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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촌토성이 함락되던 한성백제 최후의 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6. 02:10

     

    백제 도성의 위치에 대해 언급한 가장 비중 있는 문헌사료는 단연 <삼국사기>다. 그 책,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 조 기사에는 "하남(河南) 땅은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高岳)을 의지하고, 남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며 서로는 대해(大海)가 막았으니 이 천험지리는 얻기 어려운 지형이다..... 이에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池..... 惟 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溫祚 都 河南慰禮城.....

     

    이를 보면 온조는 국초(國初)에 이미 하남위례성에 정도(定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원전 6년(온조왕 13) 음력 5월, 왕은 신하에게 다시 한수(漢水) 이남의 땅을 거론한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 소서노)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이처럼 편치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況今妖祥屢見, 國母弃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冝都於彼, 以圖久安之計.”

     

     

    드라마 주몽 속의 소서노.(부여를 떠나 남녁으로의 이주를 단행한 소서노가 BC 6년에 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해 음력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울타리를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백성을 옮기는 시범 이주를 행하고, 이어 9월에 성과 대궐을 쌓고, 

     

    秋七月, 就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戸. 九月, 立城闕.

     

    그리고 그 다음해인 온조왕 14년(BC 5) 봄 정월에 드디어 도읍을 옮긴다. 

     

    十四年, 春正月, 遷都.

     

    이 남쪽의 도읍은 이후 한성(漢城), 또는 하남위례성으로 불리게 되는 바, 그래서 어찌 보면 이상하다. 한수 이북에 있던 위례성과 한수 이남의 위례성이 어떻게 똑같이 하남위례성으로 쓰이는가, 둘 중 하나는 오기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정리되었다. 한수 이북 위례성의 존재는 13년에 불과하였으므로 이후 480년간의 역사의 기록에 사용된 하남위례성이란 용어가 <삼국사기> 온조왕 초기 기사에 관행적으로 그대로 쓰였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생각이 누구에게나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하남위례성을 수도로 한 493년의 기간을 편의상 한성백제라 불러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4년조의 "한강 서북에 성을 축조해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는 기사 이래로 수도가 한성이라 불려지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한성이 하남위례성인 셈인데, 그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이에 문자 그대로 하남시의 어느 곳이 위례성으로 비정되기도 하고,(구체적으로는 춘궁동) 서울시 풍납동의 풍납토성과 올림픽공원 내의 몽촌토성이 하남위례성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500년 한성백제의 의문(정확히는 493년)이 아이러니하게도 '한성백제 마지막 날'에 이르러 풀린다. 바로 한성백제 500년의 마지막 날인 475년 음력 9월 어느 날의 기록이 한·일 사서에 공(共)히 전하기 때문인데, 특히 <일본서기>는 그 한성이 위례성임을 명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백제의 기록에 전하길 개로왕 21년 겨울 고구려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하였고 왕성이 함락되었던 바, 백제는 결국 위례성을 잃어버리고..... (百濟記傳 蓋鹵王 乙卯年冬 貃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일본서기> 웅략천황(雄略天皇) 20년조

     

    <삼국사기>에는 당연히 그날이 더욱 상세하니, 한성이 함락되고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참살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 고구려의 고위관직명)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재증·고이는 두 글자로 된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이어 남성(南城)을 공격하니 성 안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체포해 말에서 내려 절을 하게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았으며,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至是, 髙句麗 對盧 齊于·再曽桀婁·古尓萬年 再曽·古尓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 戕之. 桀婁·萬年夲國人也, 獲罪逃竄髙句麗.

