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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정부에 도발한 북한 & 1994년 영변 폭격 직전 상황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3. 29. 05:31
21일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 북한이 지난 21일 서해상으로 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지난해 4월 14일 이후 약 1년 만인데 미국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로는 처음이다.
WP(위싱턴포스트)는 이번 시험발사가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대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직접적 도전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25일(현지시각) 모두가 기다리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반응이 나왔다. 바이든은 자신의 취임 첫 기자회견이기도 한 그 자리에서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유엔 결의안 1718호를 위반한 것"이라며 "더 이상 긴장을 고조시킨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천명했다.
1718호 결의안은 지난 2006년 북한의 1차 핵실험에 대응해 유엔이 채택한 제재안으로,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금지 조항을 담고 있다. 바이든의 발언은 '원칙적 대응'이었기는 하되, 미 본토에 위협이 되지 않는 단거리 미사일은 묵인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과는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이날 미국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책임을 묻겠다는 뜻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산하 대북제재위원회 소집을 요청했다.
25일 바이든이 대북 발언의 요지: "확대를 선택하면 응답이 있을 것이다."(There will be responses if they choose to escalate) 비약이긴 하지만, 갑자기 클린턴 행정부 당시 북한 폭격 일보직전의 상황이 오버랩됐다. 잠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그 무렵(1994년) 북한이 이미 핵실험을 마쳤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러시아 KGB 요원의 입을 통해 처음 밝혀졌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구체적 증언들이 나왔던 바, 북한은 1956년부터 핵개발을 시작했고(당시의 중공보다 앞섰다) 그리하여 퇴역한 파키스탄의 핵무기 과학자를 데려다(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이다) 1990년 이전에 핵무기를 완성시켰다는 것이었다.
* 그런 소문 속에 북한은 1993년 1월 NPT(핵확산 금지조약)를 탈퇴하고, 1994년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단의 북한 활동을 막는 등 겁대가리 상실한 행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설이 기정사실화 되기 한 해 전인 1993년 5월, 북한이 노동1호 미사일을 동해상으로 쏘았다. 미사일은 550km를 비행한 후 동해바다에 아무 피해 없이 떨어졌지만 그것이 일본(혼슈)을 향했다는 사실에 일본은 난리가 났고, 미국 또한 긴장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것저것 보도되는 외신을 받아 불확실한 뉴스를 쏟아냈으니, 당시 최대 사정거리 1,300km 정도로 여겨지던 북한 미사일은 어느새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급이 되었고, 알래스카, 하와이를 넘어 미국 본토까지 도달할 위력이 되었다.
* 우리는 그때처럼 이번에도 아무것도 몰랐으니, 21일 발사된 미사일에 대해 아예 언급도 안 했고,(알았는지 몰랐는지 알쏭달쏭) 외신이 떠들어대자 그제야 발표를 했다. 그러면서 순항미사일인지 탄도미사일 인지도 몰라 처음에는 순항미사일이라 했다가 엊그제 청와대 NSC가 탄도미사일 같다며 말을 바꿨다.(딱하다 --;;)
** 1993년, 미사일의 명칭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노동(勞動, labor) 1호라고 했다가(노동당의 '노동'일 거라고 착각함) 미군의 정찰위성의 탐색 결과로 첫 발견지인 함경남도 함주군 로동리(蘆洞里)의 '로동'이 올바른 명칭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그후 북한이 로동 1호가 아니라 화성 7호라고 하니까 따라 말을 바꿨다.(그러다 언제부턴가 다시 노동 1호가 됐다)
이후 미국이 안전과 보복 차원으로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폭격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핵탄두 미사일이라는 게 따로 있는게 아니라 미사일 대가리에 핵폭탄을 탑재하면 그것이 핵 미사일인 바,(단 소형화 능력은 필요로 한다) 지금 김정은이 큰 소리를 치는 배경도 그것이다. 수틀리면 미국 본토를 때려버리겠다는 것이다.(북한은 뭔지 모르는 아래의 쇠덩이를 핵폭탄이라며 가끔 공개한다. 무쎠워~ --;;)
2016년 3월 김정은이 무시무시해 보이는 쇳덩이 앞에서 노가리를 까고 있다. 뉴스에서는 핵폭탄의 기폭장치로 추정된다는데, 정말로 그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나가사키대학 핵무기근절연구센터는 북한의 보유량을 10~20개, 미국과학자연맹(FAS)은 35개, 미국 국방대학 산하 국가전략연구소(INSS)는 60개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자 세계가 긴장했다.(의외로 우리나라는 모르고 있었다) 당시의 미국은 하겠다 하면 하던 시절이었고, 막을 나라가 없었다. 구소련은 해체되어 과거의 힘을 상실했고 중국은 아직 빌빌 싸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핵보유국의 자신감이 넘쳤던 북한은 1994년 6월 IAEA 탈퇴를 선언하며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를 불러왔다. 그리고 김일성은 여전히 자신만만했으니, "만일 이 일로 북한을 제재하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며 오히려 으름장을 놓았다.
