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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4. 13. 06:17
과거 일제시대 때의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은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였다. 일본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마당에 한반도의 구석기가 증명되면 그야말로 모양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기에..... 좌우지간 당시 일제 사관(史觀)의 모토는 '조선의 역사가 일본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34년에 발견된 두만강변 동관진(潼關鎭) 유적 등은 한마디로 '그대로 매장되었다'. 대표적으로는 1941년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의 논문이 묻혔다.
동관진 유적(출처: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해방 후 북한에서는 획기적인 구석기 유물의 발굴이 있었다. 평안남도 평양시 상원군 상원읍 흑우리 검은모루(검은 모퉁이라는 뜻) 동굴에서 다량의 동물뼈 화석과 함께 여러 종류(주먹도끼, 긁게, 찌르게 등)의 뗀석기가 수습된 것이었다. 최초의 발견은 1964년에 있었고 발굴조사는 1966년부터 진행되었는데, 처음에는 이 유적이 40∼6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지금은 70~100만 년 전의 것으로 상향되었다. 어느 쪽이 됐든 전기구석기의 것임에 틀림 없는 유물과 유적이었다.
검은모루 동굴 유적. 화살표는 동굴 입구(출처: KBS)
검은모루 동굴 출토 구석기 유물(사진출처: 경기문화재단)
비슷한 시기 우리나라에서는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됐다. 최초의 발견자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고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앨버트 모어 부부로서, 그들은 1962~1963년 현장을 답사한 후 이곳에서 수습된 몇 점의 유물을 들고 연세대학교를 찾았다. 이에 석장리 일대에서는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정밀 조사가 벌어졌고 최초의 구석기 시대 집자리(막집)와 함께 주먹도끼, 긁게, 찍개 등 다량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측정결과로서 판명된 연대는 3만690년 전이었다.
공주 석장리 선사유적지
연세대학교 발굴 기념표석
석장리 출토 구석기 유물(사진출처: 경기문화재단)
석장리를 필두로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구석기 유적과 유물이 발굴되어 이 땅에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이 증명되었는데, 그중에서도 1978년 이루어진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물 발굴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히 대사건과도 같은 발굴이었다. 또 이 일은 발견 자체부터 드라마틱해 인구에 회자되었던 바, 대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곡리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당시 주한미군으로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병사 그렉 보웬(Greg Bowen)이었다. 그는 입대 전 캘리포니아 빅터밸리대학에서 2년간 고고학을 공부했던, 말하자면 아마츄어 고고학자쯤 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군대에 지원한 것도 학비를 마련해 학업을 마치기 위한 방편이었다. 따라서 그가 보는 눈은 다른 사람과 달랐을 터, 부대 근방 한탄강의 충적토를 고대인류가 살았음직한 후보지로 비정하고 외출을 나오면 근방을 거닐었다.
그러던 그에게 1978년 1월 범상치 않은 돌멩이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는 이것을 구석기 시대의 유물로, 그것도 주먹도끼(handaxes)라는 특별한 유물로 여겼던 바, 그 돌멩이의 발견 경위와 모양(그림과 사진) 및 주변 생태계를 적은 편지를 프랑스의 유명 고고학자 프랑소와 보르드 교수에게 보냈다. 보르드 교수는 그것이 아슐리안(cheulean) 문화의 석기임을 확인하였고, 같은 해 4월에 서울대 고고학과 김원룡 교수를 그렉보웬에게 소개하며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
위로부터
주먹도끼가 발견된 연천평야
그렉 보웬이 보낸 편지와 스케치
그렉 보웬이 본인이 직접 발굴한 구석기 시대의 움막 기둥 터를 만져보고 있다.
발굴을 지휘한 김원룡 교수
전곡리박물관 자료실 앞에 안내 캐리커쳐가 세워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주먹도끼
안내문
국립중앙박물관의 선사·고대관을 들어서면 바로 위의 주먹도끼와, 웬지 뿌뜻한 느낌을 주는 아래 안내문을 마주하게 된다.
