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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양동의 고구려 흔적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9. 29. 23:48
집에서 멀지 않은 까닭에 아차산을 자주 찾는 편이다. 그리고 정해진 등산로를 따라 걷다 보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을 때의 흔적들을 보게 되는데, 근자에 보루(堡壘)군에 대한 정비와 함께 안내문을 세워놔 일부러 찾지 않아도 등산로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DAUM 사전에서 보루를 찾아보면 '적을 막기 위하여 돌, 흙,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로 설명돼 있으나 그보다는 한자 뜻풀이가 더 이해가 쉽다. 작은 성 보(堡)에 진 루(壘) 자를 쓰기 때문이다.
즉 보루는 '작은 성과 같은 진지'를 말하는 것이니, 아래 아차산 4보루의 사진을 보면 보루의 성격이 더욱 쉽게 짐작된다. 아차산 4보루는 고구려의 남진 때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곳으로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아차산 보루군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4보루에서는 온돌 자리 13기가 확인되었는데, 그 온돌의 숫자로써 1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으리라는 추산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확인된 아차산 고구려 보루는 10개 정도이다.

아차산 4보루 / 2020년 정비가 막 끝났을 때의 사진이다. 
보수를 마친 아차산 4보루 성벽 
4보루 출토 유물 
4보루 안내문 
길이 80m의 4보루 부감 
현재의 능선 사진과 합성된 4보루 조감도 아차산의 전략적 중요성은 주변의 아차산성으로 확인된다. 아차산성은 해발 285m 아차산의 205m에 지점에 있는 삼국시대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1,125m이다. 이 성을 처음 쌓은 나라와 축성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서쪽으로는 중랑천이, 남쪽으로는 한강 너머의 백제 풍납토성을 굽어볼 수 있는 바, 어느 나라가 차지하든 요새지였을 것임이 파악된다.
이 산성 아래서 475년 9월 백제 개로왕이 남진한 고구려군에 의해 참수당해 죽었으며, 590년 고구려 고토(故土) 수복에 나섰던 고구려 온달장군이 신라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처럼 아차산 일대는 삼국시대 격렬한 전쟁터였던 곳으로서, 남한에서는 드물게 고구려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나 상당수가 사라져 버렸다. 그중의 하나가 서울 광진구 자양동 695번지 현(現) 자양한강아파트에 자리에 있던 고구려 보루이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 16-46번지에 위치한 아차산성 
한강 너머 풍납토성이 바라다보이는 아차산성 망대(望臺) 
인근에서 수습한 고구려 와편 / 신기하게 지금도 발견된다. 구의강변로 11 자양한양아파트 3동 부근 구릉에 있던 고구려군 보루는 1977년 화양지구 택지개발 과정에서 해발 53m 요새 구릉을 밀어버리며 완전히 깎여나갔고 보루도 휩쓸려 사라졌다. 고구려군 주둔 당시 이곳 구릉에 위치했던 보루는 한강 일대를 넓게 조망할 수 있어 남진의 교두보이자 최전방 초소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파트 건립을 위한 택지개발 과정에서 속절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행히 사라지기 전 서울대 학술조사단에 의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사진과 발굴유물이 '구의동 보루'라는 이름으로 보존될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엉뚱하게도 그것이 백제의 빈전(殯殿)이었다. 당시 발굴단장을 맡았던 고고학자 김원룡 교수가 "백제 고구려는 3년상을 치렀다"는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隋書)> 등을 예로 들며 고구려 보루 유적을 백제의 장례 유적인 빈전으로 간주해 버린 결과였다. 당시 김원룡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장례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신 전각으로, 중심광(中心鑛, 가운데 구멍)에 관을 놓고 그 위에 목조가옥을 세운 뒤 출입문을 만들어 단 영혼의 생존가옥(生存家屋)이다. 그러다 3년상을 마치고 장례가 끝난 다음 불사르고 그 위에 봉토를 씌운 것이다. 축석부(돌로 쌓은 기단부)에 보강 돌출부가 있어 이 석축부의 해석에 문제가 있기는 하나 그것 역시 봉토의 호석(護石)이라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 즉 김원룡은 고구려 보루를 백제 왕의 임시 무덤으로 잘못 이해한 것으로서, 그가 말한 가운데 중심광(中心鑛)은 실은 온돌 시설이었고, 축석부의 보강 돌출부는 고구려 성과 보루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치(雉)였다. 그는 고구려의 성의 특징인 치조차 이해 못한 채 그것을 무덤 주위를 보강한 호석으로 해석한 것이다.
다행히도 그것이 오류임이 밝혀져 지금의 고구려 보루로 바로 잡혔지만, 이쯤 되면 고고학은 거의 상상력의 영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같은 오류는 지금도 횡횡한다. 어찌 됐든 오류는 바로 잡혔던 바, 해발 53m 구릉 정상부에 원형의 성벽을 쌓고 내부에 온돌의 주거 시설을 설치한 이곳은 10명 정도가 주둔한 고구려군의 아차산 최전방 초소로 확인됐다.

