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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는 어디서 수사학(修辭學)을 배웠을까? - 세포리스 설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4. 25. 06:20

     

    예수님이 말 잘하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바, 흡사 수사학(修辭學) 독선생이라도 붙여 교육시킨 것 같다. 물론 예수에게 그와 같은 고액과외를 받을 기회가 주어졌을 리 만무하지만 실제로 당시에는 수사학 학원(예전의 웅변학원, 요즘의 스피치 학원 같은)이 있어 여유 있는 집 자제들은 반드시 수사학을 공부했다. 꼭 정치가를 지향하지 않더라도 별다른 미디어가 없던 그 시절, 포룸이나 광장, 혹은 극장에서 멋진 연설로써 자신의 뜻을 피력하고 싶어함은 뜻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의 로망이었다. 

     

    이에 당대 최고의 웅변가요 수사학자로 불리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는 로마 포럼에서의 단 한 번의 연설로써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결국은 최고위직인 통령(consul)까지 될 수 있었다. 당시 중앙 귀족 출신이 아닌 지방 귀족 출신으로 통령의 지위에 오르는 일은 극히 드문 경우였으니, 요즘으로 말하자면.....(다 아실 것이니 이하 생략)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도 포룸에서 그 당위성을 역설했고, 안토니우스 역시 포룸에서 그것을 반박했는데, 대중의 지지가 백중이 되자 결국 힘으로 한판 붙게 된 것이었다.

     

     

    연설하는 키케로 상

    키케로는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도덕적으로 건전치 못한 피고인의 재판도 변호해 곧잘 뒤짚곤 하였다. 하지만 자신을 변호하는 데는 실패했던 바, BC 43년 10월 옥타비아누스와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삼두정이 성립되자 붙잡혀 처형된다.

     

    로마의 포룸

    처형당한 키케로의 머리와 두 손은 그가 즐겨 연설하던 파란티네 언덕 포룸 연설대인 로스트라 위에 전시되었다.

     

     

    1931년 여름, 미국 미시건대학의 워터맨 교수는 세포리스(찌포리)’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의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면서 예수를 연관시켰다. 그가 이 폐허의 옛 도시를 주목한 이유는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자신의 책 '유대인 고대사'에서 그곳을 갈릴리 왕국의 첫 번째 수도로 적은 데 기인했다. 요세푸스는 이곳을 기원전 100년 하스몬 왕조의 행정 중심지로도 설명했는데, 이곳이 로마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은 주변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가 유대 지방을 점령하면서부터였다.

     

    발굴 결과 과연 뭔가가 있었으니 가장 눈에 띈 것은 약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이었다. 아울러 화려한 모자이크 바닥 장식이 된 귀족들의 저택과 공공기관 건물지가 차례로 발굴되어 이른바 '세포리스 문화설'의 발단이 되었다. 이중 모자이크 바닥의 로마 저택들은 3세기 이후의 유적으로 밝혀지며 예수 시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판명났지만 기타 1세기의 주택들과 공공건물지는 예수와의 관계를 물을 수 있는 장소였다.(1세기 유적은 1985년 이후 행해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미국 듀크 대학 공동 발굴로 더욱 명확히 드러났다)

     

    세포리스의 유적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물론이요 청년 예수도 이곳에서 일을 했을 가능성을 말해주었다. 그와 같은 상상을 하게 만든 것은 세포리스 아래 6km 지점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살던 나사렛 마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저명한 성서고고학자 제롬 오코너(Jerome Murphy O'Connor)는 마태복음 서두에 나오는 요셉 부부의 나사렛 정착 이유를 이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즉 요셉 부부가 나사렛 마을로 가 정착하게 된 건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레오의 폭정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일자리를 구하려는 목적도 수반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세포리스의 위치

      

    공중에서 찍은 세포리스 원형극장

     

    1985년 발굴 당시의 원형극장

     

    일부 복원된 원형극장

     

    함께 정비된 십자군 시대의 망루

     

    주변 유적 발굴 광경

     

    바퀴 자국이 선명한 도로

     

    세포리스 유적 발굴 광경

     

    모자이크 장식 바닥의 공공건물지

     

    '갈릴리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모자이크 

    1987년 발굴된 귀족의 저택의 이 모자이크 그림 속의 여인은 이후 세포리스 국립공원 안내문의 표지모델이 되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세포리스는 기원전 39~38년 헤롯대왕이 로마군의 도움을 얻어 당시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파르티아 사람들을 몰아내고 획득한 땅이었다. 이후 기원전 4년 헤롯대왕이 죽은 다음 이곳 세포리스는 그의 둘째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갈릴리-페레아 분봉국의 수도가 되었던 바, 자연히 많은 토목공사와 건축공사가 뒤따랐을 것이었다. 따라서 제롬 오코너의 추론, 즉 요셉이 일거리를 찾아 나사렛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다.

