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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위일체의 진실(II) - 황제가 만든 신 예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5. 28. 05:39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公議會)에 대해서는 이미 수 차례에 걸쳐 설명한 바 있다. 이번에는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 하는데,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설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부와 성자의 개념은 확실히 정립되었으니, 이는 잘 알려진 대로 예수의 신성(神性)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한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즉 성부와 그 아들인 성자 예수는 동격의 신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파와 싸운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성부와 예수는 동격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그 가장 큰 이유는 예수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신성과 인성(人性)을 함께 지닌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초기 기독교회에서 예수의 신성을 부각시키려는 교회(예수의 동생 야고보, 예수의 직계 제자, 사도 바울 등이 세우거나 이끄는 교회)에게는 당연히 배격되었지만 그외의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았다. 또 다른 계열인 그노시스파나 에비온파(☞ '예수가 외계인의 자식이 아닐 경우 생겨날 문제점들 II') 역시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여겨진 까닭이었다.



    아리우스의 싸대기를 날리는 아타나시우스 파의 니콜라스

    아리우스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정설이지만 당시의 험악했던 회의 분위기는 훗날 이런 그림을 만들어냈다. 



    초기 교회에서의 이 두 계파의 주장은 결코 합치될 수 없는 내용의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신이 되거나 인간이 되거나 양단간에 결판이 나야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서로 백중세를 이루는 그 두 계파의 싸움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황제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을 믿는 이교도였던 바, 사실 이들 싸움에는 관심도 없고 또 끼어들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기독교를 공인한 마당이었고,(따라서 어쩌면 그 싸움의 원인제공자였고) 또 사회적으로도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이 문제를 마냥 수수방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는 우선 이 문제의 진원지인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화해를 권고하는 편지를 보냈다.(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장로 아리우스에게 각각) 편지의 내용은 둘 다 같은 것으로서, 예수의 근본을 다시 잘 찾아 화합하여 사회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통할 리 없었을 터, 다시 히스파니아 코르도바 교회의 주교 호시우스를 보내 합의를 종용했지만 역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황제는 325년 5월, 휴양지 니케아로 각 계파 지도자와 유명 교회의 주교들을 불러들였다. 너희들끼리 합의를 보든, 박 터지게 싸워 결론을 내든 여기서 이 문제를 확실히 매듭지으라는 것이었다.


    ~ 이에 후세의 성서학자들은 이 니케아 공의회를 최초의 에큐메니컬(Ecumenical)한 종교회의라 칭하기도 했지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로마제국 전체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거의가 동방 교회 사람들이었다.(그곳에 모인 318명 중 서방 교회에서 온 사람은 여섯 명에 불과했다)



    공의회가 열렸던 니케아 성당

    지금은 이스탄불 대성당과 같은 이름인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라 불리며, 지진과 화재와 전쟁 등으로 수차례 파괴된 것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성당 뒤에 보이는 첨탑은 이슬람 교도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새로 발견된 니케아 성당

    2018년 9월, 항공촬영 중 우연히 이즈니크 호수변에서 1700년 전의 성당 흔적이 발견됐다. 이 성당은 740년의 지진으로 가라앉은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후 이곳이 공의회가 열린 니케아 성당일지 모른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앞서 1편에서도 말했지만 그들은 1차로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한판 붙은 적이 있었고, 니케아 공의회는 그에 대한 상고심 같은 것이었다. 7년 전 아리우스의 주장은 고배를 마셨음에도 아리우스파가 이에 불복하는 이유는 그것이 대중의 의견을 무시한, 주교 알렉산드로스의 개인적 판단에 근거한 판결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신(神) 예수보다 신성(神性)을 가진 사람의 아들 예수 이론이 훨씬 더 피부에 와닿는 것었다. 또 그것이 당대의 여러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 합리적이었다.


    실제로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한 교회 주교들도 대부분 아리우스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알렉산드로스의 생각을 따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아리우스는 고령으로 인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아리우스파를 대표해서 온 니코메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 역시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언변으로 이름 높던 자였던 바, 이대로 가면 아리우스파의 승리가 굳어지는 마당이었다.(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 내의 종교 재판에서 이단으로 추방당하자 동방 교회를 돌아다니며 제 주장을 펼쳤는데, 에우세비우스는 이에 감화되어 아리우스파가 되었다)


    이때 알렉산드리아 교회 이론(성부 성자 동질설)의 대표자로 초청받은 사람은 주교 알렉산드로스와 부제( 副祭)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리고 부제 아타나시우스 역시 고령의 알렉산드로스를 대신해 싸우게 되었는데, 그도 에우세비우스 못지 않은 이론가요 변설가로 알려진 자였지만 이미 분위기가 기운 마당이라 그의 변설은 크게 힘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이론은 대중에게 좀 어렵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예수는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일 뿐이며 하나님은 절대 유일의 존재(agennetos)라고 한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간단명료한 반면,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 동격의 신(homoousion)이라는 주장은 쉽게 이해되기 힘든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생각, 즉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생각을 힘껏 외쳤지만 메아리는 없었다.



    니케아 공의회를 묘사한 그림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중심으로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가 제각각의 근거를 들이대며 설전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다름아닌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그는 당연히 기독교도들을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 터, 확실히 정립된 아리우스파의 이론보다는 조금 모호한 아타나시우스파의 이론이 더 입맛에 맞았다. 이론이 애매할수록 황제의 입김을 부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또 예수가 신이 되어 민중을 좌지우지하는 편이 황제의 명령에 유리하다고도 판단되었다. 일반 민중들과 달리 말을 잘 안 듣는 기독교도들에게 "신 예수님의 말씀이니 그대로 해!" 하는 것이 정치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종교 이데올로기적 발상이었다.