당시의 보루 사진 
구의동 보루가 있던 곳 
부근의 구의빗물펌프장 
옛 보루 부근에서 본 한강 이 구의동 보루는 1998년 KBS 스페셜 <6세기 동북아 최강 고구려군 아차산 최후의 날>에서 조명된 적이 있다. <6세기 동북아 최강 고구려군 아차산 최후의 날>에서는 당시 남한에서 최초로 발견된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이 생경한 시선으로써 집중적으로 다루어졌던 바, 김원룡 교수가 구의동 보루를 백제의 빈전으로 오해한 것도 딴은 이해할 만하다. 당시의 남한의 고구려 유적은 그만큼 생소한 것이었다. 아무튼 구의동 보루는 한강 최전방의 고구려 초소였는데, KBS 스페셜에서는 그것이 551년의 어느 날 밤 백제군의 기습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내부 온돌 아궁이에 걸린 쇠솥과 쇠주전자, 그리고 8자루의 창과 2자루의 칼을 들었다. 그 밖에도 여러 종류의 도기와 도끼·화살촉(3000여 점) 등의 무기 및 철삽·쇠스랑·호미·끌·낫·가래 등의 농기류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던 바, 도강한 백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었다고 추정함에 무리가 없었다. 전소된 초소의 흔적 또한 그것을 뒷받침했다. 보루 유적에서는 불을 서둘러 끄려는 진화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불에 타고난 뒤 흙으로 덮인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온돌 아궁이 걸려 있던 솥과 주전자 
구의동 보루 유적에서 출토된 시루 
구의동 보루 출토 항아리 
구의동 보루 출토 쇠솥 

쇠솥 위에 올려진 시루 
구의동 보루 복원 모형 / 서울대박물관 
구의동 보루 투시도 
천정은 이와 같았을 것이다. / 구리 고구려대장간마을 경당 
아차산 4보루 출토 항아리 
홍련봉 2보루, 아차산 4보루 출토 쇠방울 말재갈 쇠마름 교구(鉸具) 마구(馬具) 한마디로 구의동 보루의 고구려군은 적인 백제군의 기습 공격에 손쓸 틈도 없이 전멸되었다는 얘기가 되며, 아궁이에 올려놓은 채로 발견된 솥과 주전자가 당시의 위급 상황을 대변한다 하겠다. 그런데 그 백제군은 백제 어느 왕 때의 군대였을까? KBS 스페셜에서 말한 551년은 제 26대 성왕 때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를 참조한 결론이다.
즉 <삼국사기 / 열전·거칠부>에 "동맹을 맺은 백제가 평양(한강 이북)을 빼앗자 신라도 고구려의 10군을 접수했다"고 돼 있는 것과, <일본서기 / 흠명천황조>의 "551년 백제 성왕이 나·제 동맹군을 이끌고 한성을 비롯한 옛 땅 6군을 회복했다"고 한 기록을 참고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고구려를 연파해 고토를 수복한 후 갱위강국(更爲强國, 다시 강국이 됨)을 선언한 25대 무령왕 때의 일임도 간과할 수는 없다. (☞ '갱위강국(更爲强國) - 한강유역을 수복한 백제 무령왕')

구의동 보루와 가장 가까운 홍련봉 보루 / 현재 홍련봉 고구려유적 전시관이 건립 중이라 마사다 요새 같은 이 멋진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전시관은 내년 개관될 예정이다.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군 지도 
구리시 광개토태왕 광장에서 본 아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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