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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마복음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5. 24. 06:01


    도마복음이 포함된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지에 대해서는 앞서 '고대의 엑스 파일, 유다복음서'의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그 문서들은 유다복음서와 달리 발견의 경위가 명확하니, 나그함마디에 속한 알 카스르(Al Qasr) 마을의 무함마드 알리 알 삼만 가족이 1945년 12월 8일, 사바크라는 암석 비료를 캐기 위해 곡괭이질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 이 문서들은 대부분 2~3세기 경의 기독교 텍스트로, 초기 기독교의 형성 과정과 계보, 그리고 그들의 사상을 짐작케 해줄 수 있는 귀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가족이 이 문서의 가치를 알 리 없을 터, 일부는 불쏘시개로 쓰였고, 일부는 동네의 콥트 교회(이집트 내의 기독교회)의 수도사에게 넘겨졌으며, 일부는 알 카스르의 불량배였던 애꾸눈 바히즈 알리의 손에 넘어갔다. 알리는 그것을 케나(Qena. 나그함마디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의 자키 바스타라는 골동품상에 헐값에 넘겼는데, 자키 바스타는 다시 이것을 카이로의 골동품상 포키온 타노에게 팔았다. 타노는 한눈에 그 가치를 알아보았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팔자가 사나워지는 순간이었다.



    나그함마디의 위치


    무함마드 알리 가족(가운데 세 사람)

    사진 중앙이 무함마드 알리 알 삼만이나 실제 발견자는 동생인 알 마지드로 알려졌다.


    무함마드 알리 알 삼만

    나이 들어 찍은 사진으로, 문서는 왼쪽의 아이들만할 때 발견했을 것이다. 아이들 뒤로 발견지인 게발 알 타리프 산이 보인다.


    알 카스르 마을 전경

    최근 사진으로, 무함마드 알리가 어렸을 때는 이보다 훨씬 작았을 것이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곳

    문서들은 알 카스르 마을에서 3km 떨어진 이곳 게벨 알 타리프 산 중턱에서 항아리에 담겨진 채로 발견됐다.



    발견된 나그함마디 문서

    파피루스 코덱스의 형태로, 13개 코덱스 52개 문서로 이루어졌다.


    코덱스 표지의 가죽 장정(오른쪽은 실물)


    코덱스의 제본 형식(위쪽은 실물 표지)


    코덱스는 오늘날 책 형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도마복음

    앞서도 말했듯 이중 도마복음은 훼손되지 않은 거의 완형으로 발견된 유일한 책이다.


    발견 당시를 재현해 보이는 무함마드 알리(검은 모자 쓴 사람)

    문서 항아리는 사바크라는 돌을 캐다 발견됐다. 사바크를 분쇄시킨 가루가 비료로 쓰인다.



    타노는 그것을 바히즈 알리가 무함마드 형제에게서 구해온 나머지 문서와 함께 다시 이탈리안 수집가인 마리카 다타리라는 여성에게 고가에 밀매했다. 이 엄청난 문서를 손에 쥔 다타리는 이제 그것을 가지고 몰래 이집트를 벗어날 일만 남은 셈이었는데, 갑자기 사정이 급변했다. 최초 발견자인 무함마드 알리 형제에게 문서의 일부를 넘겨받았던 콥트 교회의 수도사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나머지 그것들을 이집트 경찰에 신고했고, 이에 문서 전체를 찾으려는 이집트 경찰들의 수사가 시작되게 된 것이었다. 르 몽드 지 카이로 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 것도 그즈음이었다.(1949년 6월 10일)


    이집트 정부는 이 귀중한 문서를 입수하고자 계속해서 노력 중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문서는 지금까지 이집트 땅에 묻혀 있다 발굴된 유물 가운데 가장 대단하다 할 수 있으며, 그 학술적 가치에 있어 투탕카멘 왕의 분묘를 비롯, 여타 놀라운 발견을 능가한다고 한다.


