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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교한 황제 율리아누스-그는 왜 기독교를 거부했나(I)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2. 1. 01:21

    *  '율리아누스 황제를 위한 변명' ― 김응종과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


    최근에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라는 책을 읽었다. 우리가 잘 아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스코틀랜드의 지도자 윌리엄 월리스가 영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그의 아내 머론이 초야권을 요구하는 스코틀랜드 영주에게 저항하다 살해됐기 때문이라 설명되어지기에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 올 수밖에 없었는데, 내용은 제목에 국한돼 꾸며진 것이 아니라 '서양사에 관한 12가지 편견과 사실'이라는 부제에 충실해 서술돼 있었다.(재간행본에서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서양사 상식'으로 바뀌었음)



    <브레이브 하트>의 포스터

    영국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옛 관습인 '프리마 녹테'를 부활시켜 스코틀랜드 영주들의 환심을 사려 한다. '프리마 녹테'란 Jus Primae noctis(초야권)을 줄인 것으로, droit de cuissage라는 말(cuisse란 허벅지, 엉덩이란 뜻이다)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위 책 188쪽의 내용으로, 저자는 이와 같은 초야권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보아 온, 그러면서 누적돼 온 '묻고 답하기' 형식으로 꾸며진 기존의 가벼운 책들에 대한 피로감이 살짝 투영되려고도 했으나,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니 아! 오랫만에 맛보는 진국이었다. 약력을 보니 저자 김응종은 역시 서양사를 전공했는데, 참으로 심도 있게 잘 쓰여진 책이라는 느낌이 지금도 미열(微熱)로써 전달된다. 모름지기 책이란 읽을만한 거리를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알아먹기 쉽게 쓰면 그 역할을 다 한 것일 터, 어쩌면 이 책은 그에 대한 규범과도 같다.


    ~ 한마디 더 하자면 두꺼운 책은 무조건 사양하자는 쪽인데,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는 397쪽으로 가까스로 기준의 안쪽에 들었다. '무식한 사람들이 쓴 책은 두껍다'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 지론이지만 그와 같은 판단이 실패한 적은 거의 없다.(물론 개인적 견해다) 아무튼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는 여러가지로 추천할 만한 책이다.



    김응종 저,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푸른역사



    로마 기독교의 역사,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누차에 걸쳐 언급했으므로('삼위일체의 진실 I - 밀라노 칙령의 진실' etc) 더 이상의 설명은 사족이라 여겨진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했음에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독실한 태양교 신자였다는 사실 또한 여러 번 언급했다.(☜ '삼위일체의 진실 II - 황제가 만든 신 예수' etc) 하지만 다다음 황제 율리아누스는 배교했으며, 다시 과거로 회귀하여 태양신을 믿은 사실 및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할 기회가 없었던 바, 차제에 위 책의 섹션인 '율리아누스 황제를 위한 변명'을 빌려 설명해볼까 한다.


    "중키에 머리카락이 빗질한 것처럼 부드러우며 턱수염은 거칠고 뾰족했다. 아름답고 빛나는 눈은 예민한 정신을 나타냈다. 눈썹이 잘 생기고, 코가 우뚝했으며....."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의 조상(彫像)은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묘사와 대체로 부합하며 체격이 단단하고 수줍어하는 듯한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율리아누스는 헬레니즘 문화에 열광했고, 신플라톤주의에 이끌린 철학자였으며,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Soli-Invictus)'을 숭배한 이교도였다. 다시 말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상

    율리아누스 황제는 태양신을 숭배한 이교도였다. 기독교 황제와는 달리 수염을 길렀다.