2005년 방한한 그렉 보웬 부부
27년만에 한국을 찾은 그렉 보웬과 부인 이상미씨가 연천군 구석기 축제에 참가한 초등학생들과 만났다. 보웬은 군복무를 마친 후 학교를 졸업하고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고고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고고학자로서 애리조나주 인디안 보호구역 발굴 등을 수행했다.
27년만에의 해우
당시 학생 신분으로 발굴에 참가했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이선복 교수가 그렉 보웬과 과거를 추억했다. 그는 "보웬이 전곡리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경지정리를 하면서 중요한 유적이 모두 사라질 뻔했다”며 보웬의 발견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보웬의 발견 이후 한강 이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돼 임진강 유역에서 60여개 구석기유적이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그가 발견한 주먹도끼는 큼직한 돌을 다듬어서 끝이 뾰족하거나 타원형으로 날을 만든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뗀석기였다. 그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만능도구로서, '구석기 시대의 맥가이버칼'로 불릴 만큼 유용한 물건이었다. 즉 그것으로써 짐승을 가격하고, 가죽을 벗겨 내고, 고기를 바르고, 뼈를 부수는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던 것이었다. 이 도구의 정식 명칭은 '아슐리안 양면 핵석기'로, 최초로 이 도구가 발견된 프랑스 쌩 아슐(St. Acheul)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여러 형태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마구잡이로 만든 뗀석기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겠다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구석기 시대의 가장 선진화된 도구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생 아슐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
프랑스 아베 빌에서 발견된 50~60만년 전의 아슐리안 주먹 도끼
막스프랑크 연구소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견한 19만년 전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케냐 코키세렐(Kokiselel)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슐리안 주먹도끼
국립중앙박물관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이 양면핵석기의 발견이 귀중한 까닭은 그전에는 이것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하바드 대학의 저명한 선사고고학자 모비우스(H. Movius) 교수는 인도의 동쪽, 즉 동아시아에는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모비우스 라인이라는 가상의 선으로써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는 지역과 발견되지 않는 지역을 나누어, 인류의 이동에 대한 가설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활용하였다.
즉 아프리카에서 태동한 인류의 동아시아 진출은 (이 석기를 이미 가지고 들어간) 유럽보다 늦게 이뤄졌다고 추정됐던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이는 아슐리안 석기가 아프리카와 유럽 및 인도 서쪽 지방에서는 발견되었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곡리 전기 구석기 유적지에서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었던 바, 그간 정설로 인정받았던 모비우스 학설은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 전곡리 주먹도끼들(Chongoknianaxes)이 발견된 이후 실제로 아슐리안 석기 이론을 재평가하는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현재에도 동서양의 아슐리안형 석기의 발생과 공작(工作) 인류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분명한 것은 전곡리 주먹도끼의 발견으로 인해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사용하던 유럽의 문명이 아시아보다 우월하다는 그간의 정형화된 인식이 깨졌다는 사실이다. 가히 세계사를 바꾼 한반도의 구석기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그동안 부동(不動)의 학설이었던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Out of Africa theory)'마저 위협을 받게 되었으니 그간 숨죽이고 있던 '다지역기원설'이 다시 고개를 드는 계기가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II편에서 다시 논하기로 하겠다) 아무튼 전곡리 구석기 유물의 발견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데즈먼드 클라크 같은 세계적인 학자들까지 한국에 와서 석기들을 감정하고 진품임을 인정했던 바,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문화 인류가 살던 지역 중의 하나로서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연천 전곡리 유적은 한때 45,000년 전의 유적이라 발표되어 그동안의 열기에 재를 뿌리기도 했으나 최근의 재측정 결과 35만년 전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임이 재판명되었다. 이는 피션트랙과 포타슘-이르곤법에 의해 판명된 것인데, 그외 청원 두루봉 유적, 단양 금굴유적, 여주 연양리 유적 등에서도 전기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고, 파주 금파리, 가월리, 장산리, 연천 원당리 등의 구석기 유적에서는 전곡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형식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수습되었다.
