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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의 기원(II)ㅡ신촌 봉원사 종과 덕산 사건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2. 12. 04:50

     

    신촌(新村)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언뜻,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과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전이 자리 잡으며 이에 따른 대학촌이 형성되었으므로 신촌이라 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니 서울역사박물관의 설명도 그러하고, 또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서울역사박물관은 한편으로는 그 유래를 조선 개국공신 하륜 대감까지 끌어올린다. 국초에 한양을 새로운 수도로 정할 때 모악주산론(母岳主山論)을 펼친 하륜이 새롭게 발견한 이 땅을 '새터말'이라 부른 데서 신촌이 유래됐다는 것이다. 모악(산)은 지금 봉원사(奉元寺)와 연세대 및 이화여대를 품고 있는 안산(높이 296m)의 옛 이름으로 이후 안현이 되었다가 지금은 안현과 안산이 같이 쓰인다.

     

     

    겸재 정선의 안현석봉(鞍峴夕烽) / 간송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은 그외도 서울의 많은 '신촌'을 소개하고 있는데, 정작 하륜의 '새말터'는 이후 사라졌고, 신촌은 공식적으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의 문서에서 신촌리(新村里)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속했던 신촌리는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며 신촌정(新村町)이 되었고, 이후로 신촌으로 정착하였다.

     

     

    서울의 또 다른 신촌
     1969년 6월 4일 신촌로터리 시계탑 준공 당시 모습 

     

    그렇게 보면 신촌의 유래를 초창기 대학촌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무래도 멀어보이고, 그 지명은 본래 안산 기슭, 현 연세대학교 근방에 있던 봉원사가 1748년(영조 24) 지금의 자리로 옮겨 앉으며 '새절'이라 불린 일에서 찾는 게 옳을 것 같다. 이후로는 근방의 동네가 '새말', 곧 신촌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박영효 · 서재필 등의 무리에게 개화승 이동인을 소개시켜준 것도 '새말'에 자리한 '새절'에서였으니, 구한말의 이동인은 이 절에서 머무르며 새 세상을 꿈꿨다. 국초(國初)의 정도전은 이 절에 머문 적은 없으나 그가 쓴 글씨는 명부전 현판으로 걸려 있다. 이성계는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원찰(願刹) 흥천사 명부전의 현판을 정도전에게 쓰게 했는데 흥천사가 이방원에 의해 훼철되며 이후 그 현판이 봉원사에 걸리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봉원사 명부전 현판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인 삼봉 정도전의 글씨임에도 기둥의 주련은 매국노 이완용 글씨이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 현판을 쓰기도 한 이완용은 일본 국왕 다이쇼가 사람을 보내 휘호를 받아갔을 정도의 명필로서, 조선국전 서예 부분 심사위원이었다는 사실을 앞서 '이완용과 독립협회'에서 말한 바 있다.

     

     

    정도전과 이완용의 글씨가 함께 걸린 봉원사 명부전

     

    글씨를 두고 말하자면 비단 그뿐만이 아니니 대웅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가 쓴 것이요, 그 옆 대방(大房)에 걸린 편액 3점 중 청연시경(靑蓮詩境: 푸른 연꽃과 같은 시의 경지)과 산호벽수(珊糊碧樹: 산호와 벽수 가지처럼 크게 융성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무량수각(無量壽閣)은 김정희가 연경에 갔을 때 사사했던 청나라 대학자 옹방강의 글씨다. 그리고 이 절의 빼어난 단청도 당연히 눈길을 붙잡는데, 봉원사에 계셨던 단청장 만봉스님(인간문화재 48호)이 남다른 공력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봉원사 대웅전과 대방
     대웅전 현판 & 아름다운 단청
    대방의 무량수각 편액 & 아름다운 단청
    대방 복도에 걸린 청연시경 편액
    대방 복도에 걸린 산호벽수 편액

     

    잘 알려진대로 이 절의 대방은 원래 공덕동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당(我笑堂) 사랑채이던 건물을 1966년 주지 영월스님과 도화주 운파스님이 새로운 주인이 된 동도학원(동도 중고등학교)으로부터 헐값에 사들여 옮겨 지은 것이다. 그때 아소당 사랑채에 걸렸던 글씨까지 딸려오게 된 것인데, 아소당에 대해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I) - 그날의 진실'에서 사진을 실어 설명한 바 있다. 

     

     

    봉원사 대방
    공덕동에 남은 공덕리 금표(禁標) / 아소당이 여기서부터 120보 거리에 있으니 더는 접근하지 말라고 쓰여 있다.

     

    절의 뒷편 칠성각에서 발견된 의소제각(懿沼祭閣) 편액은 영조대왕의 글씨일 가능성이 높다.  2011년 칠성각 불단을 수리하며 발견된 의소제각 편액은 칠성각 건물이 영조의 장손이자 정조의 동복 형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원당(願堂), 즉 의소세손의 명복을 축원하기 위해 건립된 전각이라는 사실을 밝혀주었는데, 조선 왕실의 원당일 경우 가해질 일제의 훼철을 염려해 현판을 떼어 숨겨놓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절의 칠성각 공포(栱包)는 남다르다. 

     

     

    봉원사 칠성각
    서울특별시 문화재로 지정된 칠성각과 의제소각 편액 / 서울시는 조사과정에서 '건식 탁본'과 '자외선 촬영'을 통해 각자(刻字)가 판독된 편액과 왕실 원당임이 확인된 칠성각을 문화재로 지정했다.

     

    이상의 내용은 흥미로운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의 주제는 1편에 이어 종(鐘)에 관한 것이니 종에 대해 말해야겠는데, 아래 범종각 안의 종은 보다시피 근래에, 게다가 일본 종 양식으로 만들어진 범작(凡作)이라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대웅전 안에 있는 동종은 작은 규모임에도 담겨 있는 스토리가 풍부하다. 또한 매우 기구하기도 하니, 종은 본래 예산군 덕산면 가야사의 것이었다.

     

    조선 헌종(재위: 1834-1849) 시대, 훗날의 흥선대원군이 되는 이하응이 파락호이던 시절에 "예산군 덕산면 대덕사(가야사)의 탑이 있는 자리는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날 큰 길지"라는 유명한 풍수쟁이 정만인의 말을 듣고 주지에게 돈 2만 냥을 주어 절을 불태우게 했다는 얘기는 매우 유명하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실려 있는 얘기다. 이하응은 그 자리에 경기도 연천에 썼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시켰는데, 정말로 2대에 걸쳐 황제가 탄생했다.

     

    봉원사 대웅전 동종은 당시의 물건이 옮겨온 것이다. 실제로 이 종에는 1760년 덕산, 예산, 회덕 등지의 충청도 주민들이 돈을 추렴해 제작했다는 명문이 있다. 하지만 이 종이 언제 어떻게 온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 그것이 대원군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즉 그 종에는 불타버린 가야사와, 그곳으로 이장한 남연군 묘와, 그 묘를 파헤쳐 남연군의 시신을 훔쳐가려 한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 페롱과,(이른바 덕산사건) 이에 분노해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벌인 흥선대원군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 3편으로 이어짐

     

     

    봉원사 범종각
    범종각 동종
    닫집과 탱화가 돋보이는 대웅전
    대웅전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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