    겁에 질린 다타리는 고민 끝에 1952년 그 문서들을 경찰에 넘겼다.(다타리는 그 대가로 10만 파운드를 요구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소송을 제기했으나 결국 패소하고 말았다) 이 문서가 제 2 코덱스와 제 7 코덱스로, 오늘 말하려고 하는 도마복음은 제 2 코덱스 속에 있었다. 기타 유럽으로 빠져나간 제 1 코덱스(이른바 융 코덱스; 심리학자 칼 융이 구매를 강력히 청원하고 이를 이집트에 반환했던 관계로)를 비롯한 다른 코덱스(브루키아누스 코덱스 등)들의 유전(流轉)과 그 문서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의문의 죽음(이른바 '예수의 저주')도 대단히 흥미로우나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겠다.



    호메로스 흉상 앞의 칼 구스타프 융(1875-1961).

    융은 코덱스의 일부가 유럽으로 흘러 들어온 것을 알고 그것을 독자가를 통해 구매하게 해 결국 카이로 콥틱 박물관에 안착시킨다.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우스'가 인류 공동의 옛날 이야기인 것처럼 이 코덱스의 영지주의 사상이 단순한 기독교 외경 속의 내용이 아닌 인류의 가장 심오하고 보편적인 집단무의식의 표출이라고 설파했다.



    (믿을 바는 못 되지만) 유럽 각지에서 순교한 예수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도마는 인도로 갔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없고 전승(傳承)마저 박약함에도 이와 같은 얘기가 떠도는 것은 필시 도마복음의 신비로운 내용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과거 '도마복음서'보다 '도마 유년기 복음서'라는 외경을 먼저 접했는데, 거기서 보여주는 어린 예수의 놀라운 기적(성인 예수는 저리가라이다)에 속된 말로 '맛이 가서' 이후 외경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외경에 관심을 둔 것은 2006년, 앞서 말한 '유다복음서'가 세상에 나온 이후였다. 그것의 참신한 내용에 자극을 받았음인데, 그래서 관심을 두고 보게 된 것이 도마복음서였다.(거의 완전하게 보존된 때문인지 국외에는 영어와 독일어 판 등의 번역본이 많이 나와 있는데, 국내에서는 도올 김용옥의 '도마복음 한글역주'가 유일한 듯하다)


    그러면서 깨우치게 된 일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 째는 AD 367년 이전에는 정경과 외경의 구분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오늘 날의 정경은 그 무렵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한 여세를 몰아(☞ '본디오 빌라도의 억울한 누명') 세상에 떠도는 성서 중에서 제 입맛에 맞는 27권만을 추려(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우긴 했지만) 이것을 기독교의 공식 신약성서로서 공표를 한 것이었다.


    이제 기독교계의 1인자가 된 자신으로서 뭔가 정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인데, 이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은 카논(정경)이 됐고 나머지 것들은 아포크리파(외경)가 됐다. 외경이 다른 계열의 신자들이(정통 크리스트파가 아닌) 보던 텍스트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부가적으로 얻은 깨우침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경=정통 크리스트 교도의 경전', '외경=영지주의자 등 비주류의 경전'이라는 등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드로 대성당 남쪽 콜로네이드의 아타나시우스 상(화살표)


    아타나시우스 상의 근접 사진

    그렇다고 아타나시우스가 권력의 정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니, 그 또한 새로운 황제의 입맛에 따라 파면과 복직, 추방과 복권이 반복되는 파란만장의 삶을 살았다. 당시는 교황권(圈)의 세력이 황제권을 굴복시키기 전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이 정경으로 선포하지 않은 모든 기독교 텍스트에 대한 폐기를 명하였다.(이건 개인적으로 잘했다고 본다. 나눠봐야 괜한 혼란거리만 제공할 터인즉) 그리하여 '진리의 서', '베드로복음서', '요한 비밀의 서', '야고보 비밀의 서', '베드로 묵시록', '도마복음서' 등의 중요 경전이 모두 폐기 처분되었다.


    ~ 구약의 외경이 정리된 건 1564년 4월 8일에 있었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의 일로, 이때 '70인역 성서'에 포함됐던 책들마저 제외됐는데,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를 대부분 수용해 '토빗기', '유딧기', '마케베오 상권', '마케베오 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의 7권을 정경에 포함시켰다.(신약의 '요한계시록'은 시류에 따라 들락날락하다 지금은 신구교에서 모두 정경으로 채택됐다)


    나그함마디와 콰라라 등지에서 발견된 성서편들은 모두 이때 폐기된 것이었다. 이중 나그함마게벨 알 타리프 산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위 문서는 그 출처가 거의 확실하니, 그것은 인근의 파코미우스 수도원으로부터 온 것들이었다.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초기 기독교의 수도사였던 파코미우스가 창설한 수도원(작금의 모든 수도원의 원조)으로 엄격한 계율로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수도원이었다.