     

    이때 고구려 왕은 장수왕이다. 앞서 '초기 백제를 찾아서 3 - 깜놀! 그간 몰랐던 한성백제 유적'에서 말했듯 고구려 장수왕은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를 입수하여 개로왕이 북위에게 고구려 침략을 사주한 사실과 선조인 고국원왕을 거듭해 모욕한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이에 노구에도 불구하고(※ 이때 나이 82세. 그는 98세까지 살았다) 대군을 몰고 가 백제를 공격하는데, 사실 남침에 대한 대비가 있었음에도 여러 건축공사와 토목공사로 국력이 피폐해진 한성백제는 패망하고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초기 백제를 찾아서 3 - 깜놀! 그간 몰랐던 한성백제 유적

    이제 초기 백제의 성인 삼성동토성에 대한 봉은사 수미산 쪽의 흔적은 찾은 셈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4년조의 기사에 언급된 "한강 서북에 성을 축조해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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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로왕이 참수당한 아차산성

     

    정확히 하남위례성이라고 직시하지는 않았지만 <삼국사기>는 한성이 어느 곳인지를 충분히 설명해준다. '북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빼앗고, 이어 남성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인즉 백제의 수도 한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이성(二城)체제로 운영되었음이 설명된다.(※ 고구려 또한 이와 같은 이성체제로 도성을 운영했다) 이는 또 '고구려군이 대성(大城)을 7일 주야로 공격하고 왕성을 함락시켰다'는 위 <일본서기>의 내용과도 상통한다.

     

    즉 치소(治所)인 풍납토성에 있던 개로왕은 고구려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풍납토성보다 안전한 몽촌토성으로 대피했던 것이나, 그 몽촌토성마저 함락됨으로써 결국 붙잡히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성체제 학설은 학자들의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金起燮 1990, 朴淳發, 2001, 鄭載潤, 2003) 나아가 심광주 박사는 한성백제 함락의 그날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그려낸다.(☜ '해시태그는 광개토대왕의 상징부호였을까?')

     

    서기 475년 9월. 고구려 장수왕은 정예병 3만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다. 평양을 출발한 고구려군은 예성강과 임진강을 건너 양주를 지나 한강을 건넜다. 백제군은 전력을 다하여 방어를 하였지만 고구려군은 7일만에 북성인 풍납토성을 함락시키고, 남성인 몽촌토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이 몰려오자 몽촌토성에서 이를 지켜보던 백제 개로왕은 지금의 올림픽파크텔이 있는 서문으로 도망하다가 고구려군에 잡혀서 아차산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남하를 계속하여 서쪽으로는 금강 상류지역부터 동쪽으로는 영일만 지역에 이르는 곳까지 진출하였다.

     

     

    고구려 통구 12호분의 적장참수도

     

    몽촌토성은 1980년대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네 차례(1984~1989) 조사가 있었고, 최근에도 한성백제박물관의 발굴이 있었다.(2013~2018) 이상의 조사로써 몽촌토성은 왕성임이 밝혀졌으며, 온조왕 시대에 초창된 풍납토성이나 삼성동토성과는 달리 3세기경에 건립된 토성이라는 사실이 출토 유물을 통해 확인되었다. '한성백제 최후의 날'이 펼쳐진 몽촌토성을 좀 더 자세히 보자면 다음과 같다. 

     

    몽촌토성은 언뜻 평지(平地)성처럼 보이나 실은 산성으로, 표고 44.8m의 언덕에 구축되었다. 둘레는 약 2.7km이며 높이 4~7m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릉이 끊어진 네 다섯 곳을 문지(門址)로 보아도 무방하다. 전체적으로는 앞서 말한 삼성동토성처럼 자연 구릉을 살려 축성하였으며, 높이를 높이고자 할 때는 성토하여 높인 듯하고, 구릉이 이어지지 않은 구간에서는 판축법과 성토법으로 성벽을 만들었다.(자연 지형에서는 급경사를 만들기 위한 삭토법도 시행되었다)

     

    따라서 몽촌토성은 일종의 포곡식 산성으로 볼 수 있으며, 범람과 개발 등의 여파로 망가져버린 풍납·삼성동토성과 달리 비교적 원형이 살아 있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성의 주변으로는 3면에 해자가 둘러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올림픽공원을 조성하며 복원되었다. 그러면서 인위적인 호수 같은 것이 만들어졌으나 본래는 한강 지류인 성내천의 자연 물길을 활용하였거나 수로(水路)로써 성내천의 물길을 끌어들인 좁은 해자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몽촌토성 해자와 성문지(●)

