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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룟 유다를 위한 변론(III) - 창작된 유다의 배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5. 20. 00:45


    가룟 유다와 예수가 친구로 설정된 '예수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1989년 파라마운트 필름)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원작은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동명 소설로, 예수의 생애를 다룬 작품 중 가장 파격적인 영화였다고 생각된다. 영화는 원작을 그대로 되살려 예수를 보통의 인간으로 묘사하려 애쓴다. 영화에서 예수의 직업은 로마군에게 십자가를 납품하는 목수이고, 유다는 그의 친구이자 열심당 당원으로 로마에 대항하여 무력 봉기를 일으키려는 사람이다.


    유다는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예수는 끝내 비폭력 인도주의 노선을 견지한다. 그리고 유다도 결국은 그에게 감회되어 거룩한 대속을 이루려는 예수의 생각을 좇아 그를 밀고하여 십자가에 세우게 된다.



    영화 '예수 최후의 유혹'의 한 장면



    여기까지는 그래도 성서의 내용과 대충 비슷한데, 반전은 그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일어난다. 거기서 예수는 천사로 변장한 악마의 유혹을 받아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고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이같은 테마는 결국 신성모독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 소설은 바티칸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되고 영화를 만든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온갖 위협에 시달린 나머지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했다는 후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기독교인들의 반대가 거셌으나 예수의 섹스 장면 등 일부 자극적 장면을 삭제시키고 시작과 함께 해명성 자막을 내보내는 선에서 절충돼 상영됐는데, 나는 EBS에서 한창 괜찮은 영화들을 내보낼 무렵 보게 되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예수 최후의 유혹'


    영화 '예수 최후의 유혹'을 만든 마틴 스콜세지



    당연히 가위질이 많이 돼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스토리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다. 다만 예수 역을 맡은 윌럼 데포가 워낙에 악역 전문 배우라(비교적 최근 영화로는 '스파이더 맨 1') 처음에 몰입이 조금 불편했을 정도..... 그런데 거기서도 내가 흥미로웠던 장면은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는 일련의 장면들로서 거기서는 성서의 내용과 달리 배신자의 고통과 고뇌가 담겨져 있다.


    나는 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더불어 그러한 유다의 고뇌가 훗날 그를 극악한 배신자로 만들기 위한 복음서의 저자들의 계획된 의도 속에 사라졌으리라 여기고 있다.  유다가 악마가 되는 과정 역시 바로 여기로부터 출발한다. 즉 4대 복음서 저자의 창작에 의해 악인 유다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었다.(다만 마가복음은 조금 예외적으로, 마가복음 최후의 만찬에서는 유다가 배신자로서 공개적으로 지목되지 않는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말한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태복음 26:21)


    제자들이 서로 묻는 가운데 유다도 같은 말을 묻는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그러자 예수가 꼭 집어 답한다. "네가 말하였도다."


    이 물음과 대답은 훗날 유다를 뻔뻔하고 잔인한 거짓말장이로 만들어버린다. 곧 예수를 팔아먹을 자가 어쩜 그리 낯 한 번 붉히지 않고 그와 같은 뻔뻔스런 질문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유다는 그 대답에 크게 절망한다.(아마도 실제로 유다는 그 순간 절망했을 것이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에의 밀고를 망설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계속된 종용에 결국 예수를 파는 죽음의 키스를 행하는데, 여기서도 예수는 유다를 종용한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태복음 26:50)



    오래전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에서도 강조했거니와 유다 배신의 사건에 있어 복음서의 저자들은 유달리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의 피의 땀'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것은 예수가 피 땀을 흘렸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 당시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이 없음에도 그와 같은 일이 기록된 것이 바로 허구성라는 것이다. 그 내용을 전재(轉載)하자면 다음과 같다.


