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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교한 황제 율리아누스-그는 왜 기독교를 거부했나(II)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2. 2. 00:31


    * 1편에서 이어짐.


    율리아누스는 법을 어기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이교 숭배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율리아누스는 법에 의해 궁정과 교회를 개혁했다. 그는 법을 "왕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기독교인들을 제단 앞으로 강제로 끌고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 기독교의 지배하에 억눌려 있던 이교도들이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율리아누스는 이러한 즉결심판을 방조하거나 사주하지 않았다. "그대들은 그대들을 박해했던 사람들이 저지른 가증스러운 범죄를 되풀이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하고 질책했다.


    ~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를 비롯하여 두 명이 죽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는 어린 율리아누스의 교육을 담당했었던 게오르기오스였다. 게오르기오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직에서 몰아낸 후 그 후임으로 들어앉은 사람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의 모든 종파를 "공평한 손으로 탄압"했고, 소금, 종이, 장례용구 등의 사업을 독점했으며 시내의 부유한 이교 신전들을 약탈했다. 그는 사후에 정통파 및 아리우스 기독교들에 의해 성자, 순교자, 영웅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명성은 십자군 시대에 온 유럽에 널리 전파되어 여러 세기가 지나는 동안 영국의 수호 성인인 성 조지(St. George)로 변모되었다.



    성 조지(성 게오르기오스)

    회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창으로 용을 찌르는 백마 탄 기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영국 국기의 바탕이 된  성 조지 십자가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 도안 「세인트 조지 크로스」(성 게오르기오스 십자가)는 잉글랜드의 국기로 채택되었고 영국 국기의 일부로 이어져 오늘날에도 자주 볼 수 있다. 그루지아나 러시아의 국가 휘장,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의 도시 휘장 및 도시 깃발에도 성 게오르기오스의 도안이 채용되었다. ('위키백과' 참조)



    기독교 역사가들이 주장하듯 이교도들은 피에 굶주린 광신자가 아니었다. 율리아누스 시대에 보복은 있었지만 학살은 없었다. 기독교 사가(史家) 그레고리오스도 학살의 증거를 찾지 못했다. 율리아누스의 종교개혁은 교육개혁으로 절정에 도달한다. 전통적으로 로마에서 교육은 독립적인 활동으로 인정되었다. 기독교 제국에서도 이교도 교사들은 강의를 계속했다. 비록 그들의 학생 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율리아누스 시대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도덕적인 율리아누스는 교사들의 충원을 직접 감시했으며, 이교를 믿는 사람만이 강의를 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해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이 교육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한 것이었다. 교육에서 배제된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율리아누스가 기독교를 억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체계적인 박해나 학살을 시도하지 않았다. 율리아누스의 온건함을 보여주는 좋은 일화가 있다. 율리아누스는 아리우스파를 믿었던 콘스탄티우스가 추방한 성직자들(예컨대 아타나시우스)을 불러들였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표시였을까? 아니면 기독교 사이의 파벌싸움을 유도해 그들을 약화시키려는 마키아벨리적 술책이었을까?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율리아누스의 기대를 벗어나 귀부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전념하였던 바, 참다 못한 율리아누스는 이 "미숙아"를 다시 추방했다.


    또 다른 일화는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안티오키아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율리아누스가 신전에서 기도하고 떠난 후, 두 명의 기독교인이 신전을 모독한 혐의로 법정에 소환되었다. 여기서도 그들은 황제를 조롱했으나 이들은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요즘 말로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또 한 번은 두 명의 기독교 장교가 연루된 율리아누스 암살 사건도 있었다.


    황제가 이들을 직접 신문했다. 이들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했으나, 종교적으로는 적이라고 말했다. 황제는 특별한 적대심을 품지 않았다. 만일 다른 기독교인들이 이들을 도우러 감옥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사건은 여기에서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도발 앞에서 황제는 이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처형당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율리아누스는 배교자라는 악명이 무색하게 기독교인들을 학살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오스는 율리아누스가 박해하지 않아 기독교인들이 영광스럽게 순교할 수 없었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를 역사적으로 불행하게 만든 것은 그가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들 다음이 아니라 기독교 황제들 다음에 제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율리아누스보다는 디오클레티아누스나 갈레리우스가 기독교인들에게 수백 배 수천 배 더 가혹했으나, 부당하게도 비난은 율리아누스에게 집중되었다.


