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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으로부터의 교훈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18. 21:42
<발해고/渤海考>는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한 한민족의 국가로서 바라본 최초의 전문 역사서이다. 이 책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이자 고구려보다 넓은 사방 5천 리 영토를 가진 나라이며, 한민족의 정통성을 지닌 남북국의 일원으로 묘사되었다.
아울러 <발해고>는 유득공의 체계적 역사 기술이 돋보이는 바, 전체를 군고(군주), 신고(신하), 지리고, 국어고(외교 문서) 등 9개 부문으로 나눠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기술했는데, 특히 고려가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은 점을 비판하며 발해사를 한민족의 영역으로 편입시킨 점에 큰 의의를 들 수 있다.

<발해고>
비슷한 시기의 실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도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발해를 고증하였다. <동사강목>은 삼한정통론을 바탕으로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강목체(역사 편찬에서 사실들을 연월일 차례로 쓰는 편년체 서술의 한 방식) 사서이다. <동사강목>은 발해를 한국사로 이해하는 데 적극적이던 <발해고>와 달리, 정통 한국사로 인식하지는 않았으나 발해의 5경 15부 62주 체제와 영토를 고증을 하여, 후대 역사 연구에 자료를 제공했다.

< 동사강목>
발해를 다룸에 있어서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강역을 가졌던 나라로서의 의미도 크지만, 무엇보다 강국(强國)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의 의의가 깊다. 발해 멸망 이후로도 한민족은 내내 발해를 동족의 나라로 인식하였던 듯, 고려 태조 왕건은 942년 요나라(거란)가 친선을 명분으로 보낸 사신 30명을 유배 보내고 낙타 50필을 개경 만부교 아래서 굶겨 죽인, 이른바 만부교 사건을 벌였다.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것에 대한 복수심과 거란에 대한 강경책(북진정책)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2015년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 유적지에서 발굴된 청동낙타
발해는 698년 고구려 장수 출신 대조영이 당나라에 저항하여 요동 지역(지린성 동모산)에 세운 국가로서, <구당서>와 <신당서> 모두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해 건국한 나라라고 기술하고 있다. (<구당서>의 '대조영이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한 부분은 고구려에 속했던 사람으로 해석함이 옳다 /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 중국기록에서 별종은 별개의 종자라는 뜻이 아니라 출신지역을 의미하는 말이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만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아니니 일대의 말갈족을 포용하여 당나라와 같은 다민족국가를 표방했고, 이것이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을 추격해 온 당나라의 군대와 천문령에서 큰 싸움을 벌여 승리하며 마침내 동모산에서 진(震)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

대조영이 진국을 세운 길림성 동모산
이후 진국은 안정된 성장을 이루었는데, 운이 좋게도 그 무렵 발흥한 후(後)돌궐이 당나라와 진국 사이의 땅인 요서(遼西)를 차지하며 당의 직접적인 압박을 피할 수 있었다. 아울러 돌궐은 고구려의 오랜 맹방이었던 바, 고구려의 후예인 진국과는 마찰이 없었고 오히려 당(唐)이 돌궐을 견제하기 위한 유화책으로 사신을 보내옴으로써 진(震)과 당은 새로운 친선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에 대조영은 아들 대문예를 당에 유학 보냈고, 당은 713년 사신을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君王)에 봉하니 국호가 발해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후돌궐 빌게 카간 황제의 공적비 / 과거 돌궐과 매크리(Möküli=貊族=고구려)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몽골 호쇼차이담 박물관
동족의 나라 신라와는 별로 사이가 안 좋았으니, 대무예가 무왕(재위 719~737)에 올라 확장 정책을 취하자 당나라는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신라는 김윤중(김유신의 손자)을 사령관으로 하여 성덕왕 22년 발해를 쳐들어갔으나 큰 추위와 눈을 만나 군사 반 이상이 얼어 죽으며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발해 역시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한 듯하니, 일본 승려 엔닌은 자신의 중국 생활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산동 적산법화원에 머물 때 들은 한가위(秋夕)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신라인의 행사는 많은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이어져 사흘 만에야 끝이 난다. 지금 이 사원(법화원)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가절의 축하행사를 마련하였다. 3일 밤낮으로 계속된 행사에는 적산촌 신라인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참가해 즐겼는데 내가 이 행사의 연유를 물어보니 발해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전승기념일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했다."(作八月十五日之節… 設百種飮食歌舞管絃以晝続夜 三個日便休 今此山院 追慕鄕國 今日作節…)