    네로 황제 시대의 기독교 박해

    이같은 박해보다는 예수의 권위로 기독교인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이 콘스탄티누스의 판단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이론의 타당성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이에 황제는 논쟁의 와중에 가끔 이같은 자신의 발상을 피력했다. "내 생각에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동일한 인격 같다(homoousion to Parti)" 뭘 알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황제의 발언은 그러했다.


    권력지향형 인간이었던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이와 같은 황제의 의중을 단박에 파악했다. 그는 카이사레아 교회의 주교로서 소아시아 일대의 교회들에 대한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리우스파를 대표해서 온 니코메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와는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따라서 아리우스파의 이론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최소한 의리상으로도 그러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황제의 발언 이후로는 내내 침묵하더니 결국 제 생각을 바꾸고야 말았다.(그는 이후 황제의 종교 자문 역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여 황제의 딸랑이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합일점을 찾을 수 없었던 논쟁은 다음 달에 이르러 결국 투표로 결정되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니코메니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이끄는 아리우스파의 일방적 우세가 점쳐지던 공의회 분위기였으나 이날 투표의 결과는 놀랍게도 정반대였다. 아니, 사실 놀라울 것은 없었으니 황제의 복심(腹心)이 어디 있는가가 확실해진 마당에 감히 황제의 뜻에 반하는 표를 던질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겠는가?


    개표 결과 아리우스파의 성적표는 생각보다 참담했으니 '예수는 신은 아니다'를 주장한 아리우스파는 318표 가운데서 단 3표만을 얻었다. 처음에 아리우스파에의 지지를 표명했던 카이사레아 에우세비우스 영향력 하의 소아시아 교회 주교들 역시 아타나시우스에게로 돌아선 듯 '예수는 신이다'의 쪽에는 300표의 몰표가 쏟아졌다. 다만 기권 15표라는 일부 양심표가 나왔을 뿐이었다.


     

    니케아의 위치


    에우세비우스는 이 자리에서 분전했으나


    결국 황제의 복심에 KO당하고 말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앞에 에우세비우스가 쓰러져 있다)  



    아리우스와 니코메니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는 추방되었고,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일약 기독교계의 일인자 위치에 올랐다.(앞서 말했듯, 그는 이 기세를 몰아 신약성서 27권의 목록을 발표하며 나머지 요상한 문서들은 모두 폐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수는 신이다'의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황제의 궁성으로(쉽게 말해 청와대로) 들어갔다.


    보았다시피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누른 건 논리적 승리가 아니었으니 그저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결과물일 따름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4분된 로마제국을 병합해 천하통일을 이룩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위력이 신학적 논리마저 잠식했음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앞서도 말했듯, 이때 아버지 여호와와 아들 예수가 동격이라는 '성부=성자'의 개념이 확립되게 되었으나 성령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아직 도입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신이 된 예수에게 이제는 섹스에 의해 탄생했다는 불경스러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던 바, 성령에 의한 탄생이라는 말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시작이었다.(☞ '예수가 외계인의 자식이 아닐 경우 생겨날 문제점들 III')


    '성부=성자=성령'의 이른바 '성 삼위일체론'은 이렇게 출발하게 되었으나, 이는 이후 신학자들에게 큰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터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회의 교부에서부터 루터, 칼뱅의 근세 신학자, 그리고 유니테리언과 위르겐 몰트만에 이르는 현대 신학자들에게까지.(미약한 근거를 꿰맞추느라 고생이 많았을 거라는 거라는 얘기다.☞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V')


    ~ 사정이 이러한데, 내가 누누히 의심스러워 하는 문제, 즉 창세기에 인간을 만든 '우리'라고 하는 복수 인칭대명사가 '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라는 기독교계의 답변을 어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거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왜 나오니? 애들 장난하니? 창세기-2:26/4:22-를 다시 한번 읽어보삼 )


    신학자들의 고민은 무엇보다 성서에 삼위일체설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 기독교에서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둘러지는 삼위일체지만, 놀랍게도 성서에서는 그 전거(典據)를 찾기 힘들다. 굳이 찾자면 다음의 내용뿐이니, 그 첫째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의 광경이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16-17)




    이로 인해 삼위일체 성화에는 꼭 비둘기 한 마리가 끼어든다.



    다음으로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에게 한 말 중의,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태복음 28:19)


    라는 내용과, 사도 바울이 코린트 교회에 보낸 네번 째 편지에서 그에 관한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외에는 달리 찾아볼 구절이 없다.(더욱이 성서에는 삼위일체, 즉 trinity나 trinitas라는 말 자체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린도 후서 13:13)


    사실 궁색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들이다. 까닭에 성경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은 포장에 비해 크게 부실한 내용물의 상품을 펼쳐본 것과 같은 실망감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예의 신앙심으로써 이를 극복하더라도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도 더 큰 문제는 기독교에 '성부 · 성자 · 성령'의 3명 신이 존재한다는 외부적 인식을 불식시킬 대안이 없다는 것이니, 이같은 문제의 출발점 역시 니케아 공의회로부터였다. 기독론자들은 이같은 삼신론(三神論)이 교리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무지의 소치라고 일축하지만, 같은 교리를 지닌 이슬람에서는 적어도 이와 같은 소음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알라'라는 유일신만 존재하기에.  -end-



    실제로 3명의 하나님을 그린 성화도 있다.


    아무튼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예수가 신이 아니라고 기록된 모든 책들을 불태웠으며,


    기독교도로부터는 대제(Great Emperor)라는 칭호와 함께 예수의 13번째 사도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부여받는다.


    콘스탄티누스,


    그는 사실 삼위일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그가 예수를 신으로 만든 것만은 분명하다.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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