     

    호수로 변한 그 해자에서는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그야말로 몽환적 풍경을 연출해 이름 그대로 꿈의 마을(夢村)에 온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근방의 회사에 근무할 때는 방이동 고분군, 메타세콰이어 숲길과 함께 피곤한 영혼의 안식처가 돼 주기도 했던 해자이다.(당시 근무처는 최악이었다. ㅜㅜ;;) 아무튼 그때 이후로는 오늘이 첫 방문인데 싱그러움은 여전하다. 지금이 한겨울인데도 말이다. 

     

     

    몽촌토성으로 가는 곰말다리 / 곰말은 곰마을의 뜻으로 이 옛 지명이 변해 꿈마을, 곧 몽촌이 되었으리라 유추된다. 성 내부의 면적은 정상부를 기준으로 216,000㎡(67,400평), 전체 길이 2,383m, 높이 12~17m, 가옥 2천 호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곰말교와 몽촌토성 해자 전경
    몽촌토성 북문지(北門址)
    몽촌토성 목책 / 성이 엄연한데 목책은 왜 둘렀을까? 건설 당시 판축 시공을 하기 위해 목재 기둥을 세웠던 구멍이 발굴조사 때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목책을 세운 자리인줄 알고 목책을 복원해놓았다. 목책을 무시하고 이 구간에서 성벽의 판축이 있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이 근방이 낮은 이유는 판축이 오래돼 무너져 내린 까닭이다.
    몽촌토성 서북쪽 성벽
    몽촌토성 서북쪽 성벽
    망루가 있었던 망월봉
    나 홀로 나무 / 왕따 나무로 불리기도 하는 유명한 나무다. 이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 오는 분도 있다 한다. 나 홀로 나무 뒤로 보이는 언덕에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 홀로 나무 왼쪽이 망루, 오른쪽이 궁궐 방향이다.
    해질 무렵 포토존에서 찍은 사진
    몽촌토성 서문지(西門址) / 개로왕이 달아나다 붙잡힌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올림픽파크텔 방향인 서북쪽으로는 궁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심광주 박사가 개로왕이 서문으로 달아났다고 말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철제 무기가 대량 발견된 몽촌토성 / 백제 · 고구려군 간의 치열한 격전을 말해준다. (몽촌역사관)
    몽촌토성 출토 고구려군 무기 (한성백제박물관)
    백제군 무기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출토 세발토기 (몽촌역사관)
    몽촌토성 출토 궁(宮) 자 토기 / 몽촌토성이 궁성이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출토 돌절구 / 차( 茶) 잎을 갈던 돌절구로 공이와 함께 출토됐다. (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출토 주요 유물 (몽촌역사관) / 위에 표시는 안됐으나 그 밖에도 2기의 합 구식(合口式) 옹관을 비롯하여 원통형 토기 적갈색 연질토기 회백색 연질토 갈색 회유 전문도기 편(灰釉錢文陶器片) 토제 어망추 철기유물 등 500여 점이 출토됐다. 그중 문살무늬[格子文] 노끈 무늬[繩文]를 새긴 두드림 무늬[打捺文] 토기는 백제 건국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기와편도 다량 출토되었는데 이는 몽촌토성이 격이 높았던 성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몽촌토성에 대한 설명문 (몽촌역사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 문양 토기 / 점령군인 고구려군이 남긴 유물이다.
    # 문양이 뚜렷하다. / 이 문양에 관한 설명은 '하남 위례성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해시태그' 참조

     

    하남 위례성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해시태그

    한성 백제의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이 어디인가는 우리 역사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여지껏 그 위치가 설왕설래되고 있다.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도 그 유력 후보 가운데 하나로서 정약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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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의 위치와 몽촌토성 출토 장군
    나 홀로 나무
    보호수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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