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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자와 아일랜드의 비극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0. 4. 16. 00:53

    1) 아일랜드의 비극 '고르타 모르'

     

    코로나 여파로 판로가 막힌 강원도 감자가 길바닥에 나앉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요지인즉, 코로나 19 사태로 외식이 준 데다 개학이 늦어지며 급식 납품의 길까지 막힌 농민들이 햇감자에 밀린 겨우내의 저장감자를 어쩔 수 없이 길바닥에 내놓게 되었음이다. 따로 폐기하기도 그러니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가져가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내놓은 사람이나 주워가는 사람이나 모두 마음 불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별 뾰족한 방도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보도가 나간 며칠 후인 오늘 아침, 작은 기적이 있었다. 사정을 알게 된 서울 엄마들이 그 감자들을 앞다투어 주문해 바로 완판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나눔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감스러웠던 것은 서울의 마트에서는 감자가 정상가에 거래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에 네티즌들 사이에선 농산물이 합리적인 가격에 거래될 수 있도록 유통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개진되었는데, 그것이 이번 기회에 꼭 실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질병으로 인한 감자의 비극이 19세기 아일랜드에서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인체 감염 전염병이 아닌 파이토프토라(Phytophtora)라는 악성 곰팡이 잎 마름병에 의한 것이었고,(원인이 밝혀진 건 20세기 들여와서였다) 그 피해도 위의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고르타 모르'(An Gorta Mor, 대기근)라는 아일랜드어로 고착화되어 인류 역사상의 가장 참혹한 비극으로 남게 되었던 바, 대략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감자가 유럽에 전래된 건 당연히 1492년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일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필두로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을 터인데, 그 남미산 감자가 유독 아일랜드인의 주식이 된 데는 아일랜드 자체가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다는 비극이 선행되었다.(그 기간이 무려 300년쯤으로, 1534년 헨리 8세의 대대적인 침공과 함께 식민지 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다)

     

     

    헨리 8세(1491-1547)의 초상. 이 양반의 뻑적지근한 일생에 대해서는 '성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의 역사' 참조

    '성공회의 역사'

     

    그로 인해 아일랜드는 19세기 산업혁명의 광풍도 비켜가며 오직 전통적 농업국가로서 영국의 식량 공급처로서만 이용돼졌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땅 위로 줄기를 뻗는 밀, 보리, 귀리와 같은 작물은 거둬갔으나 결실이 땅 아래 줄기에 맺히는 감자는 천시하여 손 대지 않았던 바, 자연히 아일랜드인의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행히도 감자는 영양가에 있어서 그리 밀리지 않는 작물이었다.

     

    전통적 카톨릭 국가이기도 했던 아일랜드는 18~19세기에 이르러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국교인 가톨릭이 산아제한이나 임신중절 같은 인위적 인구 제한을 멀리하게 만든 까닭이었지만,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는 감자의 특성 또한 인구 증가의 요인이었다. 더욱이 감자는 영국인이 가져가지 않는 작물이었던 바, 최악의 경우라도 배고픔의 지경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 또한 작용했다. 아무튼 아일랜드인의 대부분은 하루 세 끼를 모두 요리법이 다른 감자로 충당했고 가축들도 전부 감자를 먹었다.

     

    그런데 1845년에 이르러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위에서 말한 잎 마름병이 돌며 푸르던 감자 밭이 점점 까맣게 타들어갔던 것이었다. 그렇게 변해버린 밭의 감자는 모두 썩어버려 단 한 톨의 감자도 건질 수 없었는데 그것이 1851년까지 무려 6년이나 지속되었다. 아일랜드인은 급속히 먹을 것이 줄어갔지만 영국은 구호를 외면하고 평소대로 곡식을 거둬갔던 바, (영국도 식량수급을 아일랜드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변명은 있을 수 있다) 800만 아일랜드인의 생계가 막막했을 것임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속절없이 죽어가는 아일랜드인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그럼에도 영국인 지주들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인류를 구원할 예수가 탄생한 날에도 아일랜드 농민들은 크리스마스 축제를 바라보며 쓰러져갔다. 형편이 개중 낫다는 항구 노역자들도 굶주리긴 마찬가지였으니, 상대적으로 풍작을 이룬 농작물과 과일은 영국으로의 반출을 위해 항구에 산더미처럼 쌓였음에도 그들 노역자들의 먹거리는 미국의 구호품으로 운영되는 무료급식소의 강냉이 수프가 전부였다.(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잉여농산물을 유럽 시장에 내다 팔기까지 했음에도)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으니, 아일랜드의 종주국이자 가장 부유한 나라 영국이 하지 않는 일을 미국의 구호단체가 항구적으로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당시 아일랜드인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죄를 지어 감옥에 가는 길이 유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콜레라와 이질, 티푸스와 괴혈병 같은 질병까지 창궐하였던 바, 아일랜드 섬 전체가 실재하는 지옥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죽어간 인구가 150만으로 거리에는 시체가 쌓였고, 섬 안에서 배고픔으로부터 자유로운 아일랜드인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블린 시내의 유명한 대기근 조각상

