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인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 아시리아 문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4. 30. 23:01

     

    2023년 9월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개관했다. 지구상에서도 중국문자박물관, 프랑스 샹폴리옹박물관에 이어 3번째로 건립된 의미 깊은 곳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처음 발걸음을 했는데, 사실 아껴둔 면도 없잖았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620억원이 투입된 총면적 1만5650㎡, 지하 1층, 지상 2층의 박물관으로, 부지는 인천시가 무상 제공했다고 한다. 

     

     

    인천 송도국제도시와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내관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기하학적 외관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부감 / 흰 두루마리를 펼쳐놓은 듯 보이는 페이지스(Pages) 건축물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준비 기간 5년 동안 100억원을 투입해 문자 자료 543점을 수집해 소장하고 있다. 현재 180점이 전시되고 있으며 이중 136점(76%)이 진품이고 44점(24%)이 복제품이라 하는데, 복제품 비중이 높은 것은 오래된 유물의 발굴이 잘 이뤄지지 않고 발굴 되더라도 각국이 국외 반출을 금지하고 있는 까닭에 필요 문자 자료를 복제해 복제품을 전시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도 대단히 훌륭한 진품 보율률로 여겨진다.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 함무라비 법전 비, 로제타스톤, 메사(모압)비석 같은 세계적인 보물을 진품으로 보유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전시 형태와 동선(動線)으로 보아 뛰어난 큐레이터가 근무하는 듯도 싶은데, 다만 직원들의 친절과 직업정신은 많이 부족해 보였다. 다른 나라 유명 박물관에 가서 감동하게 되는 건 비단 소장품의 수준만이 아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야외전시장의 활자 조판 모뉴먼트

     

    내가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아시리아 문자를 보기 위해서이다. 아시리아 제국(Assyria Empire)을 말하는 아시리아는 아카드어(語)로, 그것이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모른다. 지금의 발음은 1611년의 흠정영역성서(King James Bible)의 표기에 따른 것인데, 그렇다면 '앗시리아'가 옳다. 그래서 본 블로그에서도 이제껏 앗시리아를 고수해왔으나 표준어 표기법에는 아시리아가 맞는다고 하니 부득불 고쳐쓰지 않을 수 없겠다.

     

    이 나라의 이름은 초기 도시국가 시절의 국명이자 수도인 아수르(Assur)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수르는 또 도시 주신(主神)의 이름 아슈르(Ashur)에서 기인되었다. 이는 아시리아라는 민족명도 마찬가지이다. 국역(國譯) 성서에 나오는 앗수르란 말 역시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실은 흠정영역성서가 일본어로 번역되고 중역(重譯)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국적불명의 단어이다. 지금 일본어 성서에서는 앗시리아(アッシリア)로 되돌아왔으나 우리나라는 이 이상한 단어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상한 단어는 이것 한 가지만이 아니지만) 

     

    아시리아 제국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번 소개한 바 있지만, 여기서 축약해 설명하자면,  

     

    아시리아 제국은 기원전 25세기경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티그리스 강 상류(현 이라크 북부)에서 번영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셈족 군사 제국이다. 아시리아는 철기 무기와 정규군을 앞세워 기원전 9~7세기 신(新)아시리아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통일하며 고대 근동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으나, 그간 역사에서 묻혔다가 1853년 영국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Austen H. Layard)가 이라크 모술 근방에서 수도 니네베의 유지를 발굴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시리아 제국의 최대 영토 /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왕국이 섬처럼 표시돼 정복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앗시리아(앗수르) 제국은 성서에서 무려 132회나 표기된 역사의 강국이었고, 수도 니네베도 20회가 표기됐는데, 구약성서 요나서(3:3)의 기록을 보면 걸어 통과하는 데만 3일이 소요되는 큰 성이었다. 1846년부터 7년간 니네베 성을 발굴한 레이어드는 님루드 언덕 지하 6m 지점에서 길이 13km, 높이 60m에 마차 3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두께를 가진 거대한 성벽의 유적을 찾아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복원된 니네베 성

     

    그런데 그보다 더욱 세상을 경악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849년 래썸(H. Rassam)이 발굴한 니네베 대도서관(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의 유적으로서, 그곳에서 출토된 수만 점의 쐐기문자 점토판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획기적 전환시켰는데, 결정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의 역사가 이제껏 알려진 인류 최고의 문명 이집트에 앞선다는 인식의 전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 유명한 '지우쑤드라 신화'를 아카드어(語)로 번역한 '아트라하씨쓰 신화' 점토판이 발견된 곳도 바로 이곳으로, 그 중의 한 점이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아래의 '아트라하씨쓰 신화' 점토판은 앞뒷면에 쐐기문자로 고대 서아시아의 홍수 신화를 기록한 문서인데, 다른 문서들이 주인공의 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있는 점에 반해, 배의 형태가 가로와 세로가 같은 원형(圓形)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을 담고 있어 따로 '원형 배 점토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우쑤드라 신화'는 '길가메시 신화'와 함께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이야기 중의 하나로서 특히 '원형 배 점토판'의 내용은 '노아의 방주' 스토리와 유사해 성서고고학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록물이다. 시기는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600년 사이이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원형 배 점토판'

     

    아시리아는 주로 아카드어를 사용했다. 아카드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에서 쓰인 셈어족의 일종이며, 이를 기록하기 위해 수메르인들이 개발한 쐐기문자(설형문자)를 사용했다. 아시리아는 아카드어, 아카드어의 북부 방언인 아시리아어(語)를 공용어로 사용하였으나, 제국 후기에는 엘람어(아람어)가 보편화되기도 했는데, 이 언어들은 1835년 헨리 롤린슨(H. Rawlinson)이 베히스툰 비문(Behistun Inscription)을 발견하며 해독되었다. 