    율리아누스는 '배교자'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기독교를 배신한 사람이란 뜻으로, 기독교를 배신했으니 시대의 흐름에 반역한 사람, 악한 사람이라는 감정적인 평가가 깔려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황제를 그의 인품이나 업적에 대한 고려 없이 이렇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가 배교자인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그가 기독교를 믿었다가 이교로 개종했다면 배교자일 수 있다. 하지만 16세기 프랑스 인문주의자 몽테뉴는 율리아누스가 기독교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기독교를 진심으로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배교자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율리아누스는 무엇보다도 이교 숭배자였고 헬레니즘 철학자였기 때문에, 배교자라는 타이틀보다는 '태양신 숭배자'나 '철학자'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릴 것이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억압하고 이교를 장려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관심을 모았다. 국내에서는 최혜영 교수가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해 다각적으로 깊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율리아누스 태양신 헬리오스의 정치적 의미〉, 《서양사론》 61, 1999. etc.) 최혜영 교수 덕분에 율리아누스 황제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나는 강조점을 달리하여 그의 삶을 정리하면서, 율리아누스라는 비극적인 인물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기독교 신자였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이자 율리아누스의 종형)는 율리아누스가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카파도키아 마켈룸에서 6년을 지내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당시 그의 교육을 담당한 사람은 게오르기오스인데, 그는 훗날 아타나시우스(☞ '삼위일체의 진실 I')의 후임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다. 율리아누스는 게오르기오스가 세운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가 읽은 책은 주로 이교 서적이었다. 그는 여기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철학자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책을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이후 그는 왕위 계승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361년 11월 3일, 콘스탄티우스는 사망하는데, 그는 죽기 전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율리아누스는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었다. 이제 율리아누스에 대한 박해는 끝났다. 율리아누스는 "신은 나에게 정화를 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이교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율리아누스는 그리스 철학자처럼 수염을 길렀는데, 이것은 면도를 한 기독교 황제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율리아누스가 존경했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수염을 길렀다)


    율리아누스의 불행한 가족사는 그의 '정화' 정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율리아누스의 아버지와 삼촌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율리아누스에게는 콘스탄티우스가 그야말로 가문의 원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다음 로마의 역사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잡는 것.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율리아누스가 말하는 정화란 기독교의 오염을 벗겨내는 것. "배교자" 콘스탄티누스가 받아들인 기독교를 버리고 로마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율리아누스가 배교자이다. 율리아누스가 기독교를 억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악압의 정도가 어떠했나에 있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 명백한 탄압과 박해"를 가했다고 하는데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디오클레티아누스처럼 약 5천 명의 기독교인들을 죽음으로 몰았을까? 배교자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먼저 기독교 박해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는 종교에 관한 한 관용적인 사회였다. 로마라는 국가와 그 로마를 상징하는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지 않는 한, 모든 종교는 자유를 누렸다.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가 부르기 정도였지만, 기독교는 이를 거부했다. 기독교는 교리 때문에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이 '고집' 때문에 죽었다고 그의 수첩에 적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공인 이전에 이미 기독교인들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단순히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기독교 교회가 가진 현실적인 능력과 가능성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교회에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그는 주교를 궁정의 신하로 등용했으며, 그들에게 기독교인 사이의 분쟁은 물론이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분쟁까지 관할하는 재판권을 부여했다.


    주교는 공동체의 해결사가 되었다. 귀족들은 주교의 지위를 자기들의 지위와 권력을 넓히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들은 교회의 헌금을 관리하는 권한 외에 보조금 지급과 세금 면제 같은 특혜를 누렸고 속주의 총독에게 맡겨졌던 통치권까지 부여받았다. 콘스탄티누스 전기를 쓴 에우세비우스는 이러한 현상이 만연하게 된 것에 실망하여 종교적 신념보다 세속적 이익을 얻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 많다고 불평했을 정도였다. 4세기가 지나면서 기독교인의 수는 5백만 명에서 3천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히에로니무스는 기독교의 힘과 부는 늘어났지만 덕성은 줄었다고 개탄했다.


    기독교의 공인과 함께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관용도 무너졌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는 다른 신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대에 가서 이교의 신들에 대한 숭배가 금지되었으며 이교도들은 가혹한 벌을 받았다. 박해를 받던 사람이 박해를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5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에서, 광신적인 수도자들이 대주교 키릴루스의 묵인 하에 "어머니이며 누이이며 스승이며 모든 것을 베푸는 은인"이라 불렸던 히파티아라는 여성 철학자를 무참히 살해한 것은 이교도들을 박해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키릴루스(370-444)는 매우 교활하고 정치적인 인물이었으니, 훗날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의 이성설(二性說)을 단죄한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창세기의 수수께끼 단어 '우리',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서 II'


    키릴루스는 우선 히파티아의 영향력이 알렉산드리아를 좌우하는 것이 싫었고, 또 그녀가 부르짖는 자연철학과 과학은 그리스도의 논리와는 도무지 합당치 않은 것이었다.(그녀는 유대교의 일신론적 관습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기독교를 숭배하지 않았다) 이에 키릴루스는 415년 3월 베드로를 위시한 교회 내의 광신도들을 선동해 아카데미아의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는 히파티아의 마차를 습격하게 했다. 이에 그녀는 심한 폭행을 당한 후 옷이 찢겨진 채 거의 나체로 알렉산드리아 케라레움 교회로 끌려왔고, 그곳에서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라는 도구를 이용한 린치를 당했다. 





