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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고종 독살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21. 18:17
앞서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의 전설과 진실'을 포스팅하며 용문산 은행나무에 얽힌 전설들을 소개했다. 그때 그 나무와 고종에 관한 전설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다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용문산 은행나무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은 나라의 큰일이 일어났을 때, 이 나무가 기이한 소리를 내 알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큰일이라는 것이 뭔가 알아보았더니 1919년 고종이 승하했을 때 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흔들어 울다 큰 가지가 하나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발발시에도 나무가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그런데 따져보면 이 전설들은 가치가 전혀 없다.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은 이후 덕수궁에서 일본의 지원금 후원 아래 이태왕이라는 이름으로 편히 살다 죽었는데, 덕수궁 이태왕 시절 수많은 나인들을 건드려 덕혜옹주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 (늙어 생산한 아이라 그런지 덕혜옹주 외는 대부분 영아사망함) 부패와 무능으로 망국의 길을 제공한 고종은 퇴위 후에도 일말의 반성이나 회한 없이 나인들 품 속에서 희희낙락하며 천수를 누리다 편히 죽었다. (향년 66세)
항간에는 일제의 독살설도 있으나 이런 왕을 죽일 하등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고종이 독살되었거나 혹은 용문산 은행나무가 울다 가지가 부러졌다 하는 것은 사정을 잘 모르는 세간에서 지어낸 헛소문일 뿐이다. 6·25전쟁 발발시에 나무가 울었을 수는 있겠으나 8·15광복에 나무가 울 이유는 또한 없다.
천연기념물 제30호 용문산 은행나무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 중 하나이다. 평생동안 매관매직으로 호의호식하던 고종은 나라가 기울고 그 조선을 일본이 탐을 내자 아예 일본에 나라를 넘겼다. <매국노 고종>(박종인 저)이라는 책이 나오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고종이 일본에 나라를 남겨 얻은 대가는 일본 황족에 속한 왕족으로의 편입과 풍족한 고쿠다카(石高)였다. 고쿠다카는 옛 천황이 번국의 번주에게 주던 녹봉으로, 고종은 1907년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한 뒤 덕수궁에 살며 일본정부로부터 월 150만엔의 고쿠다카를 받았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00억원이 넘는 금액이다.
앞서 포스팅한 바 있지만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을 왕족도 아닌 일본 황실에 속한 공족(公族), 즉 귀족계급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하지만 총리대신 이완용이 "중국에 조공할 때도 왕의 명칭을 사용했고, 중국과 동등하게 조·종(祖·宗)의 시호(태조·태종 등)를 사용해 온 나라에 대한 너무도 모욕적인 처사"라며 항의했다. 그리하여 "적어도 왕족으로의 지위를 보장하고 경제적 안정 또한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켜 황가(皇家)의 귀족계급으로의 전락을 막을 수 있었다.

고종의 무능과 부패를 서술한 책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도자 매국노 고종> 하지만 일제는 고종을 대리한 이완용의 주장의 수용하면서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1대에 국한시켰다. '한일합방 이전에 태어난 황족에 대해서는 왕족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하나 단 세습할 수는 없다"고 규정을 만들어 <왕공가궤범>에 명문화했던 것이다. 조선 왕족에 대한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자자손손 할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왕족으로서의 지위는 1대에 국한되더라도 그 자손들은 귀족계급으로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자손들은 미국 유명대학에 유학할 수 있었으니, 고종이 귀인 장씨에게서 얻은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은 미국 유학시절(버지니어 로노크 칼리지에서 경제학 전공) 엄청난 낭비벽 속에 미국 여성 3명과도 염문을 뿌렸다. 그는 공식적인 자식만 13남 9녀였고, 그밖에도 혼외 자식이 6~7명 더 있었다. 첩만 18명이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난봉꾼이었으며 무절제한 인간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유학시절(1899~1905)의 의친왕 이강 
말년의 이강 
의친왕 이강의 부인과 자식들 / 그의 집 사동궁 마당에서 찍었다. 
서울역사박물관 마당의 이종(李淙) 묘표 / 이종은 의친왕 이강의 손자로 미국 브라운 대학 박사 과정을 밟던 중, 1966년 12월 25일 교통사고로 숨졌다.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던 고종의 자손들은 종전(終戰) 후 일본황족 제도 자체를 없앤 1947년 GHQ (일본 점령 연합군사령부)의 조치로 졸지에 평민이 되며 가난해졌고, 한국에 살던 고종의 자손들은 1954년 구황실재산법이 제정되며 생계비와 소액의 품위유지비를 지원받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구(舊)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국유화하는 대신 그에 대한 보상 격으로 이씨 왕족들에게 지급한 돈이었는데, 왕족이 아닌 개인에 대한 지급금임을 명확히 했다.
고종은 재위 시절 모은 재산인 막대한 내탕금을 홍콩의 HSBC(홍콩상하이은행)에 예치한 후 빼내 썼다. 그 돈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는 돈을 관리하던 민영익이 VIP로 통했고, 그가 홍콩 출장시 최고급 호텔인 빅토리아 호텔(지금의 페닌슐라 호텔)의 가장 큰 스위트 룸에서 투숙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고종은 내탕금 외 약 12년 동안 받은 거액의 고쿠다카를 HSBC와 러시아계 로청은행, 독일계 상하이 덕화은행에 분산 예치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돈의 일부는 고종 사후 일제가 서류를 위조하여 불법으로 인출해 갔다고 하는데, 다만 그것은 소액일 뿐 나머지는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이다. 밝혀진다면 어마어마한 액수일 것이다. (고쿠다카 150만엔을 최소 300억원으로 환산해도 약 4조원이다) 만일 독살을 했다면 일제가 이것을 노렸을 수는 있겠다.

당시의 홍콩상하이은행 
홍콩상하이은행의 현재 퇴위된 후 덕수궁에서 지내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총독부가 공식 발표한 사인(死因)은 뇌일혈(뇌내출혈)로 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평소 운동 부족에 소문난 올빼미족이었고, 와플, 까눌레 등 당이 많은 서양 디저트를 즐겨먹던 식습관을 보면 사인이 혈관질환일 가능성은 거의 100%다. 1918년 11월에 찍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아래 사진을 보면 고종은 몹시 추위를 타는 듯 익선관 아래에 털모자를 겹쳐 썼고, 고도비만에 양쪽으로 부축을 받아야 할 만큼 노쇠가 진행된 모습이다.

부축을 받아 겨우 거동하는 이태왕 / 그래봤자 65세이거늘.... 고종 사후 황제가 독이 든 식혜를 마시고 독살되었다는 괴문서가 나돌았다. 고종의 염을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신은 이가 모두 빠지고, 혀가 닳아 없어지는 등 상태가 이상했다는 것이다. 또 염을 할 당시 시신이 심하게 부풀어 올라 옷을 찢어야 했고, 목부터 복부까지 검은 줄이 나 있었다는 말도 돌았다. 법의학적 반론으로는 독살보다는 시신의 부패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부 변색, 팽창 등의 자연스러운 현상일 가능성이 크며, 맹독을 들이켰다 해도 이가 모두 빠지거나, 혀가 닳아 없어지거나 하는 일은 생기기 어렵다고 한다.

고종이 죽은 덕수궁 함녕전 
고종이 죽은 방 
남양주 홍릉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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