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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만일 북한을 폭격했다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3. 30. 10:32
* '바이든 정부에 도발한 북한 & 1994년 영변 폭격 직전 상황'에서 이어짐.
1994년의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 일보 직전이었다. 그 일촉즉발의 위기를 수습한 사람은 평소 엉뚱한 데가 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었다. 결론적으로는 그의 엉뚱한 성격이 전쟁을 막은 것이었으니 카터는 입북(入北)하고 얼마 후 백악관으로부터 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이 결정 났으니 빨리 북한을 빠져나오라는 전갈이었다. 하지만 카터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일성을 만났는데 웬일인지 그는 순순히 카터의 권유를 따랐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왔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핵 폐기 수순을 밟겠다는 것이었다.
북한 당국이 카터의 전화를 도청하지 않았을 리 없다. 도청이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중의 한 통화가 위의 내용이었다. 백악관은 혹시라도 미국 전 대통령이 인질로 붙잡힐까 싶어 이 같은 전화를 한 것인데 여기에 김일성이 놀라 바싹 얼어붙었다. '미국이 정말로 영변 핵시설을 폭파하려는구나. 아이고, 이러다 X 되겠다'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앞서 말한 대로 "미국이 행동을 유보하면 (핵) 재처리 문제를 협상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게 된 것이었다. 마침 이를 종용하는 미국 전 대통령도 곁에 있었다.
카터는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카터는 미 국무부 특사였던 로버트 갈루치와 통화하기를 원했지만 앤소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받았다. 짧은 통화를 마친 레이크는 클린턴에게 곧바로 귀속말로 자신이 들은 위의 내용을 전했고 클린턴은 다시 백악관 안보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1시간가량의 심각한 논의 끝에 폭격 취소의 결론이 났다. 매파인 페리 국방장관과 존 셸리 캐슈빌리 합참의장은 그 조건으로 주한미군의 증강을 제시했다.
매파들은 여차하면 다시 때리겠다는 속셈이었으니 그들은 91년 걸프전 때 페르시아만에서 보여준 막강 미군의 위용을 이번에는 원산만에서 재현하고 싶어 하는 듯하였다. 클린턴은 OK했고 무척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미국이 굳이 군사행동에 나설 이유가 없었고, 주한미군의 증강은 그 대안일 수 있었다. 시간을 보니 H아워 꼭 한 시간 전이었다. 미국의 영변 폭격 작전은 그렇듯 아슬아슬하게 종료됐다.(페리 회고록과 CNN 보도에 근거해 작성된 내용임)
오늘 아침까지 북풍한설 몰아치던 한반도에 그때부터 갑자기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회담 이후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만수산 인민회의장(주석궁)에서 뒤늦은 기념 촬영을 하고 만찬을 가졌다. 그리고 6월 28일 난데없는 뉴스가 터졌다. 남북이 곧 판문점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접촉을 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7월 25~27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요지경 속 같은 시절이었다.
그 남북회담을 이끌어낸 사람도 카터였다. 내친김에 좀 더 가보자 하는 그 다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달인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급사하며 잠시 일었던 남북한의 해빙 무드는 다시 없던 일이 됐다. 솔직히 남북대화는 영변 사태로 궁지에 몰렸던 김일성 주석의 물타기 같은 것이어서,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해도 크게 기대할 무엇은 없었을 터였다.
어찌 됐든 싱겁게 끝나버린 1막 2장의 '한 여름밤의 꿈'이었지만, 북한에서는 이 일련의 사건이 꽤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듯, 카터의 방북과 김일성의 사망을 주제로 하는 <영생>이라는 특별한 소설이 출간되기도 했다.(1993년 섣달그믐부터 김일성 사망 후 영결식까지의 일들이 평양을 배경으로 쓰여졌는데, 여기서 특별한다고 한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이름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북한에서는 보기 힘든 소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의 허락을 받아 출간되었을 것이라여겨진다. 하지만 내용이 특별하지는 않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카터는 6월 16일에 이어 가진 17일 회담에서 김일성의 건강을 물었고, 김일성은 "건강하다. 앞으로 10년은 더 정치를 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10년은커녕 한 달도 못 돼 사망을 했던 바, 그가 당시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가 지대했는지 알 수 있다. 사인은 앞서 말한 대로 정신적 피로 누적으로 인해 발생한 심근경색과 심장쇼크였다.