    오스트라코이스는 생굴의 껍질을 말하는 것으로, 기독교인들은 그 날카롭게 쪼개진 굴 껍질로 히파티아의 피부를 도려내었고, 그녀는 결국 그로 인해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이 안 찼던지 죽은 시신의 뼈와 살을 모두 발라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키나론까지 뿌리고 다녔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불태웠다. 알렉산드리아 총독 오레스테스는 이 소식에 분노했지만 대주교 키릴루스와는 유대인 추방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던 바, 기독교도들의 더 큰 소요를 염려한 나머지 키릴루스의 사형(私刑)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히파티아의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곳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아테네나 로마 등지로 옮겨갔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래 번성했던 알렉산드로스 대도서관과, 찬연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때로부터 시들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70인역 성서') 종교가 이성을 지배하던 중세 암흑기의 예고편, 그리고 중세의 비극 마녀 사냥의 전주곡과 같은 일이 바로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출처: https://kibaek.tistory.com/165 [아하스페르츠의 단상]


    기독교도에게 살해된 알렉산드리아의  천재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히파티아


    히파티아가 가르치는 자연철학과 과학은 기독교의 허황된 논리와는 크게 거리가 있었을 뿐더러 그녀 또한 당연히 기독교의 신을 숭배하지 않았다.


    이에 히파티아의 영향력을 경계하던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키릴루스는 맹신적 수도자들에게 처치를 사주하는 바, 


    415년 3월, 교회 수도자와 광신도들은 아카데미아에서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는 히파티아의 마차를 습격한다.


    히파티아는 심한 폭행을 당한 후 옷이 거의 찢겨진 채 나체로 알렉산드리아 케라레움 교회로 끌려왔고,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라 불리는 생굴 껍질로 피부를 도려내는 린치를 당해 죽는다.(이상 '아고라'의 스틸컷)


     

    율리아누스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가족사와도 관계가 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율리아누스 집안의 제위를 찬탈했고,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아버지를 괴롭혔으며,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학살했는데, 그 가해자들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게다가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독실한 신자였고, 헬레나는 성녀로 시성되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가 관찰한 이들의 덕성은 헬레니즘 철학의 덕성에 미치지 못했다.


    그가 본 즉, 죄 많은 사람들이 죽기 직전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러함으로써 구원받는 기독교 교리나 종교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했지만 정작 자신은 임종 직전에 아리우스파로 세례를 받았다.(그리고 진심으로 개종하지도 않았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를 믿는 쪽이었고 아리우스파로 세례를 받았다. 초기 기독교인 황제들이 아리우스파였다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이마저 거부했다


    율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으로 돌아가기를 바랬고, 그러한 마음으로 이교를 부활시켰다. 그것은 이교도들에게 해방과 같았다. 이교도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심한 박해를 당하여 인신 피해와 재산 손실을 입었다. 신전은 폐쇄되었고, 성직자들은 거리로 쫓겨나 거지가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신전을 파괴하여 돌, 나무, 그릇 등을 가져다 교회와 집안을 장식했고 심지어는 무덤까지 파헤쳤다. 율리아누스는 이교도들의 재산을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약탈해간 기둥이나 조각 등은 반환해야 했는데, 이교 신전에서 나온 돌로 지은 교회는 그 돌을 반환하기 위해 해체되기도 했다.


    이 점에 있어서 율리아누스는 단호했고 이로 인해 적이 생겨났다. 하루는 마리스라는 맹인 주교가 포르투나 여신의 신전을 나서던 율리아누스 앞을 가로 막으며 항의했다. 그는 순교를 원했던 것일까? 율리아누스는 그저 "갈릴리인(예수)이 너에게 시력을 주지 못했구나"라고만 말했다. 기독교에서 이교로 돌아가는 것은 제국을 강하게 만들었던 '천년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이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회복시켜주었다. 


    그는 예수를 로마제국의 변두리에 있는 조그만 마을 갈릴리에서 태어난 보잘것없는 인물이라는 뜻에서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런 자가 신이라니 어림도 없는 노릇이었다. 율리아누스가 보기에 그러한 자를 신으로 받드는 기독교는 집단정신병과 같은 질병이었다. 아울러 반대파 제거에 몰두하고 이교를 박해하는 기독교도의 행위 역시 집단 질병으로 보았는데, 다만 질병은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치료의 대상이었다. 



    마지막 비기독교 황제 율리아누스


    율리아누스의 기둥

    율리아누스 황제가 362년 터키 앙카라를 방문한 기념으로 세운 높이 14m의 돌 기둥이다. 황제는 이교도가 많던 이 지방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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