아마도 김일성은 '설마 너희가 폭격이야 하겠느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변 핵시설 정밀 폭격 계획은 실행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북한 수뇌부들은 맨붕에 빠졌다. 나중에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지만, 이때 수뇌부들은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제 가족들을 중국으로 피신시켰다. 물론 미8군 내에 있는 주한미국인들도 소개(疏開)되었다. 북한의 반격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기타 주한 미국인의 피신계획이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애완동물도 포함됐다)
목표였던 영변 북핵 시설 당시 청와대도 몰랐던 미국의 북한폭격 하지만 펜타곤의 강경파들, 특히 북폭 계획을 입안했던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미국이 폭격을 하더라도 전면적인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북한이 질 것이 뻔한 마당에 김일성이 무모한 승부를 걸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이 북한에 원한 건 핵무기와 핵시설의 폐기일 뿐, 체제의 붕괴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낙관론을 이끌었다.
그때가 1994년 6월이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청와대가 모르는 것을 국민이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공교롭게도 그해 3월 북한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박영수 부국장의 유명한 '불바다' 발언이 있었다. 남북한 특사 교환을 위한 1994년 제8차 남북실무접촉에서 북측 박영수 대표가 제 뜻대로 풀리지 않자 느닷없이 '서울 불바다'를 운운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 말 한마디에 대한민국에서는 생필품 사재기 소동이 일었는데,(그때는 우리의 맨탈이 그토록 허약했다) 6월에는 라면 하나 더 팔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몰랐었다.
이 어이없는 한마디에 서울은 불난 호떡집이 됐고, 이후 '불바다'는 북한의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사실 방사포나 장사정포가 미사일보다 더 위험하긴 함 당시의 신문기사 하지만 페리 국방장관은 개의치 않았다. 6월 중순, 태평양 상의 미7함대 예하 33척의 군함이 북한 원산만을 향해 움직였다. 전투함에서 발진한 크루즈 미사일과 F-117 스텔스기로 영변 핵시설을 폭파시킨다는 것이 미국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H아워 1시간 전에 멈췄다. 그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얘기는 카터 미국 전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의 적극적인 만류다. 즉 그 두 사람이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에서만 100만 명이 희생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말렸고, 이에 클린턴이 정신이 번쩍 들어 공습을 취소시켰다는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1999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한을 공격하지 말도록 설득했다. 내가 설득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1999년 10월 19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회견) 나아가 김 전 대통령은 "1994년 괜히 말렸다. 그때 클린턴의 영변 폭격을 말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틀림없이 한반도가 비핵화됐을 것"이라는 발언도 했다.(2011년 <위키리스크> 보도)
클린턴 전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비슷하게 술회했다. "1994년 3월 하순 북한의 심각한 핵위기가 시작됐다..... 페리 국방장관은 평소 소신대로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다..... 사태는 이후 더욱 악화돼 북한은 그해 5월 IAEA 사찰단의 입국을 막은 채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빼냈다..... 6월 1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중재를 위한 북한 방문 용의를 밝혔고..... 이후 전쟁 발발시 양측이 입게 될 막대한 피해에 관한 정신이 번쩍 드는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북한 폭격 계획의 입안자이자 적극적 실행자였던 윌리엄 페리가 2015년 12월 출간한 자서전 <핵 벼랑에서의 나의 여정>에서 밝힌 내용은 조금 다르다.
1993년 3월 북한이 NPT(핵확산 금지조약)를 탈퇴한 후부터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 때까지 일어난 일은 한국인도 꼭 알아야 할 내용이다..... 나와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이 NPT를 탈퇴할 때부터 군사적 옵션을 고려했다..... 그리고 1994년 6월 11일 오전 10시(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서 폐연료봉을 꺼내 재처리하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입수됐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D데이 H아워는 닷새 뒤인 6월 16일 정오로 결정됐다..... 그리고 한반도와 주변에 배치된 모든 병력이 백악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런데 계획이 실행되기 직전, 개인 자격으로 북한에 들어갔던 카터 전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김일성이) "미국이 행동을 유보하면 재처리 문제를 협상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페리 회고록 이 제안을 백악관이 받아들임으로써 북폭은 일보직전에 연기됐다. 그리고 4개월 후 제네바에서 북한 핵시설 폐기를 위한 경수로 협정이 이루어지고 KEDO(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이에 앞선 6월 28일, 남북이 판문점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접촉을 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7월 25~27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한다는 남북한 중대 공동발표가 있었다. 갑자기 해빙 무드가 조성된 것이었다.
김일성이 후퇴한 기사 그런데 1994년 7월 9일, 북한 <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주요 언론들이 정오에 뜻밖의 특별방송을 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보도로, "심장혈관과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중복된 정신적 피로로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상태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도 북한 폭격으로 꽤 스트레스를 받은 듯하였다.(당 82세로, 죽을 때도 됐지만 제 명을 스스로 단축한 면도 없지 않다)
김일성 사망 기사 * 2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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