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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라진 북경원인(北京猿人)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9. 7. 16:01


    아시아의 고대 인류 북경원인(北京原人)은 지금은 베이징 원인(Beijing Man), 혹은 페킹 맨(Peking Man)으로 더 많이 불리나 뉘앙스는 북경원인이 더 잘 어울린다. 아마도 우리에게 친숙한 탓이리라. 그런데 이 고대 인류의 정식 명칭은 이상의 것이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 페키넨시스(Homo erectus pekinesis)이다.(북경에서 살던 직립 인류라는 뜻으로 호모 에렉투스의 아종으로 분류된다) 그들이 살던 시기는 75~25만 년 전으로 유럽의 네안데르탈인(40만년~3만년 전)보다 훨씬 앞섰으면서도 도구와 불을 만들어 사용했던 똑똑한 원시인이었다. 



    북경원인의 위치


    북경원인의 생김새(현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경원인이 처음으로 존재를 드러낸 것은 두개골이나 턱뼈, 기타 골격뼈로서 그 존재를 알리는 다른 화석들과 달리 2개의 치아 화석으로부터였다. 당시 중국 원세계(위안스카이) 정부의 채광(採鑛) 기술 고문으로 와 있던 스웨덴의 지질학자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1894-1960)은 1923년 북경 계골산 채석장에서 발견된 2개의 어금니 화석을 수상히 여겼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오토 즈단스키의 도움을 얻어 이것들이 네안네르탈인에 앞서는 고대 인류 호미니드의 치아 화석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1926년 서구 학계에 보고했다.


    이 일은 큰 화제를 불러 모았으나 학계의 확실한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발견된 화석이 치아 부분에 국한된 데다 아시아에서 그렇게 오래된 인류가 생존했다는 것이 차마 믿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 와중에서 북경협화의학원(協和醫學院)의 해부학 교수이자 인류학자였던 미국인 데이비드 블랙은 그것이 50만 년 전에 생존했던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는 소신을 지켜냈고, 그의 소신은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유럽 인류학 연구에 밀려 있던 미국이 이를 기화로 적극적인 연구 지원에 나선 것이었다.


    그 정점에 일어난 사건이 1929년 중국지질연구원의 신임연구원 페이원중(裵文中, 1904-1983)이 계골산 인근의 주구점(周口店, 저우커우텐) 동굴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의 두개골 상부 화석을 발굴해낸 일이었다. 용적 1,000㎤에 달하는 이 새로운 인류 화석은 평균용적 1,350㎤의 두개골을 가진 현대인의 조상으로 여기는 데 불편함이 따르지 않았던 바, 이상의 화석들은 서구 학계의 논쟁을 종식시킴과 함께 시난트로푸스 페케넨시스라는 학명이 붙여졌다.(이것은 거의 데이비드 블랙의 공적으로 보아야 옳을 터, 그는 생업과 병행했던 북경원인 연구로 인한 과로로써 1934년 41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페이원중(가장 왼쪽)과 데이비드 블랙(오른쪽에서 세번째)


    북경원인의 두개골

    실종되기  전 중국지질연구소의 후청지(胡承志)가 복제해놨던 것임.


    페이원중이 발굴한 북경원인의 두개골

    주구점 북경원인 발굴지 지도



    주구점  입구


    북경원인이 발견된 원인동굴 입구


    북경원인이 발견된 지점

    1929년 12월 2일 페이원중은 원인동굴 지하 30m를 굴착해 북경원인의  두개골을 찾아냈고,


    1935년 인근 산정동굴 등에서도 호미니드 인골 7구를  발굴해냈으나.....



    페이원중의 발견은 귀중하며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이에 주구점 일대에서는 국내외 학자들의 발굴 붐이 일었고 그 결과 1933-36년 인근의 산정동굴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의 두개골 3개를 포함한 원시 인류 화석과 다량의 포유류 화석이 발견됐다. 하지만 발굴은 1937년 7월 7일 이후 급작스럽게 중단되야만 했으니 당시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이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일으켜 북경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이른바 제 2차 중일전쟁의 발발이었다.



