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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도호부에서 생각한 고려는 강하고 조선은 약했던 국력의 이유
    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5. 11. 10. 22:06
      

    고려의 초기 군제는 위수제(衛守制)였다. 태조 왕건은 삼한을  통일하고 주요 치소(治所)에 6위(六衛)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위(衛)에는 38령(領)을 두었는데, 영에는 각 1,000명의 군사를 두었다. 그러므로 고려 초기의 정규군은 228,000명이었다는 말이 된다.

     

    운영은 군사 강국이었던 당(唐)나라의 부위제(府衛制)와 거의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부위제는 농민을 병사로 양성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군사로 복무) 징병제로 군수(軍需)와 민정(民政)을 통합하여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시스템이었다. 고려는 이와 같은 위수제로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을 막아냈다. 아래 지도를 보면 당시의 요나라가 얼마나 강성한 대국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려는 이와 같은 나라를 상대로 싸워 이긴 것이다.

     

     

    11세기의 아시아

     

    그러나 병력 부족의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바, 여진족의 침입에 앞서서는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였다. <고려사>를 보면 별무반에는 산관(散官)·이서(吏胥)로부터 상인·천예(賤隷, 천한 노비)·승려에 이르기까지 소속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노약자를 제외한 전 국민의 군인화였으니 적어도 100만의 군대를 가진 나라가 됐다. 고려는 이렇게 훈련된 국민들로서 대국 금나라의 침입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조선은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를 운영했다. 16세부터 환갑까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해마다 일정 기간 군인으로서 훈련을 하고 변방을 지켜야 했다. 의무 병역기간은 44년으로 국초에 정도전이 제도화했다. 그런데 개국 후 200년 가까이 전쟁이 없다 보니 군역을 옷감이나 곡식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생겼다. 국가로서도 세수가 늘어나니 나쁠 것은 없었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대신 군에 보내는 대립군(代立軍)도 생겨났던 바, 20세기 예비군훈련에 대신 사람을 보내는 경우와 비슷했다. (21세기에는 없어졌다. 그러면 큰일남)

     

    이렇게 되면 전쟁이 터질 경우 대책이 없게 되는 바, 율곡 이이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한다.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겠다는 이야기인데, 인구가 늘어났음에도 군인 수가 고려초의 228,000명에도 훨씬 못 미쳤다는 소리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대로 '십만 양병설'은 후대인이 지어낸 픽션일 뿐 사실이 아니다. 율곡 이이 본인도 군에 가지 않은 사람인데, 누구를 군에 보내 10만 명의 군사를 키울 수 있겠는가? 현실로도 어림없었으니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삼도 도순변사 신립이 사방에서 끌어 모아 충주로 내려간 군사가 8,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소재 신립의 묘 / 삼도도순변사 신립은 충추 달천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사했다.

     

    조선말에도 이 같은 상황은 되풀이되었으니 1892년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했던 오이시 마사미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은 강대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국경에 방위할 군사를 단 1명도 배치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안에 군함이나 군항이 전혀 없을 정도로 국방력이 허약하니 아프리카 토인보다 못한 세계 최악의 지경이다. 아울러 관리들의 부패와 뇌물 수수로 정부의 재정은 매우 궁핍하고 경제전반은 침체되었으며 근대식 교육마저 미비해 앞으로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 이러한 국가 위기를 인지하고 극복해 갈 인재마저 보이지 않는 바, 한국은 이미 망한 나라라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고종이 대한제국 시기에 조직하였고 사진기의 보급과 더불어 우리가 쉽게 볼 수 있게 된 아래의 시위대는 기실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황제 고종의 의장대에 불과한 군대였다. 