     

    아일랜드인이 살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은 관선(官船, Coffin ship)이라 불리던 이민선을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지로 떠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새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북아일랜드 런던데리를 비롯한 항구로 모여들었고 250만 명의 인구가 나라를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살 길을 찾지는 못했으니 썪은 감자로 연명하던 그들 아일랜드인 중의 20%가 신천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그들은 항구와 배 안에서,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다시 돌아오겠다는 염원으로서 아일랜드의 아리랑 '데니 보이'를 목놓아 불렀지만 조국으로 돌아온 자는 드물었다. 그 비극의 절정은 아마도 타이타닉호에서 죽은 3등칸 이주자들이었을 것이다.

     

     

    아일랜드 코브(Cobh) 항의 기념 조형물.  이민자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코브 항에서 배를 탔다. 이 조형물의 주인공은 미국으로 이민간 최초의 아이리쉬 이민자 남매인 애니 무어(Aniie Moore)와 동생이다. 애니는 아쉬움에 고향 쪽을 바라보고 있고 두 동생은 바다를 보고 있는데, 무사히 대서양을 건넌 이들 남매는 뉴욕 이민사무소의 첫 등록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1912년 4월 11일 아일랜드 코브(당시는 Queenstown) 항에 들어서는 타이타닉호
    영화 '타이타닉'에 재현된 장면. 이 배는 며칠 후 대서양 상에서 빙산과 충돌하며 1,514명이 희생된다.

     

    사고 후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위원회가 조직돼 사상 최악의 참사를 조사했다. 2,200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 가운데 1,500여 명이 죽었다. 구명보트는 왜 그렇게 부족했을까? 당시 규정에는 1만 톤 이상인 영국 선박은 구명보트를 열여섯 척 준비하게 돼 있었으므로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열여섯 척으로는 단지 1,200명 정도만 태울 수 있었다. 타이타닉호가 승객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승객을 1,200명 이상 탑승시키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구명보트 정원이 1,200명이었는데도 700명 정도밖에 타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의 500석에 가까운 자리가 남아있었다는 것은 정말 큰 불행이었다. 조사를 하면서 침몰 당시 상황이 하나씩 밝혀졌다. 1등석 승객의 63퍼센트, 2등석 승객의 42퍼센트가 구명보트에 탔으나 3등석 승객은 고작 25퍼센트만 구명보트를 탔다. 몇몇 3등 승객은 철제문과 방수벽에 갇혀서 구명보트에 탈 수 없었다. 그 결과 1등 선실과 2등 선실에 탄 아이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았다. 그러나 3등 선실에 있던 아이들은 3분의 2가 죽었다.(이종호 저 <미스터리와 진실>) 

     

     

    당시의 타이타닉호 3등칸 탑승권 / 날짜 4월 11일과 목적지 뉴욕이 뚜렷하다.
    코브 항에서 놀음을 하던 잭은 판돈으로 걸린 타이타닉호의 탑승권을 따게 되고, 막 출항하려는 배에 가까스로 오른다.

     

    그때의 장면을 다시 한번.....

     

    아일랜드 민요 '런던데리 에어'(Londonderry Air) 리코더 연주곡 

     

    나나 무스쿠리가 부르는 '런던데리 에어'(데니 보이).

    '런던데리 에어'에 프레드릭 웨덜리가 가사를 붙인 '데니 보이'는 우리나라에서 '아 목동아'로 번안되어 교과서에 실렸다.

     

    린 디옹의 주제가와 함께 '타이타닉'의 감동을 다시 한번.....

     

    영화 '도망자' 속의 성 패트릭의 날

    성 패트릭의 날(Saint Patrick's Day)은 아일랜드의 성직자였던 패트릭의 죽음을 기리는 날로 아이리쉬 이민자에 의해 전승돼 온 종교의식이자 축제이다. 현재 미국 내의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약 3천5백만 명으로 아일랜드 공화국 인구의 7배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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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