산동 적산법화원 / 산뚱성 롱청시(榮成市/영성시) 적산(赤山) 남쪽 기슭의 절로 신라사람 장보고가 세운 것을 1990년 중국 정부가 복원했다. 
경내의 장보고 동상 / 뒷 건물에 대당추몽(大唐追夢)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요즘말로 '중국몽(夢)을 따른다'는 개소리다.
발해는 9세기 선왕(재위 818~830) 때 최전성기를 맞았으니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발해만, 남쪽으로는 대동강, 북쪽으로는 송화강 상류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고 칭제건원(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움) 속에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불교와 도교가 흥했고 서양으로부터 네스토리우스계(系) 기독교가 들여와 유행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 아브리코스 성터에서 발견된 시리아 네스토리우스교(敎) 십자가는 중국에 이어 발해에도 서양의 기독교가 도래했음을 말해준다.

발해 문왕의 딸 정혜공주묘 묘지명 / 문왕은 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는 존호로 쓰여 있다. 대흥(大興)과 보력(寶曆)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1949년 정혜공주 묘 출토 석수/ 현재 중국 길림성 장춘시 길림성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에서 출토된 용머리상 / 궁전의 난간 장식물로 도쿄대박물관 소장 발해 유물의 복제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또 다른 용머리상 / 상경성 궁전 난간 장식물로, 마찬가지로 도쿄대박물관 유물의 복제품이다. 
위 용머리상의 옆 모습 
연해주 아브리코스 성 터에서 발견된 시리아식 십자가 
발해 동경용원부 절 터에서 발견된 삼존불상 / 주불과 협시불의 목에 걸린 십자가 문양이 뚜렷하다. 
당나라 장안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 네스토리우스계(系) 기독교가 중국에서 유행했음을 말해주는 비석으로, 현재 서안 비림(碑林)에 있다. 
발해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 / 길림 팔련성에서 출토된 높이 29cm의 응회암 석불이다. 도쿄대박물관 유물의 복제품이다. 
함화 4년 명불비상 / 함화(咸和)는 발해 제11대 황제 대이진(大彛震)이 사용한 연호이다. 도쿄대박물관 소장품이 중앙박물관 고대실 재개관 때 나들이왔다. 높이 64cm, 사암으로 제작됐다. 
2008년 러시아 연해주서 발견된 왕성급 유적 콕샤로프카 성 
성 안 건물지에서 온돌 및 굴뚝 시설이 확인됐다. (연합뉴스 DB) 
연해주 크라스키노 절터 출토 무늬벽돌 
발해의 영역과 유적 발굴 위치
건국 이래 약 230년간 흥왕하던 발해는 926년 신흥제국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이끄는 거란군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925년 12월 국경을 넘은 거란군은 이듬해 1월 서부의 요충지 부여부를 포위해 사흘 만에 함락시킨 후 곧바로 수도 상경용천부를 향해 내달았다. 그리고 수도 상경 역시 사흘 만에 함락되며 대제국 발해는 멸망했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빠른 멸망이었다. 그런데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는 왜 이렇듯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 한 채 허무하게 멸망했을까?
그 멸망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단서가 <요사/遼史)>에 숨어 있다. <요사> 권75 야율적렬(耶律覿烈)편에는 발해의 멸망 원인을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 기록을 보면 야율적렬의 동생 야율우지(耶律羽之)가 요 태종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올린 표문에 "선제(先帝, 야율아보기)께서 저들(발해) 마음이 갈린 틈을 타 군사를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말이 나온다.(離心乘而動故不戰而克)"
요나라 7대 황제인 흥종(興宗) 야율종진(耶律宗眞)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석의 탁본 / 거란 문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침공했을 당시, 발해는 극심한 내분과 지배층의 분열로 인해 군사들에 대한 명령이 일원화되지 못했고, 명령을 내려도 반대파 쪽 장수가 지휘하는 군사들은 움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과연 현실성있는 이야기인가 의심도 되겠지만, 지금 민심과 이반된 채 개판을 향해 치닫고 있는 나라의 꼴을 보니 실제로 그러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게 여겨진다.
<요사>를 보면, 야율아보기는 부여부 함락 엿새 뒤인 음력 1월 9일에 발해의 노상(老相, 늙은 재상이라는 뜻)이 이끄는 군대와 맞붙어 승리했고, 곧 발해의 마지막 황제 대인선(大諲譔)이 소복(素服) 차림으로 관료 300여 명과 함께 나와 나란히 항복의 예를 표했다고 한다. 기록만 봐도 무지 무지하게 한심한 최후가 아닐 수 없다.
견주어 발해 말기를 추론해보자면, 왕이 왕 답지 않으니 배신자는 배신을 숨기지 않은 채 항명하고, 왕은 왕 대로 독재를 부리며 나아가다 신흥 요나라의 침입을 받았고, 결국 힘도 못쓴 채 무너지고 만 것이다. 오죽하면 늙은 재상이 사령관이 되어 싸웠겠는가? 너무도 허망한 멸망에 혹자는 두 차례의 백두산 폭발(946년 늦가을과 946년 겨울~947년 초)을 원인으로 삼기도 하나, 모두 발해 멸망 후에 일어난 일이다. 발해의 유민들은 938년 압록강에 부근에 정안국(定安國, 938~986)을 세웠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했다.