    하지만 그 수도원도 역시 아타나시우스의 명령을 따라야 했던 바, 지정 목록에서 제외된 모든 텍스트들을 가까운 게발 알 타리프 산에 갖다 묻게 된 것이었다.(아마도 수도사들의 힘든 결정이었을 것인데, 그것이 1600년 이상 묻혀 있게 될 줄은 그들 중의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파코미우스(280-346)


    천사에게 계율서를 받는 파코미우스

    훗날 저명한 성서 번역가 제롬(347-420)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기도 한 수도원의 콥트어 계율서는 천사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 하여 성서와 동일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으며 누구든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계율이 됐다.



    파코미우스가 설립한 타벤니우스 수도원의 유지


    파코미우스 11개 수도원의 본부가 있던 파우 키블리(Faw Qibli) 

    2007년 이곳을 방문했던 도올 김용옥이 신비스러운 기운 운운했던 곳이나 지금은 쓰레기로 너저분하다.



    지금까지 이상의 문서들은 모두 영지주의자들의 문헌으로 알려져 있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어로는 그노시스(Gonosis)로 '통찰'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앎'이란 뜻의 gnostic이 '영지(靈智)'로 번역되는 바람에 신비를 좇는 사람들이란 인식을 주게 되었으나 그들 그노시스파의 궁극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지식과 지혜에의 지향이었다.(일본에서는 오히려 원어대로 구노시스·グノ―シス를 채택했다)  AD 140~160년 터키 지방에서 활약했던 그노시스파의 테오도투스는 영지주의자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정의하였다.

     

      "우리가 누구였고, 무엇이 되었으며, 어디에 있었고.....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무엇으로부터 풀려나고 있으며, 탄생이란 무엇이고 갱생이란 무엇인가를 깨달은 사람이다."


    대표적 영지주의자로 알려진 모노이우스의 글에서는 그들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신이라든가 창조, 그 비슷한 문제들에 대한 연구는 이제 그만두도록 하라. 네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을 찾으라. 네 안에서 모든 것을 신으로 만들고 '나의 신,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몸'이라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깨달으라. 슬픔, 기쁨, 사랑, 증오의 원천이 무엇인지 깨달으라..... 이러한 문제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나면 너는 바로 네 안에서 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테오도투스와 모노이우스의 글은 작가 일레인 페이절스의 'The Gnostic Gospels'에서 따옴.


    이상을 보면 그들은 철학자이지 신에 목메는 신앙인은 적어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즉 '정립되지 않은 기독교 초기 시절, 기독교의 한 분파를 형성했던 신비주의 계열의 종파'라는 상식과 달리 기독론자가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 유행했던 신 플라톤주의(Neo-Platonism) 계열의 철학자처럼 여겨진다.(실제로 나그함마디 문서 중에서는 플라톤의 저서 '국가론'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은 신 플라톤주의자와 영지주의자들 간의 논쟁을 근거로서 그들이 같은 계열의 학자가 아님을 밝히고 있는 바, 나의 단견을 밀어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게발 알 타리프에서 발견된 문서들이 영지주의자의 것이 아니라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보던 책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아타나시우스의 폐기 명령에 의해 땅 속에 보관됐다는 사실이다. 즉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지금의 기독론자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관점으로 훨씬 더 많은 책을(훗날 정경에 포함된 27권을 포함한) 들여다보며 고민했다는 것이다.(물론 그중에는 영지주의자들도 포함됐을 것이다)


