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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의 문' 바벨을 찾아서- 바벨탑의 진실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2. 15. 22:34
     
    앞서도 말했지만 이른바 바벨탑과 연관되어지는 아래 창세기 이야기는 앞 뒤 내용과 연결되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 민족 이동기에 만들어진 신화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바벨은 '여호와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일'과는 무관하니 그 뜻은 '신의 문', 문자 그대로 즉 신과 통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 신과 통할 수 있는 문이 '높은 대(臺)'일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터, 시날 땅 곳곳에 남아 있는 지구라트는 이것이 바로 '신의 문'임을 증명한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로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1-9)


    우르의 지구라트

    우르의 여신인 달의 신 난나에게 바친 지구라트로, 왼쪽 계단에 '우르의 왕 우르남무가 그의 여신을 위해 건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루크의 지구라트

    우루크의 신 에난나에게 바쳐진 지구라트와 에난나 신전의 모자이크 벽돌 장식


    가장 오래된 문자

    기원전 3300년 전의 것으로 쐐기문자의 원형(原形)으로 추정된다. 1928년 우루크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판이다.(루브르 박물관)

     

    니푸르의 지구라트

    수메르의 주신(主神)이며 폭풍의 신인 엔릴에게 바쳐진 지구라트


    엔릴을 모시는 대신전 에쿠르 평면도


    쐐기문자 태블릿

    에쿠르 신전에 봉헌된 품목을 적었다.


    키시의 지구라트



    키시의 도시국가 유적

    수메르 유적 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도시 유적이다.


    에리두의 지구라트


    에리두 지구라트의 벽돌 흔적


    위 지구라트들의 위치



    '신의 문'은 수메르어로는 바빌루(babilru)이며 아카드어로는 밥일리(Bab-ili)이다. 이 단어가 ‘혼란시키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인 발알(Balal)에 연관시킴으로써 위와 같은 성서의 기록이 남겨지게 되었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그 지구라트는 수메르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위 사진에서처럼 각 도시마다 있었다. 수메르에 대해서는 각 지면의 설명이 조금씩, 혹은 크게 다른데, 어떤 지면은 무려 2500~ 3000년의 시대차를 보이기도 한다.(이건 정말 너무해)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그중 가장 타당성이 느껴지는 '위키백과'의 몇 줄을 전재한다.

    수메르(Sumer)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으로 오늘날 이라크 남부 지역이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수메르인은 대략 기원전 5,5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1]


    수메르 문명이 가장 융성했던 때는 기원전 제3천년기로, 역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이 1000년의 기간을 크게초기 왕조 시대(2900?~2350? BC),아카드 왕조 시대(2350?~2150? BC), 우르 제3왕조 시대(2150?~2000? BC)의 세 시대로 구분한다.[2]


    그 후 기원전 2000년 쯤에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 즉 아라비아에서 온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이 수메르 지방을 점령하고 고대 바빌로니아를 세움으로써 수메르 문명은 국가 형태로서는 완전히 사멸되었으나,[3] 수메르 종교와 문화의 흔적이 바빌로니아인 · 아시리아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 및 문화 집단들의 신화와 종교 그리고 문화 속에 남아 있다.


    "수메르인"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카드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을 부르던 말이었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을 웅 상 기가(ùĝ saĝ gíg-ga, 음성학적으로 uŋ saŋ giga) "검은 머리 사람들"[4] 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땅은 키엔기르(Ki-en-ĝir) "수메르 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5][6][7] 이라고 불렀다. 아카드어 "수메르"는 아마도 이것의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왜, 아카드인들이 이 남쪽 땅을 "수메르"[5][7] 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히타이트의 "산하르"(Sanhar)는 모두 "수메르"의 서방 방언으로 볼 수 있다.[5]


