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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외계인의 자식이 아닐 경우 생겨날 문제점들(II)성서와 UFO 2019. 3. 10. 22:44
기독교가 정립되고 나서도 민초들은 이새가 누구인지, 그와 예수는 어떤 관계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가 이새의 아들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것은 기독교 교부들과 이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으려는 지배 계층,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독교를 신의 학문으로 만들려는 어용학자 정도만이 알 일이었다. 까닭에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예수의 신격화가 필요했던 바,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신의 아들로서, 신과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민중들에게 강제 입식(入植)시키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으니, 재 너머 밭가는 농부도 예수의 이름 정도는 주어 섬길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학자들이라고 모두 그를 신의 아들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니, 예수의 신격화에 반대하는 오랜 투쟁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1~4편에 걸쳐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건너 뛰기로 하겠는데, 다만 예수의 정체에 대한 오랜 싸움이 최종 정리된 아래의 칼케돈 종교회의만은 잠시 짚고 넘어가자.(※ 역사적으로나 종교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회의이며, 아울러 상식적으로도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회의이므로! 이거 하나만 알고 있어도 어디 가서 안 꿀린다!^^)
451년(10월 8일부터 11월 18일까지)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소집하여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옆 동네 칼케돈에서 개최된 위 종교회의에서는 다음의 것이 결정되어지며 기독교사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시며, 이 두 가지 본성이 조금도 섞이거나 그 특성이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안에 한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칼케톤 신조가 결정되었다.
* 이 결정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교계의 최종 입장인 바,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늘 외우는 초기 종교회의의 결정문 '사도 신경(니케아 신조)'보다 훨씬 중요하다.
2. 마리아의 처녀 잉태설을 부정하고 '예수는 신성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라는 크리스트 이성설(二性說)을 주장한 네스토리우스 파가 이단으로 확정되었다.* 주류 세력이었던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당연히 칼케돈 신조를 수용하였고, 반면 네스토리우스 파의 학설을 지지하던 이집트 교회(꼽트교회)와 에디오피아 정교회는 이에 불복해 동방정교회를 탈퇴한다. 오랫동안 기득권 세력과 싸우던 네스토리우스 파는 새로운 땅을 찾아 시리아와 중국으로!
* 네스토리우스 파는 중국 당나라에서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자리잡는데, 경교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3편을 참조 바람.
3. 칼케돈 신조는 이후 삼위일체설의 논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 대부분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설이 정립됐다고 여기고 있으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니다. 삼위일체설이 정립되기까지는 이후 칼뱅까지 100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던 바, 이는 그만큼 바탕이 불완전한 학설로 출발했던 까닭이다.
앞서 말한 방향을 잘못 잡은 종교회의란 결정적으로는 이 칼케돈 종교회의가 될 터인데, 아무튼 이로 인해 기독교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3명 하나님이 공존하게 되었고, 이후 불완전한 기독교의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반면 기독교와 그 뿌리가 같았으나 종교회의 같은 것을 거치지 않았던 이슬람교에서는 당당하게 '오직 알라'라는 일신론을 외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기독교 5대 총교구(Patriarchate) 중 3개(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를 손에 넣어 자신의 종교권으로 편입시켜 버렸던 바,(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 남음) 훗날 서방 세계에 십자군 전쟁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당대 5대 총교구의 위치(●)와 네스토리우스 파의 머나먼 여정(―)
네스토리우스의 조각상과 네스토리우스 파의 이지드바드지드가 당나라 장안의 기독교 사원 대진사에 건립한 비석. 비석은 경교(네스토리우스 파 기독교)의 중국 전도 상황을 기록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로 현재의 비림(碑林)으로 옮겨지기 전의 것이다.
아울러 이 칼케돈 신조는 훗날 '칼케돈 강도 회의'라 칭해질 정도로 강압적인 공포분위기 속에서 통과된 결정문임 또한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즉 네스토리우스 파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기득권 세력에 눌렸을 뿐 이론 자체가 취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 로마 대교구는 네스토리우스 파를 몰아낸 칼케돈 신조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동등한 지위를 선언한 또 다른 결정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자세를 취했는데, 1500년이 지난 지금도 로마 교황청은 이에 불복하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말하자면, 아마도 중세기 식자(識者)들의 생각은 아래의 아비온 파의 생각이 주류였지 않나 싶다. 아비온 파의 주장이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예수는 말씀(logos)으로 선재(先在)하지 않았으며(요한복음 1장 1절에 대한 부정) 동정녀에 의한 탄생도 없었다. 예수는 우리에게 신적인 존재가 아니나 특별하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신명기 8장 15장에 언급된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예수를 추앙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의로운 자로 여겨 양자로 삼았다 여기기 때문이다.
