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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동 갑신정변의 현장과 외로운 석탑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2. 16. 22:50

     

    서울 계동의 이름은 조선초 빈민 구휼 병원 제생원(濟生院)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처음에는 제생동이었으나 순조년간 계생동(桂生洞)으로 변했고,(1834년 전후)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때(1914년) 기생들이 사는 기생동(妓生洞)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하여 '생'자가 떨어져 나가 현재의 계동(桂洞)이 되었다.

     

     

    계동 현대사옥 앞의 제생원 터 표석

     

    계동은 과거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북촌문화센터, 한학수 가옥, 백홍범 가옥 등의 옛집과 동양화가 배렴, 서양화가 고희동의 집 등이 미술관의 형식으로 개방되어 내·외국인 북촌 순례객의 순례 코스로서 주말마다 붐빈다. 다만 이곳 계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하나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잊히고 있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이다.

     

     

    북촌문화센터로 사용되는 한옥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가옥으로 민씨 세도가이자 친일파였던 탁지부 대신 민형기가 살던 곳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 안채를 만난다.
    안채에서 밖을 향해 찍은 사진
    동양화가 제당(霽堂) 배렴이 살던 배렴 가옥
    눈 내린 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방인 처자들이 이 집을 찾아왔다.
    배렴이 그린 금강산 그림 '산고수장'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春谷) 고희동의 집
    미술관으로 변한 이 집은 2023년 다시 개관했다.
    고희동의 '금강산 천선대'
    조선 말의 상궁이 살았던 백홍범 가옥

     

    앞서 '김옥균과 홍종우(I)' / '갑신정변의 뒤안길'에서 썰을 풀기도 했거니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1884년 10월 17일 (양력 12월 4일), 우정국(국제우편을 담당하는 관청) 낙성식을 기화로 쿠데타를 일으켜 우정국 마당에서 민영익을 비롯한 수구파 일당을 일단 도륙 내고, 이후 창덕궁 고종의 침전으로 가 "청군이 변란을 일으켰으니 빨리 몸을 피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후 고종과 민왕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이처시켰다.

     

    경운궁(덕수궁)과 헛갈리도 하는 경우궁은 궁궐이 아니라 지금 계동 현대사옥 자리에 있던 순조 모(母) 수빈 박씨(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였던)의 사당이었다. 개화파들이 고종을 이리로 모신 건 오로지 향후 예견되는 청군의 공격에 방어하기 좋은 요새와 같은 장소를 택하였음인데, 사전의 모의 대로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지원한 일본 공사관 병력 150여 명이 출동해 경우궁의 주위를 지켰다.

     

     

    쿠데타가 시발된 우정국 마당
    궁정동 경우궁 / 갑신정변 당시 계동에 있었으나 이후 옥인동으로 이축되었다가 1908년 육상궁(청와대 옆 칠궁)에 복원되었다.

     

    여기까지는 일이 착착 잘 돌아갔으니, 개화파들은 왕명으로 나머지 수구파의 중심인물인 민태호, 민영목,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내시 유재현 등을 불러들여 경우궁 입구에서 살해했다.(이때 당 20살의 일본 하사관학교 출신 서재필의 칼이 춤을 춘다)

     

    왕과 왕비는 경우궁 재실(齋室)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불안하고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지라 10월 18일 날이 밝자 민왕후는 경복궁이든 어디든 이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개화파는 궁궐로 가는 것은 아직 위험하다 하며 경우궁 가까이 있던 완림군의 종가(宗家)로 이처시켰다.

     

    ~ 이 집은 흥선대원군의 장조카이자 고종의 종형인 완림군 이재원이 살던 곳이었으나, 왕이 머문 집은 궁으로 승격되는 조선의 국법에 따라 계동궁(桂洞宮)이 되었다. 아무튼 얼떨결에 개화파에 협조하게 된 이재원은 요즘의 바지사장 격으로 혁명정부의 좌의정이 되었고 곧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그는 혁명정부가 3일천하로 끝나면서 부역자로서 처벌받을 처지가 되었지만 고종의 비호로 귀양을 면한다) 개화파는 이 집에서 개화파 인사와 종친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을 꾸려 공표한다.

     

     

    계동궁 터 표지석 / 현대 사옥 바로 앞 도로가에 있다. 이 집에서는 이후 3대가 이어 살았으나 1960년대에 철거되었다.

     

    하지만 뭔가 수상쩍음을 눈치챈 고종 내외는 끈질기게 환궁을 졸라대었고, 개화파들도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었다 여겼는지 결국 10월 18일 오후 5시경 왕과 왕비를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시켰다. 이때 다만 김옥균만은 "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청군의 공격에 방어하기 어렵다"하여 반대했지만 다케조에가 방어에 문제없다고 큰소리치는 바람에 결국 왕의 이거가 이루어진다. (훗날 10.26 때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가 남산 중앙정보부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간 상황과 비견되기도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쿠데타 실패의 요인이 되었으니 10월 19일 오후 3시경 몰래 민왕후의 밀지를 전달받은 청군이 창덕궁을 공격하였다. 정문 돈화문 쪽의 군대는 원세개가 지휘했고, 함양문 쪽의 군대는 창경궁 선인문으로 들어온 오조유가 지휘했는데, 도합 1,500명쯤 되었다. 이에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군은 일찌감치 도망가 버리고, 서재필이 이끄는 약 100명의 친위군과 이규완이 이끄는 50여 명의 민간인 쿠데타 참여자들이 집결해 청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하였지만 속절없이 패하며 쿠데타는 이틀 반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계동 주택가에서 본 창덕궁 구중궁궐
    창덕궁 뒷길의 이름 모를 문 /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인들이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고도 한다.