    율리아누스는 시대를 거슬렀기 때문에 특별한 비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4세기가 지나면서 기독교인의 수가 급증했다. 기독교화가 대세인 시대에 율리아누스의 반(反)기독교 정책은 기독교들의 반감을 샀으나 그렇다고 이교도들의 지지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의 이교도들은 율리아누스의 신비주의적이며 열광적인 이교주의에 호응하지 않았다.(이를테면 궁전의 정원을 이교의 사당이나 신전으로 가득 채우는 일이나 이들 신에 대한 정기적인 동물희생제 같은) 


    그는 기독교인과 이교도들에게 이방인이었으며, 로마인에게는 그리스인으로, 그리스인들에게는 로마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행한 기독교에 대한 비현실적인 반대는 현실적인 이교도들을 당황시켰다. 율리아누스가 죽자 안도한 사람들은 기독교도들만이 아니었다. 이교도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율리아누스의 덕성을 좋아했지만 그것을 따라가는 일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 그는 예루살렘에 유대교 신전을 재건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라기보다 기독교도들에게 모욕을 주려는 의도였다. 유대인들도 오랫동안 유대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신전에서 동물희생제가 부활된다는 사실에 참으로 당혹했을 것이다. 옛 신전의 토대에서 '공 모양의 불덩어리들'이 쏟어져나와 일꾼들을 겁먹게 만들었다는 보고가 있고 나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기독교 도시들은 징벌을 받았고,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에서 교회가 불태워졌다.('다음 백과')


    '이미 지배적인 기독교를 흔드는 것은 제국을 흔드는 것'이었다는 그레고리오스의 판단은 옳았다.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E. 기번이 말했듯이, 율리아누스가 이교를 로마의 종교로 재확립하려는 노력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로마제국은 끔찍한 종교전쟁에 말려들었을지도 모른다.(기번, P. 361; 프리츠 하이켈하임, 김덕수 옮김, 《로마사》, 현대지성사, 1999, P. 893)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

    363년 율리아누스는 6만5천명의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침공에 나서 수도 크테시폰까지 진격했으나 '어디서 누가 던졌는지 아무도 모르는' 창에 맞아 전사한다. 율리아누스의 원정 실패로 로마는 299년 평화협정으로 획득한 영토를 모두 돌려주게 된다.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막시무스는 율리아누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화신이라는 신탁을 받았으나, 그 신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율리아누스는 투창을 맞아 363년, 3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페르시아 병사의 투창에 맞은 것인가, 아니면 로마 병사의 투창에 맞은 것인가? 페르시아에서는 율리아누스의 목숨에 포상을 걸었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전과(戰果)를 자랑할 법한 페르시아군도 율리아누스의 죽음에 대해 말이 없었다.


    황제의 측근인 리바니오스는 기독교 로마 병사의 짓이라고 말했고, 암미아누스는 투창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른다고 썼다. 그레고리오스는 로마 군인들의 봉기 가능성을 언급했다. 어쨌든 이 반(反)율리아누스 역사가는 "황제는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적었다. "황제를 매장할 때 땅도 그를 거부하는 듯 지진이 일어났다"고도 했다.


    율리아누스의 재위 기간은 불과 20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정책은 콘스탄티누스의 일탈을 바로잡아 로마의 위대한 옛 전통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는 이교의 부활이었고, 이교의 부활은 당연히 기독교의 억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개월의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인에 대한 학살은 없었다. 율리아누스는 종교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예루살렘 신전을 재건함으로써 기독교인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만일 그의 통치 기간이 더 길었다면 어떠했을까? 그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그의 대(對)기독교 정책은 어떻게 변했을까?  율리아누스는 기근이 든 안티오키아에서 하루에 백 마리의 소를 잡는 희생제를 치를 정도로 이교 의식에 열중한 인물이었다. 까닭에 그의 치세가 더 길었다면, 재위 초에 내걸었던 종교의 자유가 기독교 박해로 변질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상황의 도래를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교는 도그마가 아니라 실용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다. 이교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신에게 질병 퇴치와 다산 등을 기원하면서 제사를 지냈지, 진리를 전하지는 않았다. 이교가 기독교와 달리 다른 종교를 박해하지 않았음은 기독교 이전의 로마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상념이 배어 있는 황제의 얼굴


    율리아누스 황제가 섬겼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


    또 다른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모든 것을 이성에 의존했던 아우렐리우스도 실은 기독교를 탄압했다. 당시 갈리아 총독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황제께서는 기독교도를 사망할 때까지 고문하라 하셨다. 다만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는 사면하라 하셨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도에 대한 신문이나 고문을 명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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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