    앞서 '바벨탑과 언어혼란의 진실'에서 말한대로 수메르인은 교착어(膠着語)를, 나머지 셈족의 아카드인,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 등은 모두 굴절어(屈折語)를 사용했다.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이 한 민족의 언어란 쉽게 형성되고 변화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그중에서도 특히 어근(語根)과 접사의 결합으로서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교착어(한국어, 일본어, 터키어 등)는 어형과 어미의 변화로서 문장을 만드는 굴절어(영어를 비롯한 거의 모든 유럽나라의 언어)와 언어적 유사성이 전혀 없어 배우려 해도 결코 쉽게 배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처럼 이질적 언어를 쓰는 두 민족 집단이 공동의 목적으로써 한 도시를 건설한다면 그 민족들의 외형의 상이함을 떠나서라도 결코 성사될 수가 없을 터, 그들은 성 쌓기를 그치고 온 지면에 흩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위 창세기의 설화가 형성된 배경에는 북쪽에서 이주해온 여러 언어를 쓰는 여러 민족들과 현지인과의 문화충돌로 보고 있는데, 그 결과 그들은 각자의 언어대로 흩어져 도시국가를 형성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도시들이 생판 다른 언어를 쓴 것은 아니고 수메르어 계통에 속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며, 아무르(아모리) 인을 중심으로 2차 이주민들은 셈어 계통의 말을 쓰는 사람들이 출신지 별로 정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셈어계 이주민들은 수메르인보다 훨씬 늦게 이주한 관계로 두 강 하류의 비옥한 충적토를 차지하지 못하고 시날 땅의 외각에 자리잡게 된다.(BC 2800년경) 그들은 그렇게 수메르인들과 공존했으나 사르곤 왕(BC 2334~2279 재위) 때에 이르러서는 아래 화살표 방향으로의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여 마침내 수메르 전역을 손아귀에 넣고, 전 메소포타미아를 통일시킨다. 사르곤 왕 재위 시절 수메르 문자는 아카드어에 맞게 서체가 고쳐졌다. 두 언어는 대략 1000년 정도 (BC 2800~1800) 같이 쓰여졌으나 결국 수메르어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수메르와 아카드의 도시국가

    인도유럽어족과 셈어족에 속하지 않는 엘람 민족은 수메르인과 동족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한때 언어학자들은 수메르어가 셈어족이 아닌 다른 언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수메르 사람들이 외부에서 침입해온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후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 초기 우바이드기(기원전 5200년~4500년 또는 6090년~5429년)에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한 이후에 문화적인 단절 없이 그 문화가 계속 이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지방에 정착한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풍부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을 경작하였다. 당시에는 강우량이 현재 보다 적었기 때문에, 척박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거주하려 한 모든 인종들의 도전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잘 관리하여 농업용수와 식수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수메르어에는 운하, 제방, 저수지등에 관련된 단어가 많이 발견된다. 수메르인들은 북부지방에서 농업 기술을 습득한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농부들이었다.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바이드 토기는, 북부의 사마라 유적(기원전 5700년~4900)의 토기와 연속성이 발견된다. 사마라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 중류 지방에서 최초로 원시적인 형태의 경작을 시작한 부족들이다. 우바이드 유적과 사마라 유적의 유사성은 라르사 근처의 텔 아웨이리에서 발견된 사마라 토기와 유사한 전기 우바이드 토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북부 지방의 농부들은, 신전 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고,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면서, 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자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터키 남서부 하실라에서 발견된 BC 6000년경의 토기


    사마라 문명(BC 5700~4900) 토기


    우바이드(BC 5500~4000) 토기


    하라프 시기 (BC 5500~4000) 토기


    하라프 시기 (BC 5500~4000) 토기


     

    이상 '신의 문' 바벨을 찾아서' I, II를 정리를 하자면 시날 땅의 바벨탑은 어느 특정한 탑을 이름이 아니라 수메르인, 혹은 아카드인들이 이주 초기에 시행했던 영건(營建) 사업이 현지인과 알력을 빚었음을 말해주는 상징 같은 것이 되겠다. 아울러 바빌론의 나보폴라사르 왕이 만들고 네부카드네자르가 재축(再築)한 바벨탑은 수메르시절부터는 최소 3,000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적 거리가 실재하고 있는 바, 설령 그 탑이 옛 탑을 개수해 지은 것이라 해도 창세기 때의 그것이라 간주하기는 힘들다. 즉 바벨탑은 어느 특정 탑에 대한 지칭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르곤 1세가 출현하기 전까지 그들 도시국가 간에는 전쟁이 없었을까? 없을 리 없었을 터, 아래의 전승비 파편은 기원전 2450년경 라가시 왕 에안나툼이 이웃 도시국가 움마(Umma)에의 승첩을 기념해 만든 것으로 아마도 인류 최초의 전승비가 아닐까 한다. 다음은 당연히 아카드 왕 나람신(Naram-Sin, BC 2254경~2218경 재위)의 전승비가 될 것이다.



    에안나툼 전승비


    나람신 전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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