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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의 멸망을 불러온 개로왕의 외교 실패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9. 30. 23:49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있던 만주 길림성 집안시에는 유명한 광개토대왕비가 서 있다.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의 치적을 기려 세운 6.39m의 세계 최대 비석으로 4면에 1,8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졌는데, 그중 1면과 2면에 걸쳐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광개토대왕비를 컬러 처리한 사진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년(丙申年)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집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를 …하였다. 백잔이 이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명과 세포(細布)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ㅁ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而殘主因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跪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백제 왕의 항복을 받은 내용이 새겨 있는 광개토대왕비 남면 여기서 백잔주로 칭해진 사람은 백제 17대 왕 아신왕(재위 392~405)으로 그는 이때 "지금부터 고구려 왕을 좇아 영원한 노객이 되겠노라"(從今以後 永爲奴客)고 분명히 맹세했다. 이에 광대토대왕은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 10인을 데리고 고구려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신왕은 겉으로만 맹세하는 척 한 것 같으니 그는 다시 왜(倭)와 손잡고 신라를 공격하고 이후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이끌고 수 차례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본인은 국내의 정쟁에 휘말려 시해당한다.(추정) 연이은 실정과 전쟁 실패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정변으로 인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그는 백제사에 있어 능력은 있었으나 실패한 군주로 자리매김하는데, 그보다 더 실패한 왕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 21대 왕 개로왕(재위 455~475)이다.
개로왕 역시 능력은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수도 한성 부근에 새로운 성을 구축하여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고 469년 8월에는 고구려의 남부 지역을 선제 침공한다. 이는 아신왕 이후 백제가 처음으로 고구려를 선제 공격한 사건으로서 백제가 과거의 국력을 회복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역부족.... 이에 개로왕은 더욱 꾀를 내었던 바, 중원의 강국인 북위에게 남북으로 고구려를 협공해 멸망시키자는 제안을 담은 국서를 보냈다.
그러나 북위가 뜨뜨미지근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개로왕의 계획은 성사되지 못한다. 북위로서는 괜히 북방의 강국 고구려와 척을 질 필요가 없는 노릇이었다. 북위의 황제 헌문제 탁발홍은 오히려 고구려 장수왕에게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를 흘린 듯하니, 이를 입수한 장수왕은 백제가 북위에게 침략을 사주한 사실과 선조인 고국원왕을 거듭해 모욕한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 「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는 <북위서> 등의 사서에 전문이 전한다)
격분한 장수왕은 82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98세까지 살았다) 5만 대군을 몰고 내려가 백제를 공격한다. 백제는 당연히 죽을 힘까지 동원해 저항했겠으나 결국 힘이 다해 475년 음력 9월 어느 날 한성백제 500년의 왕업이 끝나게 된다. (※ 정확히는 BC18년부터 AD475년까지 493년) 그 한성백제 마지막 날과 개로왕의 최후가 한·일의 사서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백제의 기록에 전하길 개로왕 21년 겨울 고구려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하였고 왕성이 함락되었던 바, 백제는 결국 위례성을 잃어버리고..... (百濟記傳 蓋鹵王 乙卯年冬 貃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일본서기 / 웅략천황(雄略天皇) 20년조>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 고구려의 고위관직명)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재증·고이는 두 글자로 된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이어 남성(南城)을 공격하니 성 안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체포해 말에서 내려 절을 하게 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았으며,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 장수왕 15년조>이때의 북성은 풍납토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다. 도성의 주성(主城) 풍납토성에서 농성하던 개로왕은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부성(副城)인 몽촌토성으로 옮겨가 농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결국 그마저 함락당했던 바, 지금의 올림픽파크텔이 있는 서문으로 나와 도망가다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 등에 의해 붙잡혀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당해 죽은 것이다.


고구려 통구 12호분의 적장참수도 
풍납토성 성벽 능선 / 풍납토성은 총 둘레 3.5킬로미터, 최대 너비 60미터, 최대 높이 13.3미터, 면적 약 24만 평의 방대한 규모의 도성이었다. 현재는 2.1킬로미터의 성벽만 남아 있다. 