    노구교 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

    1937년 7월 7일 밤, 일본은 북경 교외의 노구교에서 무력 충돌을 도발해 이를 빌미로 본토 침공 전쟁을 일으킨다. 노구교를 건너는 일본군 사진을 볼 수 있다.(기사 왼쪽)


    노구교 전경

    마르코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극찬한 이곳에서 주구점은 멀지 않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발굴은 중단되었지만 고대 인류에 관한 연구는 북경 협화의학원 내에 설치된 신생대연구실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그곳이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 하에 있었으므로 일본도 감히 어쩌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니 일본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이제 북경 협화의학원도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이 이 유물이 노리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상황은 다급히 전개되기 시작했다.(북경원인은 일본인의 조상이 될 수도 있으므로 실제로 이를 빼앗으려는 천황 명령의 작전이 결행되었다) 


    이에 관계자들은 주구점 유물의 처리를 놓고 장장 11시간의 마라톤 회의를 가졌고, 그것들을 뉴욕 자연사박물관에 보관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다.(처음에는 장개석 행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옮기는 안이 유력했으나 안전상의 이유로서 결국 미국으로 선회했다) 유물들은 곧 2개의 상자에 정성스럽게 담긴 후 협화의학원 금고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2년 12월 5일, 운송을 맡은 미 해병대가 도착하자 금고가 열려졌는데, 그런데 이게 웬 일? 당연히 있어야 할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페이원중이 불과 일주일 전까지도 금고 안에서 보았다고 한 유물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당시의 북경 협화의학원 



    구점 유적전시관 내의  복원된 상자

    설명문에 1941년 북경원인의 뼈를 마지막으로 포장해 넣었던 후청지(胡承志)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북경 협화의학원 전경

    개원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병원으로 '아Q 정전'의 작가 루쉰도 의사로서 이곳에 근무했다.

     


    이 사라진 보물에 대해 세계는 그것이 나타났을 때 만큼이나 경악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으니, 사라진 유물들은 세상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실종 유물에 관한 여러 설이 난무했는데,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설은 유물이 북경 협화의학원 금고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미 해병대에 인도되었고,(앞의 금고 이야기는 미국 관계자의 책임회피용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발해만의 진황도(秦皇島) 항구까지 옮겨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것이 1941년 12월 7일로 일본이 하와이를 공습한 날이었고, 일본군들은 그와 동시에 북경, 천진, 진황도의 미국 시설들을 모두 점령하였던 바, 미 해병대원들은 이때 진황도에서 일본군에게 유물들을 압수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유물들은 일본이 가지고 있을까? 그에 대한 옛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가 비교적 최근인 2006년 1년 '아사히 신문'에 실렸다. 이 보고서는 북경의 일본군 헌병대장이 상해(上海)에 있는 헌병대 사령부로 보낸 것으로, 그 보고서에는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북경 협화의학원 병원금고를 수색했으나 북경원인의 화석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었다. 아울러 신문 기사는 이 화석이 일본 본토 내에 들어왔다는 어떠한 기록도 찾을 수 없다고 했는데, 대신 1942년 진황도에서 대만으로 향하던 일본 군함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침몰된 사건과, 이를 인양하려 했던 일본 해군의 행동을 주목했다. 이 유물을 실은 배가 침몰되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주구점 일대에서는 또 다른 북경원인을 찾으려는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세계 원인(原人) 화석의 3분에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의 화석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100만 년 전의 호모 에렉투스 페키넨시스로부터 호모 사피엔스(산정동인)에 이르기 다양해 이곳 주구점이 고대인의 집단 취락지로서 오랫동안 이어져 왔음을 증명했다.(이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주구점 유적은 1987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여기서도 반전이 있었으니 북경원인을 물론이요, 현생 인류의 상동인의 유골에서도 원(原)중국인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DNA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주구점 유적전시관

    입구에 북경원인의 얼굴을 복원해놨다.


    주구점 출토 북경원인 두개골

    1945년 이후 주구점에서는 어린이 15명을 포함한 총 40구의 화석이 발굴됐다. 

     

    산정동인의 화석

    산정동굴에서 발견된 이들 화석 중에서도 원(原)중국인의 것은 없다. 산정동인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크게 몽골형, 에스키모형, 멜라네사아 형으로 나뉘는데, 몽골형은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과 가깝다.


    주구점 발굴의 어제와 오늘



    주구점발굴의 어제와 오늘. 지금은 이와 같은 발굴 장비를 사용한다.

     

    불의 사용을 수십만년 끌어올린 북경원인


    25만년 전으로 보낸 엽서



    혹시 만리장성 지키는 용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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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