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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동에 남은 손원일의 흔적 & 대한해협 해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6. 5. 4. 21:04

     
    국가 안보에 철저히 무감해진 시절이기 때문일까, 휴일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문득 1950년 벌어진 대한해협 해전이 떠올랐다. 서울 인사동에서 웬 대한해협 타령일까, 생각하실 분도 계실 터, 일단 대한해협 전투와 손원일이라는 인물에 대한 설명이 선행돼야 할 듯싶다. 대한해협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26일 새벽까지 부산 앞바다에서 대한민국 해군과 북한 해군 사이에 벌어진 6.25 전쟁 최초의 해전으로, 크게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만일 여기서 북한군이 승리했다면 필시 대한민국은 적화되었을 중요한 전투이다. 
     
    전투는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이 6·25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5일 밤 부산 근해를 초계하다 1,000톤급의 검은색 배를 발견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흑선은 북한군 특수부대원 약 600~1000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침투하려던 무장 수송선으로 부산항 파괴를 비롯한 후방 교란이 목적이었다. 밤 9시 30분경 깃발, 선명(船名)등의 아무런 표식이 없는 괴선박을 발견한 백두산함은 일단 운항 정지의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괴선박은 운항을 계속했고 이어진 2차 경고에도 응답 없이 남하했다. 이에 백두산함이 괴선박 100m 앞까지 접근해 살피려는 순간, 백두산함의 조타실을 향해 포탄이 날아들며 조타수와 포 장전수가 부상을 입었다. 북한군 수송선임을 확인한 우리 쪽에서도 곧바로 76㎜와 40㎜ 함포사격으로 응사함으로써 전투는 시작되었고,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이 치열한 교전은 6월 26일 새벽 1시 40분경 집중포화를 당한 괴선박이 침몰함으로써 끝이 났다. 우리 측에서는 전병익 중사와 김창학 하사가 전사했다. 
     
     

    전쟁기념관의 백두산함 미니어쳐 (위)
    백두산함의 승조원들
    대한해협 해전 전황도
    대한해협 해전 승전비 / 1988년 12월 23일 부산 중구 중앙공원에 건립된 기념비로 백두산함 선미(船尾) 기단에 14.45m 높이의 스테인리스 스틸 탑신과 백두산호 최용남 함장(당시 중령), 전사한 전병익 중사, 김창학 하사의 흉상이 세워졌다.
    2010년 6월 25일 대한해협 해전이 승리 60년만에 재연됐다. / 연합뉴스 DB
    2024년 6월 26일 대한해협 해전 74주년 기념 행사에서 전사자 유가족이 헌화하고 있다.

     
    이겼기에 망정이지 만약 북한군이 부산 상륙에 성공해 후방 교란작전을 펼쳤다면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본다. 우선은 부산항 접안시설이 파괴되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전쟁 초기 오직 부산항을 통해 이루어졌던 미군과 유엔군의 병력 수송과 군수 물자가 막혔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휴전선을 통해 남침한 북한군과 부산 상륙 특수부대가 양면 공격을 감행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비극적이었을 것이다.
     
    이 대한해협 전투에서의 일등 공신은 함장 최용남 중령,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를 비롯한 76명 승조원 모두이다. 아울러 해군이 국민 성금과 장병들의 쥐꼬리만한 월급을 모아 구입한 최초의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의 역할을 상찬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귀중한 성금을 모금하고, 그 성금으로 미국에 가 배를 사 온 사람이 바로 손원일이었다. 당시 백두산함은 450톤급이었으나 1000톤급 소련제(추정) 전투함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전투함의 성능이 우수했다는 방증이다. 
      
     

    해군 소장 시절의 손원일(孫元一, 1909~1980)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으로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1909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손원일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임시 의정원 의장(국회의장격)을 역임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손정도를 따라 중국에서 자랐고 1924년 중국 남경 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했다. 즈음하여 그는 상하이에서 각국 조계 보호를 위해 주둔해 있는 강대국 해군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 중화민국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중국해군부 시험에 합격했고, 1927년에는 우수 장교후보생으로서 중국 해군 국비유학생이 되어 독일 유학을 떠났다. 이어 1930년 해군보관으로 임관했으나 당시 중화민국 해군은 특정 지역 군벌이 장악하고 있어 타지인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꿈을 접은 뒤, 대신 항해사의 길을 걸었다. 이후 상선 항해사로서 함부르크 해운사에 취업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수에즈 운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장거리 항해를 경험하였으며,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독일의 15,000톤급 대형 원양 여객선 람세스 호에서 근무하는 등의 이력으로써 해운업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명성이 오히려 독이 되었으니 1933년 잠시 조선에 들어왔다가 상해 임시정부의 비밀연락 임무로 입국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난 손원일은 고문 후유증을 치료하던 중 1934년 매형인 남계(南桂) 윤지창의 제안으로 남계양행(南桂洋行)이라는 식료품 수입·판매상을 공동 창업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사업은 손원일의 수완과 전시(戰時) 폭등한 식료품 가격 등에 힘입어 크게 성공했는데, 당시 그의 회사가 있던 곳이 바로 인사동 사거리 옛 동원필방 건물이다. 

