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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동막골 미 25사단 한강도하 기념비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17. 13:50
이미 잘 알려진대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을 감행한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기세 좋게 밀고 내려왔지만 유엔군이 참전하자 북으로 정신없이 되돌아갔다. 이후 수도 평양을 버리고 개마고원까지 달아난 김일성은 그해 10월 19일 임시수도 강계에서 소련과 중공에 다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7월 8일에 이은 두 번째 요청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답이 있었던 바, 김일성은 그야말로 죽다 살아났다.
그리하여 '역사상 가장 추운 곳에서 벌어진 싸움, 초신 전투'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러 간 미해병 1사단은 강계를 80Km 남긴 지점 장진호에서 뜻하지 않은 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중공군이었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은 1950년 10월 19일에 압록강을 넘은 18개 사단 26만여 명, 뒤이어 11월 초 도강한 12개 사단 12만여 명이었다. 도합 38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이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중공군은 무려 130만 명이라는 쪽수가 투입된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엔군은 그해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9병단 예하 3개 군단 12만 명의 공격을 맞서 3만8천 명을 사상시킴으로써 사실상 9병단을 와해시키지만, (불행이라 한 것은 유엔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기에) 서부전선에 투입된 13병단은 청천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물밀듯이 남하해 서울을 빼앗았다.
속절없이 밀리던 유엔군은 1951년 2월, 수원 - 이천 - 원주 - 강릉을 잇는 선에서 전열을 정비했다. 더 이상 밀리게 되면 유엔군은 철수까지 고려해야 될 상황에 이르므로 미군은 이 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여기고 작전에 들어갔다. 이에 선더볼트 작전과 라운드업 작전 등 여러 가지 반격작전이 전개되었으나 이렇다 할 효과가 없었으니, 중공군은 웬만한 피해쯤은 감수해가며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의 삼마치 고개와 양평군 지평리로 밀고 내려왔다.

1951년 2월 전황도 / 붉은 선이 중공군이 밀고 내려온 지역으로 충북 제천까지 진출했다.
삼마치 고개에서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워낙에 중공군의 쪽수가 많았던 까닭이니 크게 탓할 바도 못되겠지만, 반면 지평리를 지키던 유엔군은 중공군을 물리쳤다. 즉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로서, 이 승리를 토대로 권토중래가 가능했던,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도 졌다면 유엔군은 실제적으로 철수를 감행했을는지도 모른다)
당시 지평리를 지키던 유엔군은 미10군단 산하 2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군 1개 대대, 그리고 프랑스군에 보충된 한국군 100여 명, 카투사병 80여 명의 총 5,60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이를 공격한 중공군은 13병단 예하 39군 50,000여 명으로, 전투는 2월 13일 부터 15일까지 3일간 치러졌다. 그야말로 10 : 1의 전투가 벌어졌던 것인데, 그 기적 같은 승리를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시킨 지평리 전투'에 담은 바 있다.

지평역 뒤의 지평리전투 기념비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을 물리치며 북진의 발판을 마련한 유엔군은 킬러 작전과 리퍼 작전을 통해 서울을 재수복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미 제25사단의 한강 도하 작전이다. 제25사단은 미 육군사단으로는 제24사단에 이어 두 번째로 투입된 병력으로 일본 오사카 부근에 주둔 중이다가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초순(10일~15일 사이) 부산항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윌리엄 킨(William B. Kean) 소장이 지휘하는 제25사단은 제24·27·35연대로 구성되었고 한국 도착 즉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어 예천전투에서 첫 반격에 성공했다. 이후 마산지구 전투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여 승리하며 임시 수도 부산을 지켜냈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이후 제25사단은 전주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남한 내의 적을 소탕했으며, 유엔군과 함께 북진했을 때는 청천강 전선에서 마주한 중공군과 수차례의 격전을 치른 바 있었다. 제25사단은 서울탈환에도 앞장섰다.