     

    갑신정변의 현장 경우궁은 현대사옥 부지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고 계동 입구 어니언 카페에서 계동길을 따라 100m쯤 올라간 곳에 경우궁지 표지판만이 세워져 있다. 갑신정변을 상기하자면 현대사옥 마당과 그 옆 공간사옥을 거닐어 볼 일이다.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 중에서도 손꼽히는 건물이니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아울러 어니언 카페 또한 눈 여겨 볼만한 곳으로써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익 정당인 고려사회민주당의 창당 주역 한학수가 살던 집이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결성되자 건준을 좌익단체로 간주한 우익인사들이 이에 대항해 그 3일 후인 8월 18일 이곳 한학수 가옥 사랑채에서 고려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한학수는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자행된 을사늑약의 현장에서 조약의 체결을 반대한 유일한 관료 한규설의 손자이기도 하다. 그때 참정대신(현재의 부총리) 한규설은 중명전 골방에 감금당했다.(☞ '대한제국 최후의 날')

     

    어니언 카페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보헌빌딩이 보인다. (그 맞은 편에 경우궁지 표지판이 있다) 이곳이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한 곳이다. 여운형은 마포 출신의 거부 임용상이 제공한 이곳 2층 양옥을 건준 본부로 삼았다가 이후 종로 2가 YMCA 건물로 옮겼다. 임용상의 집은 건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보존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었지만 아무런 공론화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여운형이 민족주의자인지 공산주의자인지 확실한 규명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경우궁 터 표지판 / 구두수선박스에 가려져 찾기가 쉽지 않다.
    경우궁 터에 속했을 관천대(觀天臺)와 공간 사옥 / 경우궁, 관상감, 제생원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 모두 현대 사옥이 깔고 앉았고, 관상감 천문대였던 관천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어니언 카페 입구
    그곳 사랑채는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보헌빌딩 /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된 장소이다.

     

    여운형의 건준 창당에 대해서는 '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동 로터리ㅡ그는 왜 살해당했나?'에서 말한 바 있는데, 그가 살았던 집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아래 티저 속 인물은 박헌영과 여운형이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혜화동 로터리ㅡ그는 왜 살해당했나?

    혜화동의 역사에 관해서는 이미 너 댓 차례에 걸쳐 글을 올렸는데도 아직 쓸 말이 태산이다. 해방 후 격동의 역사가 숨어 있는 이승만의 집 이화장(梨花莊), 남로당의 거점이었던 박헌영의 집 혜

    kibaek.tistory.com

    계동 여운형 집터 표석 / 건너편 안동칼국수 식당이 그가 살던 집이다.

     

    이곳 계동에는 또 하나의 망각이 존재한다. 언제 어디서 옮겨온지도 모르는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 부근에 있는데 눈에 잘 띄지 않아 일부러 마음먹고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조차 어렵다. 들리는 말로는 이천 감은사의 것이라고 하는데,(사진상으로는 거의 똑같다) 그 탑은 최소한 2013년 1월 21일까지는 그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후 누군가 그것을 옮겨온 것일까....?

     

    최근의 것을 추적해보니 '역사문화라이브러리'에서 2013년 1월 21일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소재의 탑을 확인하고 그 탑이 원래 그곳 감은사지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옮겨온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알쏭달쏭한 글을 실었다.

     

    이 석탑은 온전한 모습을 갖춘 듯한데 원래 이 자리에 있던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옮겨온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향토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지 않아 그 내력이나 족보를 전연 알 수가 없지만, 이른바 신라 양식을 계승했다는 전형적인 고려초기 석탑이 아닌가 한다. '이천 감은사 석탑'이라는 키워드로 포털 검색을 하니, 이 탑에 대한 답사 증언 등이 보이거니와, 이 석탑이 지정되면 절차가 복잡해져서 당국에서는 조사나 지정 절차를 밟지 않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불교계의 업보다.

     

    이렇듯 계동 탑의 고향은 묘연한데, 이보다 더욱 묘연한 것은 탑의 소유주이다. 예전에는 이 탑을 당연히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려니 생각했지만 문화재청에서는 그냥 보고만 갔다 하고, 새로 대동세무고등학교 입구의 공터를 매입한 땅주인은 높은 담을 둘러 접근을 막았다. 탑은 그 빈 땅 안에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땅주인이 탑주인은 아닐 터인데....

     

     

    문제의 탑
    이천 감은사 삼층석탑 / '역사문화라이브러리'에 실린 2013. 1. 21.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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