파주 금파리 전기구석기 유물
파주 가월리 전기구석기 유물
연천 원당리 전기구석기 유물
경기도 광주 삼리 중기구석기 유물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나온 전기구석기 유물과 동물뼈(사진출처: 경기문화재단)
전곡리 선사유적지 입구
전곡리 발굴지에 재현된 선사시대
전곡리 발굴지에는 박물관도 세워졌다.
한탄강이 굽어 도는 이 지도를 보면 이곳에 사람이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된다.
반면, 옛날부터 한국에는 구석기 시대 유적이 없다고 주장하던 일본학계는 이 사건으로 졸지에 찌그러져버렸다. 더불어 과거 동관진 구석기 유적을 말소시킨 일까지도 소급해 거론되며 망신살이 뻗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만회를 노리던 일본학계는 급기야 유물조작이라는 무리수를 두며 그야말로 국제적 개망신을 당하게 된다. 열등감을 극복할 수 없었던 일본학계는 절치부심하며 만회를 노렸지만 이것이 노력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바, 결국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라는 아마츄어 고고학자가 희대의 고고학 사기사건을 벌이게 된다.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51세로 '도호쿠(東北) 구석기 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던 후지무라는 1981년 도쿄(東京) 동북부 미야기(宮城) 현에 있는 사사라기(座散亂木) 유적지를 발굴하였는데, 그는 파는 곳마다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어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아울러 후지무라의 빛나는 활약에 힘입어 일본의 구석기는 60~7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바, 교과서에도 '60만 년 전의 전기구석기 시대'의 기술이 유물의 사진과 함께 실리게 된다.(사사라기 일대는 199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손만 대면 출토되는 유물을 수상히 여긴 <마이니치> 신문사의 한 기자가 오랫동안 후지무라를 몰래 추적했고 마침내 그가 밤중에 날조된 구석기 유물을 땅에 파묻는 장면을 촬영하게 되었다. 이 명백한 증거 앞에 후지무라는 결국, 이제껏 사사라기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은 자신이 묻은 가짜 구석기 유물임을 밝히는 기자 회견을 가졌다. 이에 세간에서는 그간 일본 정부와 문부성이 날조에 묵시적 동의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 그동안 문부성과 후지무라가 발굴한 162곳의 유적을 전부 조사하라는 여론이 일었고, 최종적으로 그곳도 모두 허위 발굴로 판명이 난다.
이에 70만년 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인류 기원 역사는 다시 3만년 전으로 회귀하게 되었다. 사사라기 유적이 국가 사적에서 취소되고 교과서도 원위치되었음은 물론인데, 이와 같은 검증의 풍랑 속에 휘말린 벳부대학교의 가가와 미쓰오 교수가 자살하고, 또 앞서 발굴된 도치기 현의 고인류 인골 역시 조작된 15세기의 인골임이 판명나 이 역시 교과서에서 삭제되는 웃지 못할 희극이 또 한번 벌어졌다. 이 사건들은 모두 외신을 탔고, 이로 인해 일본 고고학의 신뢰와 체면은 땅에 떨어져 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발굴 조작을 최초로 보도한 <마이니치> 신문
조작된 구석기 유물을 묻고 발로 땅을 다지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포착됐다.
후지무라 사죄 기자회견을 보도한 각 신문들
이를 보도한 한국 신문
후지무라의 변: "마(魔)가 껴서....."
"아무튼 죄송하무니다"
20년간 사기행각을 이어온 후지무라는 결국 죄를 시인하고 사죄했으나, 일본 정부는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고 그 2년 후 날조된 역사만을 공식 정정했다.
그해 비해 우리의 주먹도끼는 정말로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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