미 제25사단의 깃발 / 번개 치는 형상의 엠블럼으로 '트로픽 라이트닝(Tropic Lightning)', 딸기를 닮은 형상으로 인해 '일렉트릭 스트로베리(Electric Strawberry)' 부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1951년 3월에 개시된 미 제1군단의 서울탈환작전은 3월 7일 제25사단이 한강을 도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작전명령이 하달되자 제25사단은 2월 28일 광주 분원리 부근의 한강 연안으로 진출하여 도하 공격을 6일간 준비했다. 그리고 지금의 하남시 미사리에서 보이는 팔당 여울목을 도하지점으로 삼았다. 여하히 도하에 성공하게 되면 동쪽의 제24사단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지역 주변 지도
그러나 제25사단의 도하작전은 쉽지 않았다. 우선 도하지점 강폭이 150~370m나 되었고, 상류의 눈이 녹으며 흐름이 빨라진 강물은 유속이 초속 2m에 달했는데, 게다가 얼음과 눈이 뒤엉켜 흐르며 도하를 방해했다. 더욱이 눈이 녹으며 생긴 진흙탕 도로는 수륙양용차량의 투입을 더디게 만들었고, 그동안 도하를 눈치챈 중공군은 강 북쪽에 대규모 진지를 구축했다.
그렇다고 도하를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일 터, 1951년 2월 25일부로 사단장에 새로 부임한 브래들리(J. S. Bradley) 준장의 지휘 하에 도하작전이 시작됐다. 때는 3월 7일 새벽으로 선봉은 제 35연대가 맡았다. 제35연대는 항공 및 지상정찰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종합해본 결과 양수리 위쪽의 하중도(河中島)가 최적의 도하지점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 같은 판단은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던 바, 그쪽으로 화력이 집중됐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동막골 
동막골에서 본 북한강 중지도 / 가운데 길게 늘어선 섬이 중지도이고, 뒷편이 하남시 미사리로, 그곳에서부터 도강이 시작됐다. 
바로 옆 M 카페에서 포토 죤을 설치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과는 무관한 곳이다.
결전의 3월 7일 새벽 5시 50분, 제25사단은 강건너의 중공군을 향해 20분 간의 공격준비사격을 쏟아부었다. 동시에 10여 대의 전투폭격기가 근접 지원으로써 중공군 진지에 폭탄을 투하했는데, 서울탈환작전 가운데 가장 많이 퍼부은 폭탄 공격이라고 전한다. 동시에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이 김포와 서울 방면에서 양동작전을 전개하여 중공군 제50군단의 양수리 방면 증원을 저지했다. 공격준비사격이 끝난 6시 15분경, 제35연대의 선두 공격부대인 3대대 3중대가 도하를 개시했다.
중대원들은 12인승 보트를 메고 제방으로 내려가 보트가 수면에 닿자 마자 도하를 개시했는데, 거의 동시에 강 너머의 중공군이 총격을 가해 보트 여러 척에 구멍이 뚫리고 사상자가 났다. 그럼에도 3중대는 도하에 성공해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뒤이어 3대대 잔여 병력이 도하를 개시해 오전 7시 40분경에는 35연대의 도하가 끝났다. 그리고 이들은 정오 무렵, 제1차 목표인 양수리 고지를 확보하였다.

도하 장면
이후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지만 제25사단은 공격을 계획대로 수행하여 15일 저녁 무렵 서울-춘천 간 도로까지 진출하였고, 북상한 터키 여단의 도움을 받아 동쪽의 미 제9군단 제24사단과 연결되었다. 이들은 제24사단과 연대해 서울 탈환의 교두보를 마련했고, 이후 1951년 '철의 삼각지대'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전사 3,048명, 부상 1만186명, 실종 67명, 포로 384명 등 총 1만3,685명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입었다.
이들 제25사단 용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6년 3월 7일 한강 도하 지점인 팔당초등학교에 '미25사단 한강도하 기념비'가 세워졌다가 폐교로 인해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산194-16로 옮겨졌다. 주소로는 산 194-16이나 한강이 내려 보이는 도로변에 있으며, 바로 옆에는 'M kichen & cafe'라는 카페가 있다. 그리고 이들 용사가 진격 중 잠시 머물렀을 것으로 보이는 서울-구리시 경계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명온공주(순조의 장녀) 묘의 상석에는 스미스(Smith) 외 3인 미군병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 이들이 혹 제25사단의 부대원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서울 재탈환 작전을 이끈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상륙지점에 세워진 미25사단 한강도하 기념비 
안내문 
비석 주변 
바로 옆 M 카페 
망우역사문화공원내 명온공주와 동녕위 김현근의 합장묘 
묘표 
봉분과 상석 
장명등 
미군 병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상석
과거 동막골에서 행해진 팀스피리트 훈련 중, 훈련에 참가했던 미 제25사단 장병들이 과거 한국전쟁 당시 한강 도하 작전에서 희생된 제25사단 선배 장병들을 기려 부대마크를 본떠 만든 조화를 한강에 띄우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당시 사정을 아는 사람은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바로 그와 같은 타국 젊은이들의 희생 위에 지금의 발전된 나라를 이룰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공산주의로부터 이 나라의 자유를 지켜달라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간절한 부름에 바다를 건너온 순수한 이역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이 땅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들 젊은이들의 희생을 백안시한 사람이 있었다. 다른 직(職)도 아닌, 이 나라 사법부의 판사와 헌재 재판관을 지낸 문형배였다. 그는 2010년 부산지방법원에서 근무할 당시, 유엔기념공원 내의 유엔군 묘지 정리 봉사활동을 다녀와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16개국 출신 유엔군 참전용사들은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왔을까?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좋은 전쟁이란 낭만적 생각에 불과하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깨달음을 몰랐을까?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룬다면 완전한 통일이 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을까? 묘역을 돌면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단어는 <평화>였다."