    혹자는 초기 기독교에서 정통 기독교도(크리스티아노스)의 최대의 적은 아리우스파가 아니라 그노시스파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내가 볼 때 이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영지주의자들은 구도자(求道者)일 뿐 기독교의 일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구도의 일환으로 기독교 계열의 문서들을 보았던 것뿐인즉, 따라서 나그함마디 문서가 영지주의자들의 책이란 분류 또한 옳지 않다. 물론 출발선과 지향점은 다르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도올 김용옥의 생각과 일치된다.('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나라에서 도마복음의 최고 권위자라 자부하는) 도올의 도마복음 해석 역시 방향성을 잃고 있다.('도마복음 한글역주') 이 짧은 지면에서 그의 주장을 단편적으로 반박함은 도리가 아니겠기에 일일이 거론하지는 못하겠지만, 도올의 도마복음 해석에 있어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콥트어를 모른다는 데 기인한다. 물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솔직히 그래서 할 말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주장하는 바는 적어도 이렇다. 도마복음에 숨어 있는(사실 숨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주론적 색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도마복음은 앞으로도 계속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해석으로 일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도올의 기독교 논리를 한꺼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이 그의 색신(色身, Historical Jeus)과 법신(法身, Jesus of Faith)론이다. 그의 설명을 따르자면 색신이란 (예수의) '역사적 실존성'을 가리키는 것이요, 법신이란 '진리의 구현체로서의 존재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는 기독교의 문제점이 법신 예수는 모르고 색신 예수에게만 집착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 이렇게 침을 튀긴다.(참고적으로 말하면 그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한 인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심각하게 봉착한다. 그러나 사실상 십자가에 못박혀 있던 인간이 무덤 속에 가사상태로 사흘정도 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현대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예수가 실제로 죽었다 해도,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은 얼마든지 초대교회의 제자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날조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픽션이 순식간에 퍼져 당대의 사실로 확정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쉽사리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상식적이고도 건강한 논변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입에 답지 못할 이단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해결은 바로 색신과 법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케리그마는 색신의 사실이 아니라 법신의 사실인 것이다. 예수의 법신이 죽었다 살아나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 논변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은 믿음의 사실이요, 종교적 진리의 사실이다. 기독교가 색신과 법신을 애초부터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혼동이 생기고 오히려 법신의 신화라는 미신만을 낳게 된 것이다. 예수의 색신에 집착하고 있는 뭇 중생들에게 목사들은 불행하게도 상식에 어긋나는 쌩거짓말들만 씹어뱉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색신과 법신을 분리한다면 예수의 부활은 "미륵불의 하왕생"보다도 더 리얼한 진실일 지도 모른다.('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중에서)


    이와 같은 사고를 가진 자의 해석은 기실 끝까지 읽지 않아도 뻔하다.(최근 '도올의 도마복음 한글역주' 3권이 또 나왔다) 무지무지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교조적이며, 또한 일방통행할 것이다.(그가 꼽트어를 알건 모르건, 예수의 부활을 믿건 안 믿건 무조건 그렇게 달릴 것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돈키호테가 존재하기에 나 같은 놈도 (남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나름대로의 이론을 떠들며 살아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이론은 옳고 그름을 떠나 너무 어렵다. 아울러 너무 독선적이다. 


     
    * 역사적 도마복음의 진실 찾기

    나일 강에 비친 게벨 알 타리프 산


    게벨 알 타리프 산의 일몰

    "햇빛에 바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이 도마복음에도 통용되는 듯.




    나그함마디에서 보이는 나일 강과 게벨 알 타리프 산


    NASA 인공위성이 찍은 나그함마디 일대 사진(화살표가 도마복음이 발견된 곳)


    제 발견자인 아부 알 마지드의 사진

    물론 이 사진도 성인이 되었을 때 찍은 것이다.



    도마복음은 게벨 알 타리프 산 절벽 밑에서 이와 같은 구덩이를 팔 때 아부 알 마지드 소년의 곡괭이 끝에 걸렸다.


    구글 맵으로 본 나그함마디 마을()과 게벨 알 타리프 산()


    발견 당시의 도마복음


    도마복음 속의 114개 예수의 말씀은 지금은 모두 번역돼 출간되어졌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진실은 아직 무엇인지 모른다. "네 안에 있는 것을 내놓으면 네가 내놓은 것이 너를 구원하리라. 그러나 네 안에 있는 것을 내놓지 않으면, 네가 내놓지 않은 것이 너를 파멸시키리라." 번역은 분명 이러한데 그 해석은 저마다 다른 도마복음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나? 정말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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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