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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엑소더스,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I)
    성서와 UFO 2019. 9. 15. 21:25


    연휴가 시작됨과 동시에 작심하고 엑소더스(Exodus, 출애급기)를 비롯한 펜타튜크(Pentateuch: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다시 읽었다. 목적은 출애급(出埃及), 즉 히브리인들의 애급(이집트) 탈출에 관한 진위 여부를 종결시켜보자는 의욕에서였다. 내가 전에 이에 대해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심도 있게 다룬 편이다.(☞ '호렙 산의 UFO/모세를 속인 여호와의 절묘한 트릭''엑소더스 당시의 UFO/여호와는 정말 바다를 갈랐을까?' 등에서)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세의 출애급을 사실로써 서술한 펜타튜크의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했을 뿐 진실 자체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로 작심하고 그에 대해 규명해 볼 생각이었다. 한 마디로, 모세가 이끈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밝혀보자는 것이었다.



    ※ 우리나라 교계에서는 애써 모른 척하고 있지만 사실 출애급은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거짓 쪽으로 기운 일이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에 매달리는 이유는 출애급기에 그 존재를 극명히 드러내는 UFO에 대한 미련 때문이리라.



    모두 다 아다시피 출애급에 관한 기록은 오직 성서에만 있을 뿐, 이집트를 비롯한 주변 어떤 나라의 기록에서도 그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다. 그래서 출애급기의 내용은 지끔껏 그 진위를 의심받아 왔는데,(출애급기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나아가 여호수아까지 전부 도미노 현상으로 쓰러지게 된다) 텔아비브 대학의 이스라엘 핀켈스타인 교수는 '역사적으로 그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말하는 이유 역시 똑 같다. 성서 외에는 그같은 일을 증명할 역사적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출애급의 무대가 되는 시나이 반도는 1967년 제 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15년 간 점령한 적이 있었고, 이때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은 그 땅을 이잡듯 뒤진 적이 있었다. 물론 출애급의 역사적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말한대로 그들은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찾은 것이 없었다.(☞ '여호와는 왜 모세를 죽이려 했을까?'/'사사기 바로보기 - 입다의 딸은 어떻게 됐을까?') 따라서 핀켈스타인이나 닐 아세르 실버만 등의 학자가 주장하는 출애급 위작(僞作)설은 사실로 인정받아 마땅한 것일지도 모른다.*(물론 이에 저항하는 학자들도 만만치 않으니 다니엘 모세 레비와 죠셉 로스타인 등이 대표적이다) 


    * 시나이 반도는 면적 61,000㎢의 그리 넓은 땅이 아니기에.(남한의 3/5 정도)

     

     

    엑소더스의 허구성을 파헤친 책 '바이블 발굴'. 핀켈스테인과 닐 실버만 공저


    보수 신학계의 골칫거리, 이스라엘 핀켈스타인과 닐 아세르 실버만(오른쪽)


    2018년 11월 9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이스라엘의 청동기 시대에 관해 공개강의를 하는 핀켈스타인. 그는 엑소더스는 물론이요 다윗 왕국의 존재까지도 부정했다.(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그 즉시 해고?)



    핀켈스타인은 고고학적 근거를 두고 주장하는 것이겠지만, 내가 출애급에 의심을 갖는 이유는 그저 단순하다. 위에서 언급한 시나이 반도의 면적이 히브리인들이 40년을 유랑하기에는 턱없이 협소하다는 것이다. 그곳을 횡단하는 데는 버스로 6시간 걸린다고 하니 걸어 가면 보름 정도가 소요될 텐데, 출애급의 가장 긴 코스인 아래의 전통적 경로를 택한다 하더라도 한 달 남짓일 것이며, 여기에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머문 40일을 포함하더라도 석 달이면 가나안에 입성해야 옳다.


    또 아무리 여호와가 뺑뺑이를 돌렸다 해도 1~2년 정도면 대강의 지리를 터득할 수 있었을 터, 낮의 무더위와 밤의 맹추위, 배고픔과 질병 속에서 40년을 지냈다는 것은 무엇보다 보편적 상식에서 벗어난다. 출애급이 누군가의 창작이라면 그는 처음부터 무리한 설정을 한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번에도 이상의 의문을 해소할 답을 찾지 못했다.(하긴 남들이 수천년 간 못 찾은 것을 내가 며칠만에 찾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우스운 짓이다) 대신 성서의 불합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바, 오픈된 시각으로 정리한 그 내용들을 의문을 가진 다른 분들과 함께 공유할까 한다. 



    이 거리를 가는 데 40년이 걸렸다고?


    남한과의 크기 비교



    1. 출애급 당시 히브리인의 인구는?


    히브리인들이 애급에 들어가게 된 것은 창세기 말에 등장하는 요셉 때문이다. 제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간 야곱의 아들 요셉은 여호와의 보살핌으로 벼락출세를 하게 되고, 이에 배고픈 요셉 형제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곡창지대인 나일 델타 고센 땅으로 몰려와 살게 된 것이 그 발단이다. 그들 히브리인 이주자들은 요셉이 국무총리를 지낼 때는 당연히 평안했고 요셉의 사후에도 무난한 이민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급을 다스리면서부터 상황이 급변한다. 이집트 내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그 쪽수에 위협을 느낀 새 왕이 그들을 노예로 삼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 요셉 당시 모두 70명이었던 이민자의 수는(창세기 46:27, 출애급기 1:5) 출애급에 임해서는 240만 정도까지 불어나는데,(장정 수 60만x4/출애급기 12:37) 4대(代) 만에 3,400배가 늘어난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엄청난 인구의 증가는 일단 차치하기로 하자.(창세기 15장 16절에서 여호와는 요셉의 자손들이 4대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출애급기 12장 40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 들어간지 430년만에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을 합치시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울러 그렇게 불어난 히브리인의 숫자 240만 명도 뒤로 미뤄놓을 수밖에 없다. 그 수를 믿을 수 없기도 하거니와 이 정도면 당대의 초강대국이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은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파라오)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애급기 1:6-11)



    2.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의 건축 시기는?



