 산 때문이었으니, 그로 인해 명나라에 쉬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1619년 2월 23일,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넜고, 명나라 감독관 우승은(于承恩)의 독촉을 받으며 눈보라 속에서 만주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3월 2일 심하(深河)라는 곳에서 드디어 6백 여 명의 후금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조선이 자랑하는 조총수들의 활약으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당시 조선군은 임진왜란 때 일본의 조총에 혼이 난 이후로 조총병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우수한 총수들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앞서 '구(舊) 러시아군의 플린트락 머스켓 소총'에서도 말한 바 있다.
명나라가 원한 것도 바로 그 우수한 총수들이었으니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우리는 조선군만 믿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군은 3월 4일 부차(富車)라는 곳에서 후금군의 매복에 걸려 일거에 8000명 이상이 희생되며 전력이 꺾이었다. 후금의 팔기군에 명의 대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군량 지원까지 끊기자 강홍립은 드디어 결심을 하였던 바, 몰래 후금 진영에 밀사를 보내 명(明)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참전한 전쟁임을 밝히고 항복 의사를 전했다. 그 심하와 부차의 전투를 합쳐 청나라에서는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부른다. 사르후 전투에서 4만의 후금군은 11만 조·명연합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사르후의 위치와 조선군의 참전로 
김후신이 그린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 / 조선군(오른쪽)과 후금군의 심하(深河) 유역에서의 첫 만남이다. 
김후신이 그린 양수투항도(兩帥投降圖) / 강홍립이 조선군을 이끌고 누르하치에게 항복하는 광경을 그렸다. 강홍립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은 난리가 났다. 강홍립에게는 '강노'(姜虜, 강씨 오랑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반면 광해군의 중립 외교 덕에 파병된 조선군은 무사할 수 있었고 조선도 무탈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며 조선은 다시 친명 배금(親明背金) 정책으로 돌아섰고, 표변한 외교 정책은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왔다. 그리고 얄궂게도 강홍립은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다.
일설에는 강홍립이 후금의 향도(嚮導, 길잡이) 노릇을 했다고 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후금군 지휘부가 그를 대동한 것은 조선과의 협상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당시 후금은 항복한 강홍립 이하 조선군을 후히 대접했다. 이유는 총수를 비롯한 조선군을 명나라 공격에 앞세우기 위한 것이었지만 목적이야 어찌 됐든 조선군은 후한 대접을 받았던 바, 어쩌면 조선에 있는 것보다 편했을는지도 모르겠다.
강홍립은 부차 전투에서 항복한 이후 8년간 후금에 억류돼 있었는데, 후금 지휘부의 명령으로 그동안 같이 살던 한족(漢族) 현지 처까지 데리고 귀국했다. 후금이 정묘호란을 일으킨 것은 조선 정벌이 목적이 아니라 배후를 형세를 안정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바, 화의가 이루어지면 강홍립은 고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양국의 화의가 무난히 이루어진 덕에 강홍립은 첩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조야(朝野)에서는 매국노라며 난리를 피웠다. 식자들은 정묘호란을 '강노의 침략'(姜虜入寇)’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조선 사람이 한족 여자를 첩으로 두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강홍립의 현지처를 명나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 중국 여인은 강홍립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며 조선에 살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결국 명으로 강제송환되었다. 이후 강홍립은 역적, 매국노의 비난을 받다가 그 충격 때문인지 고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숨을 거두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바로 그해였다.
후금 땅에 남겨진 나머지 조선 군인들은 어찌 되었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청나라의 용병이 돼 명나라 공격에 앞장섰고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진격했다.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북경 공격(명나라 정벌)에 직접적인 전투원으로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청나라 섭정왕(摄政王) 도르곤의 요구로 1644년 청군 지휘부와 함께 북경성 함락을 목도하는 바, 아마도 조선군에게 힘을 북돋기 위한 전략인지도 몰랐다.
청의 전략이 통했는지 조선군은 가장 먼저 자금성을 돌파했고, 소현세자는 북경 함락 후 자금성 문연각(文淵閣)에서 두 달 간의 독서의 여가가 상으로 부여됐다. 아울러 조선군과 그 후예들은 1683년 대만 원정에도 참전해 동녕국(東寧國)을 멸망시키고 대만을 복속시키는 데도 앞장 섰다고 하며, 그 공으로써 그들 조선군과 후예들이 대우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대우를 받았다고는 하나 약소국 국민으로서의 인생유전이 적잖이 가슴 아픈 스토리다.

명황실의 장서각이었던 자금성 문연각 / 북경 함락 후 소현세자가 약 2개월간 머물었던 곳이다. 
관악구 난향동의 조촐한 강홍립 묘 / 뉴스버스 DB 이 같은 비사(秘史)를 전한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김용삼 선생은, 훗날 실학자 박제가와 홍대용이 북경 사행길에서 만난 조선인 후예들의 이야기도 전했다. <북학의>에 따르면, 박제가는 변발을 하고 조선식 배추 농사를 짓고 있는 조선인 후예들을 발견하고 놀라워 했고, 그들도 고국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귀국의 의향을 물었을 때는, 고국이 그리운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 누리는 부귀가 너무 커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고 한다.

강홍립의 묘가 있는 관악구 난향동 진주강씨 대사간공파 묘역 
묘역 입구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의 신도비 
묘역 건너편의 신림종합사회복지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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