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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룟 유다를 위한 변론(I) - 피밭의 진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5. 17. 04:34


    지금까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정경과 외경을 오가며 담론을 펼쳐봤는데, 이러한 파노라마틱한 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미진한 무엇이 있다. 그것은 당연히 '유다, 너는 대체 누구냐?'하는 것일 터, 이번 회에서는 총정리의 입장에서 유다의 정체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예수를 판 중죄로 인해 인류에게 가장 미움을 받고는 있지만 사실 그에 관한 성서의 왜곡이 너무 심한지라 국선변호인의 형식적인 변론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를 테면 '죄는 미워하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하나마나한 변론 같은 것이라도.....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 문장인가 모르겠다. 그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인데, 그 죄만 미워하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니....? 갑자기 생각나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누군가의 말장난인 듯싶다. 하지만 또 어찌보면 이 같은 부조리한 문장은 가룟 유다에게는 매우 어울리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가 예수를 밀고한 사건은 단순한 배반이 아니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무엇이 뒤엉켜져 있기에..... 그래서일까, 유다에 관해 가장 잘 정리된 책이라는 평을 듣는 'JUDAS'의 작가 피터 스탠퍼드는 책의 프롤로그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죽음의 장소를 찾아가는 착찹한 심경으로 대변한다. 그 몇 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예루살렘을 이리저리 거니는 동안 하켈다마(Hakeldama, 아람어로는 하겔 데마hagel dema, 종종 그리스어인 아겔데마Akeldema로도 불린다)를 가리키는 표지판은 딱 하나만 눈에 띄었다. 하켈다마는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이스가리옷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뒤 수치심에 자살한 곳이다..... 수백년 동안 전해져온 유다의 이야기 중에서도 은화 30냥이란 헐값에 예수를 팔아넘긴 이 거래야말로 가장 악명 높은 일화다.


    두번 째로 악명 높은 일화는 기독교의 핵심 문헌인 성경에서 첫 번째 일화에 이어 곧장 등장한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로마병사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 행했던 이른바 '유다의 입맞춤'이다. 겉으로 보기엔 애정 표시였지만 실제로는 배신이었던 그 입맞춤은 예수가 신뢰하던 내부자였던 제자의 배신이라는 점에서 유다의 악명을 드높였다.



    지오토 디 본도네의 '유다의 키스'

    유다 배신의 입맞춤을 그린 그림 중 가장 유명하다.(☞ '지오토 디 본도네의 예술 세계')



    마지막 세번 째로 악명 높은 일화는 수백 년 동안 유다의 일생을 3부작 드라마로 전파해온 기독교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죄 많은 제자가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유다 3부작은 그렇게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피의 밭에서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성 이외에 또다른 볼거리가 있을까.....? 하지만 피의 밭은 섬뜩한 것을 과도하게 좋아하는 일부 사람에게도 그다지 매력적인 목적지는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피의 밭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피의 밭의 '피'는 누가 흘렸을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성 금요일에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가 흘린 피일까? 아니면 스승을 배신한 다음 자살한 유다의 피일까....? 이렇듯 모호한 역사적 근거에 더해, 하켈다마의 정확한 위치 또한 전해져 내려올 뿐 결코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그 하켈다마는 예루살렘의 봉우리와 골짜기가 가로지르는 어지러운 협곡에 위태롭게 자리한 힌놈 골짜기에서 다시 남쪽에 있는 황량한 산비탈에 위치해 있었다.....


     

    유다 죽음의 장소로 추정되는 하켈다마

    하켈다마는 '피 밭'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유다의 피로 생각돼지만 마태복음의 저자는 그것이 예수의 피라 힘주어 말하고 있다.(마태복음 27: 3-10) 유다는 그 죽음마저도 설명이 어렵다.


    하켈다마의 한 그루 나무

    피터 스탠퍼드는 이 나무에 대해 이렇게 명상한다. '아니, 어쩌면 저 나무는 유다나무일지도 모른다. 분홍색 꽃이 피는 박태기나무는 유다가 목을 맬 때 밧줄을 묶었던 나무라고 해서 유다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 물론 이 또한 누군가 꾸며낸 얘기겠지만....'