* 에비온(Ebyon)파는 초기 기독교의 금욕적 종파로, 에비온이란 말도 '가난'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왔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렇듯 인색한 예수에의 정의마저도 당대의 민초들에게는 별로 귀에 와닿는 소리가 아니었다. 민초들에게는 그것도 그저 식자들의 현학(顯學)의 과시 정도로만 들릴 뿐이었는데, 대신 예수에 정체에 대해 떠도는 민중 설화 식의 소문은 귀에 쏙 들어왔다. 그중 가장 널리 회자되던 말은 그가 로마 병사 판테라의 자식이라는 것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예수는 그 바람둥이 로마 병사와 마리아가 정을 통해,(혹은 강간을 당해) 낳은 자식이라는 것이었다.
판테라에 관한 소문은 당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사건의 구체성과 개연성이 그 이야기를 더욱 믿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출생지는 페니키아 시돈 지방이며 그의 복무지는 유다 갈릴리의 세포리스(치포리)였는데, 그는 이때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의 부하로서 주둔하다 그 지방 대제사장 요아힘의 딸이었던 마리아와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점령군으로서 마리아를 강간했다는 다른 버전도 있다)
발굴된 세포리스 도시유적
발굴된 세포리스 원형극장
극장 아래층은 일부 복원되었다, 위쪽 건물은 십자군 시대의 망루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그의 복무지가 마리아가 살았던 나자렛과는 불과 6km 떨어진 세포리스인 점과, 또 당시의 세포리스가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갈릴리·페레아 지역의 행정수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스토리는 제법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스토리는 질서 없이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 AD 177년 그리스 출신의 철학자 켈수스가 쓴 '진정한 교리에 관하여'(On rhe True Doctrine)'에 실려 있는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당시 별로 유명한 철학자가 아니었고 따라서 그가 쓴 책 또한 별다른 유명세를 얻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 책에서의 예수는 분명히 '판테라의 아들 예수'(Yeshu ben Pantera)'였다.
세포리스의 원형극장은 4,500~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당시 세포리스는 인구 30,000명 정도의 친로마적인 도시였다.
그처럼 당시에 별볼 일 없던 책 속의 이야기가 세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유명한 기독교 교부 오리게네스(185?-254?)가 자신의 저서 '콘트라 셀숨(Contra Celsum)에 그 이야기에 관한 반박문을 실은 까닭이었다.(* 콘트라 셀숨에 관해서는'과학으로 본 '베들레헴 별'의 정체' 참조) 이에 그대로 묻혀질 뻔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오리게네스는 예수에게 오히려 못할 짓을 한 셈이었다.
경위야 어쨌든 마리아와 판테라의 이야기는 이렇게 세상에 나와졌고, 그와 동시에 확대 재생산되며 사람들의 혀를 타고 번져나갔다. 이를테면, 마리아의 배가 불러올 무렵 판테라는 근무지 이동으로 타 지방으로 가게 됐고, 마리아의 아버지 요하힘은 그런 딸을 조금 얼빵한 동네 노총각 목수 요셉에게 시집 보냈으며,(요셉은 재취였다는 버전도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유다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쓴 '유대인 고대사'에도 실려 있었는데, 어느 기독교 교부가 그 부분만 골라 찢어 없앴다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그 진위를 떠나 당시까지만 해도 민중들의 마음 속에서 예수가 신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예라 하겠다.
* 그런데 전설처럼 떠돌던 소문의 주인공 판테라의 묘비가 1859년 10월 독일 라인 강변 빙게르부르크 도로 공사 현장에서 기적처럼 발견됐다. 판테라의 묘비는 다른 군인들의 묘비와 함께 발견됐는데 그의 묘비가 유독 눈길을 끈 것은 당연히 위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의 묘비는 현재 바트 크로이츠나흐에 있는 뢰메르할레 박물관에 전시돼 있으며 그의 이름과 함께 '로마 제 1보병대의 궁수로서 40년 간 복무하다 향년 62세로 죽어 이곳에 묻혔다'는 묘비명을 확인할 수 있다.(참고로, 그가 정말로 예수의 생부인가에 대해서는 Yes와 No에 대한 반론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 3편으로 이어짐.판테라의 묘비석과 묘비명
'티베리우스 압데스 판테라'의 퍼스트 네임 티베리우스는 그가 40년을 복무한 후 티베리우스 황제 명의의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을 때 덧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판테라 묘비석의 안내문
판테라가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일련의 로마 군인 묘비석
2층 계단 입구에 전시된 판테라의 묘비석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미 노스케롤라이나 대학 종교학 교수 제임스 타보르(James D. Tabor)는 판테라의 묘비 관련해, 세포리스에 있던 판테라는 BC 6년 그리스 북쪽 달마치안으로 전보됐고 AD 9년 게르만족과의 접경 지역인 독일 빙게르브뤼크로 옮겨 주둔했다고 말한다. 위 판테라의 묘비석도 그의 책 '예수 왕조(The Jesus Dynasty)'에 수록되며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 이 책은 국내에도 소개되며 큰 반향을 불러왔다.(2006년 '현대문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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