     

    베히스툰(Behistun)은 이란 서부 케르만샤주에 위치한 유적지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다리우스 1세가 자신의 즉위 과정과 업적을 기록한 베히스툰 비문으로 유명하다. 이곳 절벽에는 동일한 내용이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 등 세 가지 언어의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동일 내용이 3종류의 문자로 기록된, 그리하여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를 제공한 로제타석처럼 아시리아 쐐기문자를 해독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 / 다리우스 1세가 가우마타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과정과 그를 도운 아후라 마즈다 신에 대한 찬양을 당대에 쓰이던 3개의 언어로 새겨 놓았다.
    베히스툰의 문자 구성 / 절벽의 높이는 520m, 비문은 69m 지점에 새겨져 있다. 아시리아 공용어인 아카드어와 엘람어가 비문에 새겨진 까닭은 아시리아 멸망 후에도 아카드어와 엘람어가 근동의 주된 언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베히스툰 다리우스왕 부조 부분 / 다리우스 1세가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에게 경배하고 있다.
    베히스툰 엘람어 쐐기문자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는 전시장 한 벽에 베히스툰 부조를 재현해 그곳에 쓰인 쐐기문자와 번역문 영상을 차례로 보여준다.
    다리우스 왕 위의 쐐기문자를 옮겨 쓰는 롤린슨 경(卿) /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당시 이란에 파견된 영국군 장교 헨리 롤린슨이 절벽에 새겨진 쐐기문자를 보고 해독에 착수하여 베히스툰 비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다른 글자들은 부하들이 절벽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 탁본을 떴다.
    베히스툰 비문 아래의 관광객 가족 / 위 아찔한 상황이 과연 가능한가 싶지만 이 가족사진을 보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아시리아는 본시 아슈르라는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으나 기원전 1400년경,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리던 후르족의 미탄니 왕국이 쇠퇴하자 부근의 셈족 계열 종족들을 아우르고 근동의 강자로 부상했다. 그들은 기원전 1200년경 동쪽 엘람인의 침입에 일시 쇠퇴했으나 북쪽 프리기아로부터 보다 발달된 철기 제련술을 받아들인 후에는 다시 강해져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BC 744~727) 때에 이르러서는 첨단 철제무기로서의 군비개선과 면세정책 개선 등의 유신(維新)을 단행한 후 대규모 원정에 나선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Tiglath-Pileser III)는 국역성서에 디글랏 빌레셀로 기록돼 있으며 종종 '불'로 표현된다.(앗수르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함에...../열왕기하 15:19-20)

     

     

    님루르에서 발견된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부조 /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공성기(攻城機), 꼬챙이에 꿰어진 포로 시체, 성 위에서 추락하는 군인 등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브리티시 박물관)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부조 /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왕국을 통합한 정복군주다. (브리티시 박물관)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연대기 (브리티시 박물관)

     

    이때 이스라엘 왕국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스라엘 왕국의 태반을 점령한 티글라트 필레세르는 그곳 백성들을 아시리아 땅으로 이주시키는 사민(徙民)정책을 취한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853의 카르가르 전투를 비롯한 두 차례 전투에서도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지 못했던 바, 끈질긴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아예 백성들을 사민시킨 것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에서는 또 쿠데타가 일어나 호세아가 왕이 되는데, 이상에 대한 성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웃시야의 아들 요담 제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열왕기하 15:29-30)

     

    호세아는 결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된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의는 3년이라는 긴 공격 끝에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니 그 이후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열왕기하 17:6)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열왕기하 17:24)

     

    북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아시리아는 그곳 백성들을 아시리아 본토로 사민했을 뿐 아니라 아시리아 사람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옮겨 와 살게 만드니 이와 같은 혼혈정책이 훗날 사마리아인에 대한 배척으로 남아 그 악습이 신약시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 이야기 III') 이 방법은 오늘날 중국에서도 사용되어지고 있다.(☞ '지금 위구르에선? I - 신쟝 위구르의 역사')

     

    이라크 두르샤루킨에사 발견된 사르곤 궁전의 사르곤 2세 부조
    1843년 프랑스인 에밀 보타가 이라크 모술 인근의 코르사바드에서 발굴한 아시리아 라마수 상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진 라마수 상과 길가메시 상 / 루브르 박물관 아시리아관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유명한 조각품이나 그 앞에서 사진 찍고 있는 여자가 더 조각 같다. 마치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비현실적인 인체 조각상을 보는 듯하다.
    브리티시 박물관 아시리아관 입구의 라마수 상 / 대영제국의 산물인 브리티시 박물관은 앗시리아의 유물들을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긁어 모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문자 그대로 보물창고가 되었던 바, 인터넷으로 검색 가능한 유물만도 1,106개에 이른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입구의 바벨탑 / 스피커로 바벨탑을 쌓았다. 그럴 듯한 발상이다. 바벨탑의 이야기는 성서 창세기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한 사건으로, 인간은 신에 대한 도전으로써 하늘에 닿을 만한 높은 탑을 쌓으려 했고, 이를 경계한 신이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그들을 흩어지게 했다. 세계의 언어와 문자가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함무라비 왕(BC 1728-1686) 법전의 복제비 / 루브르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인 2.25m의 비석에는 총 282조의 법률이 바빌로니아 쐐기문자로 기록돼 있다. 흔히 오른쪽 인물을 함무라비 왕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왼쪽에 공손히 서 있는 사람이 함무라비다. 오른쪽에 앉은 태양신 샤마슈에게 법문을 내려받고 있음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으로 유명한 이 법문(法文)은 무려 4000년 전의 것으로 지금껏 그 형태가 완벽하다. (오리지널 비석의 사진이다)
    야외전시장에서 본 풍경
    도로에서 본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