김일성 사후 북핵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북 핵시설 폐기를 위한 경수로 건설 쪽으로 합의를 보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KEDO(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가 발족되었으나 이렇다 할 진척 없이 김정일의 시간 끌기 직전에 끌려갔다. 한마디로 북핵 포기 의사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김정일은 2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였던 바, 이른바 '2차 북핵 위기'를 불러왔다. 하지만 북한의 핵무기는 아직도 건재하며 ICBM을 지향하는 북한 미사일 시험 발사는 계속되고 있다. '핵무기를 탑재한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탄'. 이것이 김 씨 왕조 3대에 걸친 욕망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1994년에 영변을 폭파했다면....?'이라는 시나리오가 이어지고 있다. 아직 영화화는 되지 않았지만 그 작가 중의 한 사람인 한국계 미국인 마이클 리는 이렇게 말한다.(그는 실제로 1994년 북한 폭격 작전의 일선에 섰던 사람이기도 하다)
"저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도 그때 폭격이 있었어야 했다고 봅니다. 만일 그때 북폭이 이루어졌다면 북한이 반격을 했더라도 우리가 입는 피해는 극히 제한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기회를 놓쳤고, 이후 북한은 너무 커져버렸습니다. 지금은 북한을 칠 수도 없지만, 혹 그럴 상황이 온다면 피해는 그때보다 훨씬 클 겁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지금은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된 것이죠."
그의 결론은 카터의 훼방으로 인한 백악관의 정치적 계산착오였다. 그 외 다른 강경론자는 이렇게 말한다.
"미군이 우리에게 아무런 언지도 없이 작전을 감행했다고 뭐라 하는데, 미군이 왜 우리에게 통고를 합니까? 한반도 작전통수권이 원래 걔네들한테 있잖아요? 우리한테 말해봤자 괜히 시끄럽만 하죠. 물론 폭격했으면 북한이 반격했겠죠. 페리 국방장관도 '궁지에 몰린 북한이 절망 어린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오히려 그게 기회일 수 있었습니다. 거기 대비해 당시 주한미군이 사상 최고로 증강됐고, 한국의 국방력 역시 사상 최고점이었으니까요."
(6.25 전쟁 때와 같은) 예상 가능한 러시아의 지원이나 중국의 위협에 대해서도 이렇게 답했다.
"소련이 망한 후 당시 러시아의 총 GDP가 한국 절반 수준에 불과했어요. 러시아의 국방비도 형편없어서(한국의 절반 이하) 핵잠수함이나 핵미사일 폐기도 미국이 공짜로 대신 해주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움직일 처지가 아니죠. 중국의 개입도 아마 없었을 겁니다. 당시 중국은 1989년 민주화 운동(이른바 '천안문 사태')의 불씨가 아직 꺼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게다가 당시는 '사상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자'라 불리는 조자양(자오쯔양) 총서기가 물러난 지 얼마 안돼 그를 따르는 세력도 건재했습니다. 군을 움직였다가는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 경제와의 상관성도 말했다.
"지금 중국의 경제발전은 등소평이 발탁한 조자양이란 인물이 만들어놓은 산물입니다. 1993년, 강택민(장쩌민)이 조자양을 밀어내고 세력을 잡긴 했지만 그 역시 시장경제주의자입니다. 그의 체제 하에서 중국은 해마다 8% GDP 성장을 유지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죠. 이런 그가 경제를 후퇴시키는 전쟁을 택할 리 없었을 겁니다. 모택동의 한국전 참전이 중국경제를 20년 이상 후퇴시켰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을 테니까요."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김일성은 심근경색으로 곧 사망했을 테고, 북한 주민들은 이래저래 패닉상태에 빠졌을 것이니, 어쩌면 북진통일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보면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셈이죠."
그의 말은 여기까지이다. 그런데 한가지 오류가 있었다. 북한이 침입을 받게 되면 중국은 전쟁에 자동 개입된다는 것을 간과했다. 1961년 김일성과 주은래가 맺은 '북·중 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때문이다.(이 조약은 20년마다 갱신된다) 중국이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는 있겠지만 한반도에 중국군이 투입되는 상황은 피할 수 없다. 물론 한국도 침공을 받으면 1953년의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의거, 미국이 자동 참전한다.(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나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후 1년 뒤 조약을 종지시킬 수 있다)
한반도는 이와 같은 국제관계가 얽혀 있어 상호 전면전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분단이 고착화될 수 있다. 우리에게 통일이란 어쩌면 희망고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그와 같은 분단의 고착화보다 더 나쁜 경우는 북한이 중국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흡수될 때이니, 그럴 경우 우리는 북한 지역을 영원히 수복하지 못할뿐더러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 국제관계란 냉엄하고 또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결론인즉슨 우리끼리(좌·우를 말함이다) 만날 싸우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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