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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문' 바벨을 찾아서-콜데바이와 에사길라 태블릿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2. 7. 00:40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로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세기 11:1-9)
이번에는 먼저 사진과 바벨탑에 관한 성서의 문장을 올리고 시작했다. 혹시 착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지구라트는 창세기 속의 바벨탑과는 무관한 것으로서, 이란 남서부 후제스탄 주 초가잔빌(Tchogha Zanbil)에 남아 있는 옛 엘람 왕국(BC 3000~BC 639)의 유적이다. 엘람은 우리나라 가야왕국과 같은 부족 연맹체의 다민족국가로서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기원전 1158년경에는 구(舊) 바빌로니아 제국을 침공하여 성문(成文)법전 석주(石柱)를 전리품으로 챙겨 갈 만큼 위력을 떨친 적도 있었다.*
*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바빌로니아의 성문법전, 이른바 함무라비 법전은 엘람왕국이 전리품으로 가져 가 수사(Susa) 지역에 두었던 것을 1901년 고고학자 프랑스 장 뱅상 세유가 발견해 가져온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과의 수싸움에서 밀린 여호와')
** 창세기 아브라함 시대(기원전 1900-1750년)에도 엘람의 이름이 등장하니, 시날(메소포타미아) 왕 아므라벨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 등과 연합해 북벌을 감행,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쳐들어온 것으로 서술돼 있다.(창세기 14장)
그에 앞서서는 기원전 1250년경 운타시갈 왕 때 전성기가 있었는데, 위의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했을 당시 겪은 문화충격으로 그곳의 기술자들을 잡아와 엘람 지역에 재현했거나, 그 당시 북에서 이주해온 선진문명의 사마라 문화(Samarra Culture, 이라크 북부지방에 셈족계인이 이룩한 문명) 사람들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수메르, 그 문명의 새벽을 돌아보다-고대의 민족 대이동')
초가잔빌 지구라트의 규모는 한 변의 길이 102m, 높이 26m로 현재 남아 있는 지구라트 가운데 가장 완전하며 중간에 삽입한 벽돌의 쐐기문자 명문(銘文)으로써 이 지구라트가 두르 운타시(운타시 왕의 성채)에 세워진 주신(主神) 인슈시나크와 나피리샤의 신전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초가잔빌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 지구라트의 모방이 되겠으나 규모로는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지구라트 벽돌에 새겨진 쐐기문자
초가잔빌 지구라트 유적은 프랑스 고고학자 로망 기르슈망에 의해 1951년 이후 발굴됐으며 1979년 유네스코로부터 인류문화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이란의 수많은 페르시아 문명 유적을 제치고 가장 먼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초가잔빌 지구라트의 어제와 오늘기단 포함 5층 60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가잔빌의 위치
다시 말하거니와 위 초가잔빌의 지구라트는 창세기에 나오는 시날 평원의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은 탑과는 무관하니 시대적으로나 위치적으로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지구라트 중에서는 규모면이나 형태상으로 완형에 가까운 모습인 바,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을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그리하여 시날 땅에 남아 있는 지구라트 중에서 하나님이 건축을 중단시켰다는 탑을 찾아나서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는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산재하는 58개의 지구라트 중 최종 후보에 오른 것은 아래의 3개였다.
1. 우르 지구라트
우르 지구라트의 옛 사진
단장된 우르 지구라트 일대
2. 아칼쿠프 지구라트
아칼쿠프 지구라트의 옛 사진
3. 보르시파 지구라트
보르시파 지구라트의 옛 사진
19세기가 끝나가던 1899년 여름, 세계 고고학계의 각축장이 된 이라크에 독일 동방학회 소속의 로베르트 콜데바이(Robert Koldewey, 1855-1925)가 나타났다. 물론 그 역시 바벨탑을 찾고자 함이었고 부가적으로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유적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바벨탑은 바빌론의 탑이라는 의미이니 당연히 바빌론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던 바,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황성 옛터를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곧 결과물을 건져올렸다.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하인리히 슐라이만의 제자이기도 한 콜데바이는 1899년 바빌론에 도착한 이래 향후 18년간 연인원 80만명을 동원하는 대규모 발굴로서 땅을 헤집어, 그 이듬해 바빌론 궁의 정문이던 이슈타르 문과 바빌론의 궁성을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고, 나아가 그리스의 필론이 말한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정원 및 거대한 엣사길 신전 터를 발굴해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이것이 몇 달 사이의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미다스의 손이 따로 없었다.(☞ '느부갓네살 왕과의 수싸움에서 밀린 여호와')
콜데바이가 발굴한 이슈타르 문과 바빌론 궁성
복원된 이슈타르문과 수습된 코발트 법랑벽돌
이슈타르 문 복원도
콜데바이가 지하 22m 지점에서 발굴한 궁성
복원된 궁성
페르가몬 박물관에 이전 복원된 이슈타르 문
하지만 그때까지 콜데바이 역시 바벨탑의 자취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바빌론 벌판의 황량한 물웅덩이 속에서 몇 장의 벽돌을 건져 올렸다. 그 오래된 벽돌로부터 바벨탑의 자리임을 확신한 콜데바이는 즉시 물을 퍼내고 측량에 들어갔다. 네모 반듯한 기단 한 면의 길이는 91.5m. 아래 '역사(Historiae)'에 기록된 헤로도토스(BC 480-420년경)의 기록과 불과 1.5m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막말로 먹어줄 수 있는 차이였다. 콜데바이는 환호했다. 드디어 성서 속의 바벨탑을 찾아낸 것이었다.