    하켈다마 계곡

    피터 스탠퍼드가 전하는 전승에 따르면 이곳은 예수가 체포되고 부활할 때까지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이라 한다. 하지만 하켈마다는 한 해 350만 명이 찾는다는 성지순례 코스에서도 배제돼 있으며 표지판조차 없다고.....



    하켈다마의 19세기 사진


    유다 죽음의 또 다른 장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통치할 당시(1099~1187)의 예루살렘 교회 주교 윌리엄은 회고록에서 유다가 이 아치형 석탑에 목을 메 죽었다고 밝였다. 하지만 피터 스탠퍼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의 죽음 이후 수 세기 동안,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에서 4대 복음서에 기록된 여러 장소를 무작위로 골라냈는데, 모든 장소가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켈다마의 수도원

    피터 스탠퍼드는 하켈다마가 유다 죽음의 장소가 된 것은 '예루살렘 증후군'의 결과라고 말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놨다. '예루살렘 증후군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있어 자주 나타나는 증세로, 평상시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오면 종교적 망상에 사로잡혀 경전에 나오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는 현상을 이른다. 예를 들어, 나는 수도원이 아닌 다른 곳을 방문해서도 성경에 예수가 이런 기적을 행했던 곳이라 전해지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평범한 바위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으로 어루만지곤 했다. 여기에 2000년 전 예수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기왕 이렇게 시작되었으니 유다의 죽음부터 이야기를 풀어야 겠다. 잘 알려진대로 가룟 유다는 예수의 죽음 직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신이 받았던 돈을 성소에 던져놓고 스스로 목을 매 죽는데, 마태복음에는 그 상황이 꽤 상세히 기록돼 있다.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마태복음 27:3-10)


    유다가 예수를 밀고한 뒤 결국 자살을 한 위의 이야기는 목사님들 설교의 단골 소재 가운데 하나인데,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아가 목사님들은 이것이 구약(예레미야서와 스가랴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언의 실현이었다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를 목청껏 부르짖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그런 못된 장난을 친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예레미야서 중에 그런 말이 대체 어디 써 있는지 모르겠다.


    억지로 갖다붙이자면 스가랴서의 내용이 조금 더 가깝기는 하다. 한데 그것 역시 유다의 죽음과 연관시키기는 다분히 억지춘양이다. 따라서 목사님들은 구약의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마태복음에 그런 얘기가 써 있으니 당연히 그러려니 생각하고(혹은 예레미야서와 스가랴서의 내용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근거없는 설교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 성서학자들이 마태복음과의 연계를 주장하는 예레미야서의 내용은 BC 586년 신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였을 때(☞ '느부갓네살 왕과의 수싸움에서 밀린 여호와') 식량난으로 인해 행해진 식인(食人) 행위를 계고하기 위한 비유에 불과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예레미야 19:1-13)


    즉, 당시 포위된 예루살렘 성의 식량난은 제 자식과 부모를 잡아 먹을 만큼 절박했는데,(예레미야 애가 2:20, 4:10, 에스겔 5:10) 여호와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싶어 그에 대한 경고를 토기장이의 그릇에 비유해 한 것이었다. '토기를 한번 깨면 다시 붙일 수 없다. 그런 짓을 계속하게 되면 내가 이 성과 백성들을 먼저 무너뜨려 (도벳에) 매장할 자리도 없을 만큼 죽이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마태복음의 내용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단어라곤 '토기장이'와 '힌놈'(하켈마다와 가까운 골짜기≒피밭)이란 지명 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이 유다의 죽음과 대체 어떤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그가 워낙에 악인인지라 사람 고기를 뜯어먹었을지 모른다는 소린가....?)

     

    내가 억지춘양이라고 한 스가랴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해도 무방할 듯하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내가 또 연합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꺾었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리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스가랴 11:12-14)


    보다시피 여기서도 연관어는 '토기장이'와 '은 삼십 개'일 뿐 유다와 직접적인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오히려 유대교의 세계적인 석학 게자 베르메스는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은 30'은 스가랴의 내용에서 착안한 마태복음 저자의 창작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나는 이런 가상한 노력들을 보노라면 9회 말 투 아웃 상황에서의 스퀴즈 번트, 혹은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의 마지막 찬스에서 상대방 골문을 향해 뛰어들어가는 골키퍼의 절박함이 연상돼 일견 안쓰러움마저 든다.