     

     

    훈련받는 대한제국 군인

     

    조선의 군사력이 약화된 가장 큰 원인은 필시 유생 때문일 것이다. 유생이란 서울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에 등록돼 공자왈 맹자왈 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모두 군대에 가지 않았다. <중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유생들은 다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들입니다(今之校生 皆避軍役者也). 사족(양반) 자제들은 명칭은 유업(儒業)을 한다고 하면서도 향교에는 다니지 않습니다(名爲業儒 而不赴鄕校)." (<중종실록> 1536년 1월 기사)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향교에 위장 등록을 하는 자들이 다수였음을 말해주는 대목인데, 조선말에는 병역을 회피할 수 있는 서원+향교의 수가 2,000여 개에 달했다. 사실상 모병이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문학동 인천향교 외삼문 / 뒤로 강당이 보인다.
    내삼문
    내삼문 은행나무
    강학 공간인 명륜당
    유생 기숙사인 동재
    유생 기숙사인 서재
    대성전 / 유학의 대빵인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향교 최고의 공간이다. 인천향교는 강학공간이 앞에 있고 사당을 뒤에 배치한 전형적인 전학후묘 형식을 보인다.

     

    지난주 다녀온 인천 문학동 인천향교의 바로 옆에는 공교롭게도 인천도호부가 위치해 있었다. 도호부는 지방의 최고 군사·행정기구였으니 이렇게 되면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향교에 위장 등록한 양반 자제들은 '꼼작 마'였을 것 같은데, 조선시대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천도호부 청사가 그곳에 없었다. 본래 인천도호부는 부근 문학초등학교 일대에 있었으며 지금도 두 동의 청사가 남아 있다. 하지만 불완전한 형태이고, 교내에 있어 출입과 관람이 자유롭지 못했던 바, 국립중앙도서관 사료를 토대로 2001년 지금의 자리에 재현했다.

     

     

    인천도호부의 아문(衙門)
    동헌
    객사인 소성관(邵城館) / '소성'은 통일신라 때부터 불려온 인천의 명칭이다.

     

    향교 쪽 홍살문 옆에는 인천에서 봉직한 조선시대 관리(관찰사·부사·현감)들의 선정비(善政碑) 18기를 모아 놓았다. 1930년대 인천도호부 자리인 문학초교 앞에 선정비 5기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인천시에 흩어져있던 10기를 문학초교 앞으로 옮겨놓았으며, 1970년에는 선정비 3기를 더해 향교 앞 지금의 자리에 터를 마련했다. (선정비는 모두 18기이나 인천부사 황운조의 비가 2기라 실제 인물은 17인이다)

     

    이중 우리가 알만한 인물은 민태호(1823~1884)와 박제순(1858~1916) 정도로서, 민태호는 순조의 장인이자 충정공 민영환의 아버지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칼을 맞고 죽었다.

     

     

    관찰사 민태호 영세불망비

     
    박제순은 1888년 5월 인천부사(인천시장)와 겸직으로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 인천관세청장)로 부임해 1890년 9월까지 2년 5개월간 복무했다. 그리고 그 1년 뒤인 1891년 8월 영세불망비가 세워졌으나 이후 많은 수난을 겪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할 당시 외부대신으로 협력했으며 1910년에는 내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에 서명 날인했기 때문이다. 그 후 박제순은 일제로부터 합방 은사금을 두둑이 받았으며 자작 작위와 함께 중추원 고문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박제순 선정비는 2005년 문학초교 앞에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문제가 됐고, 그해 말 결국 철거됐다. 이후 비석은 재현한 인천도호부 담장 밑에 부직포를 덮어 방치했다가 2020년 미추홀구에 의해 뉘어 놓은 형태로 단죄문과 함께 전시되었다. 그간, 거꾸로 세우자, 쪼개버리자, 박물관으로 옮기자 등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다가 지금의 형태로 결정되었는데, 가장 합리적 방안이 아닌가 여겨진다.  

     

     

    향교 앞에 뉘어 있는 박제순 영세불망비
    박제순 영세불망비 단죄문
    왼쪽에 쓰러진 비석이 박제순 영세불망비다.

     

    국운이 기울어지면 꼭 박제순 같은 자가 출현한다. 요즘으로 보면 대장동 일당에 대한 검찰 항소를 포기하게끔 만든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이나 그 윗선으로 짐작되는 정성호 법무부장관 같은 자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함은 물론 대장동 일당에게 받지 못하게 된 부당이득금 7천여 억 원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해 국고에 환수시켜야 한다. 그 윗선으로 의심받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조사도 요구되며 죄가 있다면 같은 청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명백한 부정까지 그냥 넘어간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정말로 미래가 없다. 

     

     

    문제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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