    유월절을 앞두고 로마군들과 유대 당국자들 사이에서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방안이 구체화된 가운데, 예수는 즈음하여 예루살렘 근방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다음과 같은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2:24-46)

      

    그리고 그 직후 배신자 유다가 유대의 대제사장과 로마군을 끌고 와 입맞춤으로써 예수를 지목하고, 결국 예수는 체포돼 대제사장의 집으로 호송되게 된다. 말하자면 예수는 자신이 체포될 것을 직감하고 자신의 신(神)인 여호와에게 위와 같은 간절한 기도를 올리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공관복음에 모두 실려 있지만, 예수가 피의 땀을 흘렸다는 사실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돼 있다. 예수가 정말로 피의 땀을 흘렸는지, 아니면 그만큼 절절히 기도했다는 의미의 은유적 표현인지 위 성서의 내용만으로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드나, 다만 '피의 땀' 만큼은 의학적으로 설명될 수가 있다.  이는 의학적 용어로 '히머티드로시스(hematidrosis, 혈한증)'라 불리는데,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땀샘에 있는 모세혈관을 파괴하는 화학성분이 배출되게 되고 이로 인해 소량의 피가 땀과 함께 섞여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예수는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서의 강행군으로 심신이 크게 지쳐 있었던 바, 자신의 신을 향한 마지막 기도에서의 피의 땀은 딴은 이해되기도 할 일이다. 하지만 위 성서의 내용에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때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예수가 극도의 긴장과 불안에 시달리며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 예수의 제자들은 잠에 떨어져 헤롱대고 있는 것이니, 이 상황은 오히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더욱 자세하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그만)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마가복음14:32-43)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스승은 절망에 싸여 기도하는데 팔자 좋게 잠을 자는 제자들의 한심한 작태가 아니다. 내가 정작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 모두가 잠이 든 이 마당에서 예수의 기도를 보고 들은 자는 누구이며, 예수가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돌아와 한 말을 들은 자는 또한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잠에 골아떨어져 있는데 말이다.

     

    상황을 분석하자면, 예수가 딱하게 생각할 정도로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고, 때문에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예수는 배신자 유다가 유대 성직자들과 창검으로 무장한 로마군들을 몰고 왔을 때 비로서 제자들을 독촉해 깨웠고, 제자들은 이에 화들짝 놀라 깨어 일어났음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때 깨어 있는 자는 오직 예수뿐이었다. 하지만 예수가 복음서를 썼다는 것은 말이 안 될 터, 이 상황을  보고 듣고 기록한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피터 스탠퍼드는 이제껏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에의 창작 여지를 지목한다.


    누가복음에서 유다는 예수에게 끝내 입을 맞추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의 저자)의 경우는 언제나 그랬듯 유다의 입맞춤에도 자신의 창작을 덧붙인다. 일단 요한은 유다가 예수에게 입을 맞춘 장소가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고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한 동산이라고 기록한다.(겟세마네 동산이 기드론 골짜기에 위치해 있긴 하다)


    그런 후 그 동산은 제자들이 그 전에도 여러번 모였던 곳이라고 덧붙였다.(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성인이 된 후 예루살렘을 두 차례 이상 방문했다. 만약  이 동산이 예수의 무리들이 자주 모이던 곳으로 유명했다면, 굳이 유다가 로마병정들을 그곳으로 안내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대 복음서가 작성되던 초기 교회 시대에 벌어진 논쟁을 살펴보면, 유대교도들과 유다에게 유달리 가혹한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다고 한다.(당연히 이 주장은 이후에 만만찮은 반론에 부딪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에서 요한은 예수를 체포한 책임을 유대교도가 아닌 로마인들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동산에 당도한 병사들을 맞이한 것도 늘 주도적인 예수였다. 유다는 그저 조용히 옆으로 물러나 있을 뿐이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이미 알고 있던 예수가 묻는다. "나사렛 예수요."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가 다시 말한다. "내가 그 사람이다." 유다가 예수에게 입을 맞출 필요가 없는 셈이다. 오히려 애당초 유다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까닭도 없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를 넘겨줄 유다도 그들(병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요한복음 18:6) 왜 갑자기 뒤로 물러나서 쓰러졌는지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 또한 배신자 유다가 수행한 역할 중 하나였던 셈이다. 아무튼 유다의 배신은 완성된다. 비록 요한복음에서는 (특히나 이 중대한 순간에) 유다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지만, 예수가 체포되면서 유다의 목적은 달성된다.


    이렇듯 놀라운 피터 스탠퍼드의 지적은 배신 이후의 사건에도 이어진다.