    *그렇다고 베르메스가 신약성서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니 그는 오히려 실존 예수의 역사적 기록을 찾는데 40년을 투자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영국 뉴 캐슬 대학과 옥스포드 대학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사해사본' 영문판의 최초 출간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유대인 예수'(Jesus the Jew)와 '예수의 복음서'(The Authentic Gospel of Jesus)는 세계적인 명저로, 이중 처음의 것은 '유대인 예수의 종교'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됐다. 지난 2013년 88세로 별세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기록된 유다의 최후는 사뭇 달라 위와 같은 비교 노력을 힘 빠지게 만든다. 우선 '피 밭'에 대한 설명이 판이한데, 마태복음에서의 '피 밭'은 배신의 댓가로써 치러진 돈으로 (유대 성직자들이) 산 땅이므로 따라서 그 피는 예수의 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 밭을 유다 스스로 샀고 거기서 배가 터져 피를 흘렸으므로 '피 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사도행전 1:10-20)


    또 보다시피 죽음의 과정도 다르니 마태복음에서는 스스로 목을 매 죽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원인 없이) 갑자기 곤두박질처져 내장이 흘러나올 정도로 배가 터져 죽는다. 어느 것이 옳은 기록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고, 이로 인해 두 내용은 함께 허구로 비판받기도 한다. 두 내용이 너무 상이한 탓이니, 이쯤되면 유다가 조용한 곳에 가서 천수를 누렸다 우겨도 할 말이 없다.(시편에 기록됐다는 관련 내용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시편 109편이 바로 그 내용이라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유다의 죽음과 연계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어찌됐든 그간 두 기록을 합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었을 리는 없었을 터인데, 워낙에 상이한지라 결과물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초기 교회의 히에라폴리스(지금의 터키 파묵칼레) 주교였던 파피아스가 기막힌 묘안을 찾아냈다. 유다가 목을 매 죽으려 했으나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그만 실패하고, 나중에 밭을 산 후 그 안에 들어갔던 악마가 빠져나오며 배가 터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일반적 생각으론 묘안이 아니라 도무지 꺼리도 안 되는 엉터리 공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은 이후 정설처럼 받아들여졌고, 나아가 '혹시 내 몸 안에도 악마가....?'라는 자기 의심 신드롬을 만들어내 똥을 싸고 그것을 확인해 보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파피아스가 자신의 책 '주님의 말씀 해석'*에서 '유다가 똥을 누면 그의 몸 속에 사는 악마의 고름과 벌레가 함께 나왔다'다 씀으로써.... 갑자기 우웩! )


    * Expositions of the Sayings of the Load.  예수 생전에 그를 만나 본 사람들로부터 채록한 5권의 책이라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다른 문헌에 삽입된 이야기들만 전한다.


    더 웃기는 이야기도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생전에 그와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고 그를 옹호하였으며, 또 사후 장례까지 치러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온다.(3:1-21, 7:51, 19:39) 바로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디고데모복음서'라는 외경이 있는데,* 거기에서 유다는 자신이 예수를 판 일에 몹시 불안해 하며 자살까지 마음 먹는다. 그러면서 자기 와이프에게 '예수가 사흘 후 부활해 자신 부부를 위해(危害)하리라' 말하는데, 그때 바베큐 치킨 요리를 만들던 부인은 그런 염려가 가당치 않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예수가 다시 살아난다는 건 여기 이 닭이 살아 울음소리를 내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예요." 그런데 그 순간 닭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세 번 운다.(이건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배신할 때 들었다는 닭울음 소리의 패러디가 틀림없겠지만 이 또한 엽기적이다) 낙담한 유다는 다음 장에서 결국 목매 자살한다.(재미있쥬? 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세 번 꼬꾸라졌시유 )


     * 앞에서 말한 유다복음서에 시기적으로 뒤지는 4세기 경의 외경으로, 내가 보기는 외경이라기보다는 위경(僞經)에 가깝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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