풍납토성 남쪽 성벽 
풍납토성 북쪽 성벽 
풍납토성 북문지 
몽촌토성과 해자 
몽촌토성 성벽 / 몽촌토성은 총 둘레 2.7킬로미터, 높이 12~17미터, 내부 면적 67,400평의 규모였으며 2천 호 정도의 가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로왕이 달아난 몽촌토성 서문지 
몽촌토성 뒤로 보이는 아차산 / 개로왕이 끌려가 죽은 곳이다.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백제의 칼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백제의 창 / 한성백제박물관 백제 초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은 남한산과 연결된 구릉이 형성되는 곳에 위치한, 산성에 가까운 형태로서 방어에 있어서는 풍납토성보다 훨씬 유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몽촌토성은 세인의 관심 밖에 있다가 88 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지역으로 확정되면서 발굴이 시작됐는데, 서울대 · 숭실대 · 한양대 · 단국대박물관이 연합 발굴조사를 벌여 한성백제기 중요 유적임을 확인한 바 있다. 이 1983〜1988년까지 6차례 발굴조사를 한 결과 몽촌토성은 성곽과 성 내부 시설 모두 백제가 축조하고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몽촌토성에서는 고구려 온돌터 15개 및 상당수의 고구려 토기도 발견되었으며, 아차산성이나 구의동 보루에서 발견된 것보다 격이 높다. 고구려가 475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곳 몽촌토성에 안정적으로 주둔하며 백제를 지배했다는 증거이다. 아래 몽촌토성 역사관에 전시돼 있는 네귀달린 항아리에는 해시태그 문양(#)이 뚜렷해 한 눈으로 보아도 고구려 것임을 알 수 있다. 점령군인 고구려군이 남긴 유물인 것이다.

고구려 네귀달린 항아리 
고구려 네귀달린 항아리와 시루 
서울 구의동과 아차산성 출토 고구려 토기 / 국립중앙박물관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무기 / 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간의 신의이다. 개인 대 개인 간과 마찬가지로 국가간에도 신의는 더없이 중요하다. 얕은 꾀로 상대국을 속이려 들거나 처음에 했던 말을 바꿔 조변석개(朝變夕改)를 일삼으면 당연히 화가 난다. 돌려 말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재명에 관한 지적이다. 그는 미국이 무리한 요구를 해댄다며 상호무역 협정문에 사인하기를 거부하고 있고, 더 나아가 더불어민주당 강성 친명계 모임이자 핵심 브레인들이 모였다는 더민주혁신회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3500억 달러 선불 요구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재명은 처음에는 분명 3500억 달러 투자 요구에 합의했고, 투자처는 미국이 결정할 것이며 초기 이익 분배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그래서 이재명은 트럼프와 사인을 하기 위해 8월 25일 백악관에 간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무엇이 틀어졌는지 비밀회담 중간에 이재명이 쫓겨나온 모양새로 회담장 밖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럼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실 대변인은 합의문이 필요없을 정도로 잘 된 회담이라고 국민을 속였다) 이후로 지금껏 삐걱대고 있다. 대통령실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말을 않고 있지만, 왜 그런지는 대다수 국민이 자세히 알고 있다. 이재명이 본회담장에서 처음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뒤집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더민주혁신회의는 트럼프의 요구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하고 있는 바, '귀신=사탄'인 미국식 사고로는 혁신회의 측의 의도보다 곱배기로 화가 났을 법하다. 게다가 트럼프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던가? 더불어 혁신회의는 "우리는 무도한 관세협상으로 국민주권을 훼손하는 미국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단일대오로 한국 국민의 경제주권을 지켜내는 데 앞장 설 것이다"라고 덧붙였는데, 우선 단일대오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아울러 무도(無道)한 관세협정은 오히려 이재명이 하고 있는 듯하다는 말과, 칼자루를 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난항을 겪고 있는 한미 무역협상을 해결하려면 지금이라도 원칙적으로 나가 성의와 신의를 보여야지 주변 시정잡배들과 싸우는 듯한 양아치적 언사로서는 오히려 향후 회담에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그들이 그런 소리를 듣고 참아 주면 모르겠지만 힘이 있는 이상 아마도 참지는 않을 듯하다. 대답은 필시 고율 관세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리되면 기업과 우리 국민들은 점점 더 살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백제 아신왕과 개로왕은 출중한 군주였으나 라이벌로 한국사 불세출의 정복군주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만난 것이 치명적 불운이었듯,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다만 좀 진실해졌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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