중국이 복원한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黑龙江省 牡丹江市 宁安市)의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 
궁성의 남문지 
궁성 건물지 
내성의 성문지 
상경용천부 유지 표석 
상경용천부 도성 부감 
가로 4,600m, 세로 3,400m의 당나라 장안성을 모방한 도성 / 위 사진과의 비교를 위해 그림을 뒤집었다. 
발해 상경유지박물관에 전시된 발해 전사들 
고구려 형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상경성에서 수습된 발해의 와당 /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연구재단과 러시아가 공동 발굴한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출토 발해시대 물결무늬 토기편 / 삼족토기 파편도 출토됐다. 
경주 출토 통일신라 삼족토기 / 국립중앙박물관 
복원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성 / 발해의 5경 중 하나로, 발해 역사에서 행정과 대외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중요한 지역이다. 중국 지린성(길림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 일대 유적으로, 중국은 2002~2006년 동안 진행된 발굴과 복원에 있어 옌볜대 사학과 등에 수십 년간 발해사를 전공한 저명한 조선족 사학자가 상당수 있었음에도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사학자는 한 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발해와 일본의 무난한 관계를 말해주는 '견(遣)고려사절 목간' / 일본이 발해를 고려라고 부른 가장 오래된 사료다. 
'견고려사절 목간' 설명 / 아래는 발해 풍탁과 금제 머리꽂이 장식 
발해 뗏목탐사대를 아시나요? / 1997년 12월, 발해 건국 1300년이 되는 1998년을 앞두고 장철수(대장), 이덕영(선장), 이용호(촬영), 임현규(통신) 4명의 탐험에 뜻을 가진 사나이들이 모여 발해~일본 간 해상항로인 일본도 복원을 목적으로 '발해뗏목탐사대'를 결성했다. 이들은 뗏목 '발해 1300호'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출발했으나 파도와 강풍으로 인한 악천후로 예정 항로를 벗어났고 1998년 1월 24일에 일본 오키 제도에 상륙하려다 뗏목이 뒤집히며 탐사대 4명 모두 숨졌다. 
2차 탐사대도 실패함 / 2005년 2월 18일 러시아 포시에트 항구에서 출발한 2차 탐험대 역시 러시아-북한 접경 해상에서 악천후로 표류하다 2월 21일에 남북한 합동 구조작전으로 구출되어 생환하였다. 이후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더 이상의 시도는 없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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