     

    그렇게 모인 돈은 동업자인 남계 윤지창의 묵인아래 상당수의 금액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이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조선해안경비대 창설 자금으로 쓰였다. 윤지창은 1928년 미국 시카고대 경영학부를 졸업한 당대의 드문 인사로서 남계양행을 바탕으로 사업가로 성공하였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 참여해 군정청 재무부 국장으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 전매청장을 지내기도 했다.  

     

     

    남계양행이 있던 건물 / 누구라도 이 앞을 한 번쯤은 걸었으리라 생각한다.
    부근 풍경
    바로 옆 구(舊) 조선중앙일보 사옥

     
    손원일은 해방 후인 1945년 11월 11일, 윤지창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해방병단은 1946년 6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되었으며 1948년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 5일 부로 대한민국 해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손원일은 해방병단 단장으로 있는 동안 미군정과의 합의를 통하여 일본군이 남긴 시설을 인수하고 조함창(造艦廠)을 세워 폐선들을 수리했다.

     

     

    종로구 인사동길 62-4 에 있는 '해방병단 결단식 터' 표석
    '해방병단 결단식 터' 표석 부근 인사동 길
    인사동길 표석 안쪽으로 '해방병단 결단식 터' 표석이 보인다.
    재현된 안국동천 / 표석 쪽에서 인사동 길을 바라보니 전에 없던 수로가 눈에 들어온다. 과거 경복궁 동쪽 언덕 아래에서 시작해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안국동천'이라는 개울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듯싶다.


    아울러 공식 모집을 통해 확보한 단원 1,000명으로 국내 해안과 도서의 경비를 담당했다. 이후 정부에서 해방병단과 조선해안경비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자 해안경비대장 손원일 대령은 그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하지만 말로만 해군일 뿐 변변한 배 한 척이 없었으니, 함선이라고는 일본이 패전 후 버리고 간 용골과 뼈대만 남은 전투함을 손원일이 조함창에서 재건조시킨 충무공정(忠武公艇)이 전부였다. 

     

     

    1947년 진해 조함창에서 건조된 충무공정 / 왼쪽은 미해군 HMS 벨파스트 경순양함이다.


    결국 손 제독은 함정건조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재원을 마련한 후 직접 구입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다. 1949년 6월 1일 손 제독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여 '함정건조 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해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진행하였다. 장교는 월급의 10%, 하사관과 수병은 5%씩 떼 모았고, 여기에 손 제독의 부인인 홍은혜 여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해군부인회'의 바자회를 통해 모금된 수익금이 보태졌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금운동은 일반 국민에게까지 확산되었던 바, 이렇게 모인 15,000 달러에 정부가 예산 45,000 달러를 보탰고, 그 돈으로써 1949년 10월 17일,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을 비롯하여 PC-702 금강산함, PC-703 삼각산함, PC-704 지리산함을 구입할 수 있었다. 진해항 입항일은 1950년 4월 20일로, 6.25 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의 일로서, 진해 입항 후 12 .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등을 장착해 훈련했다.  
     
    이때 구입된 배들은 북한군의 부산 침투를 막아낸 것은 물론, 옥계·삼척 상륙을 시도하는 북한군 선단도 막아냈으며 옹진반도의 북한군을 패퇴시키기도 했다. 전쟁 두 달 전 미국에서 배를 들여온 것이나 대한해협에서 북괴 수송선을 발견한 것이나 모두 만화 같기도 한 기적인데, 그렇게 힘들게 지켜낸 대한민국과 부산임을 상기해 다시 한번 국민들이 힘을 합쳐 좌빨들을 막아냈으면 좋겠다.  
     
     

    구입 당시의 PC-701 백두산함 / 이 배가 북한군의 부산 침투를 막았다. 해외 유력 외신과 전사 연구자들은 한국전쟁 중 북한군의 최대 실책 중의 하나로 부산 기습 상륙 작전의 실패를 꼽는다.
    76㎜ 포를 장착하는 광경 / 1949년 12월 26일 오전 10시, 뉴욕 의 미국 해안경비대 부두를 떠난 PC-701호는 1950년 1월 하와이에 도착하여 교포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3월 뱃머리에 함포를 장착한 후 3월 20일 한국으로 향했다.
    손원일이 받은 태극무공훈장 /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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