     

    성서에는 요셉의 직업과 예수의 직업이 '텍토노스'(τεκτωνος)’라고 명시돼 있다.(마태 13:55, 마가 6:3) 이 텍토노스가 목수인가 석공인가를 놓고 오랜 논쟁이 있었으나 지금은 일반적인 '건축노동자'로 정리된 듯하다. 혹자는 '텍토노스'가 통상적 건축노동자, 이른바 노가다가 아니라 규모가 있는 종합건축업자나 건축기사를 지칭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그것은 아닐 듯싶다.(그 정도의 사회적 위치면 세포라스에 살았지 출퇴근에 왕복 3시간이 소요되는 궁벽한 나사렛을 선택했을 리 없을 것이기에)  

     

    아무튼 예수는 서른 무렵인 AD 25년까지는 건축노동자로 일하고 이후로는 노가다 생활을 접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서른 셋 즈음에 갈릴리 호수변의 가버나움으로 이사 와 그곳을 중심으로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다닌다. 헤롯 안티파스는 AD 28년 무렵 갈릴리 호수변에 티베리아라는 당대 황제의 이름의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으로 천도를 하는데, 예수 역시 이 무렵에 가버나움으로 왔던 것이다.

     

    ~ 이상은 마태복음(4:13)과 누가복음(3:1)의 내용을 종합해 추론한 것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이때가 티베리우스 황제 재위 15년째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AD 28년이 도출된다. 그런데 신도시 공사가 한창일 AD 28년 이전 예수가 갈릴리로 왔다는 말이 없으므로 서른 즈음에 기존의 생활이 정리됐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가 BC 4년에 태어났다고 하면 서른 두 살부터 공생애가 시작되는 것이요, 나의 주장대로 BC 5년에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III') 서른 셋부터 공생애가 시작되어 서른 여섯에 죽게 되는 것이다.(☞ '예수 죽음의 비밀 I - 그는 언제 죽었나?')

     

    이렇게 보면 예수는 적어도 서른 전까지는 세포리스에서 노가다를 했고, 그 이전부터도 아버지 요셉을 따라 세포리스를 왕래했을 것인데, 그러면서 위 원형극장에서 행해지는 연극 관람을 했을 것이다. 연극 공연이 있는 날이면 어린 예수는 아버지 요셉이 일을 하는 동안 극장에 있었을 것이고, 공연이 없는 날에는 리허설이라도 지켜봤을 것이다. 이는 나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내용으로, 예수가 위선자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ης, 국역성서에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이상하게 번역된)를 꾸짖는 성서의 내용에서 휘포크라테스의 원 뜻은 '배우'라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예수가 관람했을 세포리스의 극장과 연

     

     

    즉 예수는 무대 위에서 실제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 휘포크라테스를 위선자에 빗대 말했던 것이니, 쉽게 말하자면 '이 배우 같은 것들아'와 같은 꾸짖음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상대방의 공세를 기막히게 받아치며 오히려 역공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가이샤(Caesar)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태 15:21)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 8:7)와 같은 대목은 그야말로 연극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인 바, 어릴 적부터 익히 보아 와 육화(肉化)된 대사들이 적재적소에 활용된 예가 아닐까 한다.

     

    그밖에도, 왕궁에서 사는 부드러운 옷 입은 자를 쉽게 입에 올린다거나(마태 11:8) 빚진 종을 불쌍히 여겨 탕감시켜주는 왕이나(마태 18:22-36)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푸는 왕에 대한 비유,(마태 22:1-14) 전쟁을 일으키는 왕들에 대한 언급(누가 14:31) 등은 왕실 생활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그가 표현하기 힘든 말인 바, 모두 자신이 보아 온 연극에서 기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포도나무나 포도주, 포도밭 주인 등 예수의 설교 중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포도에 대한 비유 역시 주신(酒神) 디오니소스 축제 등의 연극에서 단골 소재나 소품으로 등장하는 포도가 활용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마태복음 21장에 등장하는 포도밭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비유는 예수 자신이 직접 본 연극의 스토리일 수도 있다.

     

    나아가 예수는 자신이 직접 연기를 하기도 했다. 4복음서에는 공통적으로 예수가 나귀를 빌려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구약성서 스가랴서(書)에 써 있는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의 광경을 흉내 낸 것이다. 다윗 왕 뿐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의 왕들은 자신의 겸손을 나타내기 위해 개선(凱旋) 시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바, 예수도 그처럼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한 것이었다. 즉 예수는 구약을 대본 삼아 연극을 한 것인데, 이 같은 단순 의도와는 다르게 예수의 행동은 예루살렘의 유대지도자들을 크게 긴장시키고 자극하였으니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계기가 된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예수

     

     

    텍토노스였던 예수가 유복한 생활을 했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7:41)에 나오는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자에 대한 일례"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며 성전 앞 환전상을 사납게 내몬 일(요한 2:13-22) 등은 자신이 겪은 고리대금 업자에 대한 경험이나 분노의 표출일 수도 있다.

     

    또 예수는 그와 같은 생활을 하며 주변의 어려운 자들과 억울한 자들, 그리고 병들고 가련한 자들을 수없이 겪었을 터, 서른 무렵에 이르러 이들을 위한 길을 걷고자 결심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그 바탕에는 어릴  세포리스에서 익힌 수사학이 큰 자산과 자신감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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