    일반적인 배신 이야기라면, 배신자 유다는 예수의 재판에 참석해 제자들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비밀을 폭로하고, 재판정에서 배신자로서 모멸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럴싸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사대 복음서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에게 불리하게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마가는 예수의 재판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지만, 증인들 중에 유다가 있었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마가복음 14:56)


    그저 사도 바울이 칭찬했던 객관적인 문체를 통해 증언한 이들이 많았다고만 기록했을 뿐, 이름을 나열하지는 않은 것이다. 또한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굳이 마가가 비워둔 여백을 채우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입맞춤만 남긴 채 유다는 마가와 누가, 요한의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예수는 기가 막힌 기적을 행한다. 대제사장 일당들이 예수를 붙잡으려 하자 예수 제자 중의 한 명이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는데, 예수는 그자의 떨어진 귀를 감쪽같이 도로 붙여놓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지면 떨어진 귀를 붙이기 위해서는 봉합이라는 외과적 수술밖에 없다. 그런데 그 다급한 와중에 예수는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살벌하게 들이닥쳤던 그들이 그동안 그 외과수술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을까? 이것은 내가 평소에 상식적인 선에서 품었던 의문인데, 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이야기가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점점 발전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가복음 14: 44-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6: 50-55)


    이 두 패러그래프를 비교해보면 똑 같은 이야기에서 폭력에 대한 예수의 준엄한 충고가 삽입되었음을 대번에 알 수 있는데, 한술 더 떠 누가복음에서는 잘려나간 귀를 붙여준다.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누가복음 22:48-52)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귀를 자른 자와 잘린 자의 이름이 모두 등장한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요한복음 18:10-12)



    중세기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려진 '유다의 키스'와  '말고의 귀를 베는 베드로'



    이중 가장 거짓말장이는 누구일까? 당연히 누가복음의 저자다. 언뜻 요한복음의 저자가 가장 진척된 거짓말을 한 듯 보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적어도 귀를 도로 붙였다는 말은 없다. 그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흘린 '피의 땀'과 고통의 기도를 목격한 유령 목격자이기도 하거니와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원인 모를 곤두박질을 당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다고 기술한 사람이다. 단적으로 말해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이다.(전통적으로 누가복음의 저자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고, 보편적인 학설이기도 하다. ☞ '루가가 말하는 예수 탄생의 비밀 I')


    그래서 나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목 매달아 죽었다는 마태복음의 기록을 유다의 최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언급된 '피 밭'의 피는 유다의 피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 되겠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겔다마 역시 유다가 흘린 피와는 무관할 터이다. 한마디로 그간 유다 죽음의 장소로 알려진 하켈마다나 아겔마다는 그와는 전혀 무관한 장소가 되겠다. ('가룟 유다를 위한 변론 I')


    하지만 그 '피의 밭'은 지금껏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고 유다의 영혼이 지옥에 갔다는 인식 또한 변함없이 이어져왔다. 대표적으로 단테의 '신곡'에서 가룟 유다는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캇시우스와 함께(둘 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배반한 인물이다) 지옥의 맨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있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최근들어 유다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2006년 로마교황청의 역사과학위원회 위원장 발터 브란트뮐러는 '(유다복음서의 발견을 계기로서) 이제는 유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려야 할 때'라는 중요한 언급을 했고, 근자의 문학작품이나 여러 예술 장르에서 유다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를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마지막으로 'JUDAS'의 피터 스탠퍼드가 그에 관해 소개한 글을 빌리면서 유다에 대한 눌변(訥辯)의 변론을 마칠까 한다. 


    최근에 유다가 등장하는 작품은 한 페이지를 꼬박 할애해야 할 정도로 많다. 뉴질랜드의 순수문학 소설가 C. K. 스테드의 2006년 작품 〈내 이름은 유다였다My Name Was Judas〉에서 유다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아 노인이 되어 예수의 신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이듬해에는 대중 작가인 제프리 아처가(바티칸 고위 성직자와의 공저를 통해) 유다의 이야기를 유다의 아들 벤저민의 시선으로 재창조해냈다.('The Gospel According to Judas by Benjamin Iscariot) 그밖에도 1979년 영화 〈브라이안의 삶Life of Brian〉에는 예수와 열두 제자가 모두 동성애자로 등장해서 현대의 텍사스에서 박해를 당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런 작품들이 하나같이 일정 부분 복음서 기록을 토대로 유다를 그려냈고, 제각각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 작품들이 그린 유다의 모습은 논란을 일으키거나 대단한 화제가 되긴 했지만, 단 한가지 요소만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바로 유다의 이야기가 대단히 흥미롭고 무수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유다는 또다시 시대상에 맞추어 변신한다.


    END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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