문형배 후보자는 자신이 쓴 이 글로 인해 어지간히 혼이 났다. 6·25 때 한국을 도우려 참전했던 유엔군을 모독했다는 것과 마치 적화통일을 옹호하는 듯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아울러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론과 궤를 같이 하는 내용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문장 순서와 문맥 상 첫 문장은 당연히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자들'로 읽히는 바, 이에 대해 부산에 지역구를 둔 박수영 의원이 가장 먼저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지적한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문형배에게 묻는다.
1.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왔는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공산주의 북한의 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역만리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유엔군이 왔다는 걸 다 안다. 헌재 재판관은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가만있었으면 평화롭게 공산화되어 있을 텐데 왜 왔냐고 비난하는 것인가?
2. 정말로 참전용사들이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려" 했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문 재판관의 이 글은 북한이 주장하는 소위 "북침론"과 궤를 같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쓴 글인가 모르고 쓴 글인가? 우리가 통일을 위해 북침을 하고 그것을 돕기 위해 유엔군이 참전했다는 것인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가?
3. 평화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머리를 떠나지 않는 단어가 평화'라고 썼는데 북한이 남침을 했는데 평화를 위해 아무런 저항도 반격도 하지 말고 바로 항복함으로써 평화를 지켰어야 한다고 믿는가?
문형배 재판관은 위 세 가지 질문에 답하기 바란다. 답변이 궁색하다면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즉시 헌법 수호자의 지위, 즉 헌재 재판관에서 사퇴해야 할 것이다.
이후 여러 가지로 논란이 되자 문형배 후보자는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자들은 북한을 가리키고 그들의 침략을 규탄한다는 내용"이라는 어설픈 해명을 내놓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비겁한 변명이었던 바, 누리꾼들의 "문맥을 봐라. 유엔군이 이 땅에 왜 왔냐고 물었으면 유엔군을 지칭한 거지 갑자기 북한이 왜 나옴?" "유엔군이 전쟁광처럼 묘사됐다" "중요한 탄핵심판 증거는 안 보고 자기 블로그 글이나 다시 보고 있네" "국민들을 바보라고 생각하나?" 등의 댓글이 쏟아졌다.
문형배는 또 자신의 트위터 X에, "굳이 분류하자면 (좌파 판사모임인) 우리법연구회 내부에서도 제가 제일 왼쪽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는 글을 자랑하듯 쓴 적이 있으며, "한국은 북한이 자신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더욱 많은 대북 원조를 제공해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등의 글도 써 자신이 친북성향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었다. 그런데 이 글 또한 문제가 되자 그는 무려 5470명이 팔로잉한다는 계정을 바로 폐쇄했고, 블로그의 문제가 된 글 또한 모두 삭제시켰다.
헌재 재판관 청문회에서 이 글의 성격에 대한 공격이 있자 문형배 후보자는 그래서 글을 모두 지웠다고 했고, 까닭에 또다시 질타를 받았다. "본인이 떳떳하다면서 왜 글을 왜 내렸냐, 왜 그렇게 비겁하냐"는 질타였다. 아무튼 그는 이와 같은 비양심적인 증언으로 일관했음에도 어리버리 컨셉으로 청문회를 통과했고, 2025년 4월 4일, "적의 선의에 기대서는 결코 평화를 지킬 수 없다"고 외친 투철한 자유 반공주의자 대통령 윤석열을 작심하고 파면했다.

국회청문회 당시 보여준 어리버리 컨셉의 무서운 반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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