탑은 가로 세로 높이가 180 큐빗으로 견고한 기단 위에 세워졌고, 그 위에 층층히 8단의 탑신을 쌓았으며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꼭대기에는 멋진 신전이 있으며, 그 안에는 신이 편히 쉴 수 있는 대형 침대의자와 황금의 탁자가 놓여있다. ※ 그리스 1큐빗=50cm
더불어 나머지 지구라트들은 찬밥이 됐다. 시날 땅에 남아 있는 이 거대 지구라트들은 장대함에 있어서는 적어도 창세기의 기록에 충실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장려한 유적들은 콜데바이가 바빌론의 허허벌판에서 강력한 후보 건물의 흔적을 찾아냄으로써 일순간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콜데바이가 발견한 그 탑지(塔址)야말로 그때까지 바벨탑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었던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의 기술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적이었다. 세계는 흥분했다.(☞ '바벨탑과 언어혼란의 진실')
구글 어스가 찍은 바벨탑 자리
바벨탑 자리 왼쪽이 유프라데스 강이다.
성서 속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이렇듯 성큼성큼 성서 밖으로 살아 걸어 나왔다. 대홍수에서 살아 남은 셈의 후손들이 인구의 증가로 인해 남쪽으로 이주해 내려오다 시날 평원을 만나고, 그곳에서 성과 탑을 건설하고 영주(永住)하려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 말이 서로 다르게 되어 흩어지게 된 사건..... 이것이 사실로 증명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살아난 성서의 이야기는 얼마 후, 적어도 콜데바이의 성서 속으로는 되돌아가야 했다. 그가 에사길라 신전(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둑을 모신 신전)터에서 발견한 기원전 229년의 점토판 한 장이 문제였다.
에사길라(수메르어로 '머리를 든 자'라는 뜻) 신전에서 주었다 하여 이른바 에사길라 태블렛으로 불린 그 점토판은 앞서 말한대로 당대의 학생들을 위한 일종의 수학 교과서였다. 거기에는 뜻밖에도 바벨탑의 높이를 묻는 문제가 실려 있었는데, 그에 대한 정답은 91.2m. 콜데바이의 측량값의 차이는 겨우 30cm로, 무시해도 괞찮을 수치였다. 이제는 자신이 발굴한 그것이 성서의 바벨탑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콜데바이는 넘을 수 없는 큰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문제의 예문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테멘앙키는 (신 바빌로니아의 왕) 나보폴라사르 왕과 (그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재건된 신전이다. 신이 있는 곳은 '머리를 높이 든 자의 신전' 에사길라이다. 아래의 표준값을 이용해 에테멘앙키의 가로 세로 높이를 구하라...... 이 문제는 보르시파와 우르크에서 만들어진 사본 점토판과 대조하여 수록하였으며 날짜는 셀레우쿠스 왕의 탄생 83년(BC 229)이 되는 해이다.
"에테멘앙키는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캇네자르에 의해 재건된 신전이다....." 콜데바이는 사실 이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이 발굴한 그 탑은 에사길라에 모셔진 바빌로니아의 왕국의 주신(主神) 마르둑을 위한 또 다른 신전이며, 어쩌면 창세기의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탑일는지도 몰랐다. 그나마 그가 일말의 기대를 가진 것은 이 탑이 재건되었다는 기록 때문이니, 혹 창세기에 건립이 중단된 그 탑을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캇네자르가 다시 쌓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기대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콜데바이가 잘 알고 있었다. 바벨탑 발굴 중에 수습된 벽돌에는 모두 다음과 같은 인장이 찍혀 있었던 까닭이었다.
네부캇네자르 왕의 인장이 찍힌 바벨탑 벽돌
또 다른 벽돌과 네부캇네자르 왕의 실린더.
둘 다 위와 비슷한 내용이 새개져 있는데, 실린더에는 특히 에테멘앙키, 즉 바벨탑이 전대(前代)에 벼락을 맞아 재건하였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제는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바벨탑을 만든 사람은 창세기의 사람들이 아니라 신(神) 바빌로니아의 왕 나보폴라사르와 그의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던 것이었다. 콜데바이는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성서가 사실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 그대로를 말할 것인가? 그는 역사 앞에서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역사는 침묵할 수도 있지만 때가 되면 스스로 진실을 밝힌다' 이것이 그가 평소 지닌 생각이었다. 사실 그가 에사길라 태블릿을 숨긴다고 해서 바벨탑이 창세기 사람들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다른 증거로써 모든 진실은 밝혀지게 될 것이었다.
콜데바이는 딜레머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타협을 선택했다. '창세기의 바벨탑이 발견됐다고 세계가 떠들썩한 이 경사스러운 분위기만은 깨지 말자' 그는 이렇게 마음 먹었다. 게다가 자신은 지금 영웅으로써 헹가래 쳐져 하늘 높이 올라가 있는 마당이었던 바, 그대로 땅바닥에 내팽개쳐지는 비참함을 맛보기 싫었다.
"언젠가는 내 스스로 진실을 밝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18x10cm의 이 작은 돌판을 헝겊으로 고이 쌌다. 그리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 몰래 숨겨 놓았던 바, 아마도 독일로 돌아가 박물관에 살짝 기증할 요량인 듯싶었다. 그 돌의 출처와 가치는 박물관에서 알아서 매길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1917년, 18년 간의 발굴을 마치고 돌아가 발굴 유물은 물론이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 한 장의 스케치까지도 모두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기증했고 그것은 지금도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존돼 있다. 하지만 문제의 에사길라 태블릿은 건네지 못했다. 1913년, 콜데바이가 일시 귀국을 준비하던 어느 날, 그가 에사길라 태블릿을 꺼내려 했을 때는 이미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고미술상에서 바빌론에서 출토된 귀중한 돌판 하나가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그 무렵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