    비돔(pithom)과 라암셋(Rameses)의 위치


    비돔의 곡물 창고 유적

    국가 곡물 창고가 있던 비돔 유적은 1882년 영국 '이집트 탐사 재단'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라암셋의 왕궁 유적

    라엠셋의 피-람세스(Per-Ramsses: 람세스의 궁전) 유적은 비돔 발견 뒤 100년이 지난 1987년 독일 고고학 팀에 의해  발굴되었다. 라암셋의 발굴이 늦은 이유는 이 일대가 오래 전 농경지로 변한데다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지하수가 상승한 탓에 물에 짐긴 소택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새 왕이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아 비돔의 곡물 창고와 신도시 라암셋을 건설했다는 위 성서의 문장은 일견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다만 위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려면 한 가지 선행돼야 할 일이 있다. 기원전 1720년 경부터 1570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아시아계 이민족 왕국 힉소스(Hyksos)를 시공간적으로 피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지도에서 보다시피 힉소스 왕국의 수도 아바리스는 비돔과 라암셋의 지척이므로 그곳에 국고성(國庫城)을 만들거나 신도시를 건설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속 시원하게 말하면 이때 이집트 전체는 힉소스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이상의 일은 아예 불가능하다. 따라서 위의 대규모 공사는 시행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기원전 1570년 이후의 왕들 중에서 찾아야 한다.(기원전 1720년 전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으니, 그때는 아브라함의 시기와 거의 맞먹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의 활동 시기는 대개는 기원전 18세기, 조금 더 좁히자면 기원전 1900~1750년까지가 일반적이다. 참고적으로 핀켈스타인이나 닐 실버만은 아브라함의 존재도 부정한다)

     


    힉소스 왕국의 영역



    역사학자들이 손에 꼽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아모세 1세(Ahmose, 재위 BC 1539-1514)이다. 아모세 1세는 이민족 힉소스의 150년 지배를 끝장낸 왕으로, 그는 수도 아바리스를 버리고 도망간 힉소스 왕을 팔레스타인 샤루엔까지 추적해 항복을 받아낸 후 이집트 제 18왕조를 열었다.(출애급기에 나오는 모세가 그의 가문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앞서 '모세를 통한 외계인의 지구 공략 작전- 모세의 출생 I'에서 말한 바 있다)


    물론 아모세 다음 왕인 아멘호테프 1세나 투트모세 1, 2세도 후보에 오를 수 있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라는 문장에는 아무래도 아모세가 어울린다. 요셉이 힉소스 왕조의 치하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면(이 또한 유력한 학설이다) 아모세야 말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에 적합한 인물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유력 후보 아모세 1세는 성서 열왕기의 내용에 의해 배제되어진다.('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라는 문장을 '요셉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새 왕'이라 해석한 글도 보았는데, 이런 식은 정말 피곤하다)



    아모세 1세의 석상


    아모세 1세의 무덤 벽화. 힉소스 군사와 싸우는 모습을 그렸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열왕기상 6:1)


    위 열왕기의 내용에 따르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립한 해는 출애급을 이룬지 480년 후이다. 그리고 성전은 솔로몬 왕 재위 4년째인 기원전 966년에 착공된다. 우리는 이로부터 출애급이 기원전 1445년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 바,(480+966=1446이나 한 해는 겹친다) 그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아모세 1세는 자연스럽게 탈락한다.(갈등거리이긴 하지만 이같은 성서의 절대연도는 무시하기 힘들다)  아울러 이와 같은 산술로 보면 이때 재위하던 이집트 왕을 찾으면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의 건축시기도 파악할 수 있고 출애급의 시기도 알아낼 수 있는 쉬운 게임이 된다.


    당시의 왕을 찾기는 어렵지 않으니 18왕조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재위 BC 1479-1425)이다.[각주:1]  따라서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한 왕은 선왕인 투트모세 2세가 될 터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 역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이번에는 반대로 역사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투트모세 3세가 남긴 아래의 비석들을 보면, 그는 기원전 1445년에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미탄니 왕국과 양국의 사활을 건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 2편으로 이어짐.



    당시의 세계


    투트모세 3세의 석상과 공적비(아래)


             


    1.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 ? ~ 기원전 1425년)는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재위: 기원전 1479년 ~ 기원전 1425년)로, 투트모세 2세의 아들이다. 54년에 달하는 긴 재위기간 중 반에 가까운 21년을 계모 하트셉수트가 섭정이자 공동파라오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투트모세 3세는 시리아, 누비아를 필두로 대규모의 군사 정복을 통하여 이집트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그는 전생애에 걸쳐 17회의 원정을 했고, 그 결과 미타니, 히타이트,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우가리트, 비블로스, 야흐베, 누비아 등을 지배했다.[1][2]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20세기 역사가들에 의해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 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위키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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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