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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갑곶돈과 염하(鹽河) 구경 (I)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6. 1. 4. 16:45
전에도 말했지만 강화도는 가히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딱이 목적지를 정해 발걸음을 해도 자꾸 옆으로 새게 된다. 눈에 보이는 역사 유적을 일단 들르게 되면 그 근방을 구경하느라 정작 목적지에는 못 다다르거나 뒤늦게 허둥대며 주마간산 격으로 훑고 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번에 새해맞이 강화도 여행을 앞서서는 오직 갑곶돈대와 염주돈대, 그리고 주변의 강화전쟁박물관 만을 보고 오자 다짐했고, 다행히 성공했다.

2020년 복원된 갑곶 진해루 위 사진은 내가 찍은 게 아니라 <나무위키>에서 빌려온 사진이다. 어느 분께서 한겨울에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며 강화대교를 건너다 갑곶 진해루(鎭海樓)와 언(동결된) 염하(鹽河)를 찍은 것이다.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갑곶은 1232년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여 1270년 환도할 때까지 몽골과의 긴 전쟁의 수행하던 일선 방어 요새이다. 잘 알려진 대로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은 끝내 이 염하를 건너지 못했으며, 최씨 무인정권은 이곳 강화도에서 38년간 권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염하는 강화해협의 초입인 남쪽 초지진에서부터 북쪽 월곶진까지 약 20㎞를 흐르는 물길이다. 염하의 유속은 빠르기는 하나 넓은 곳이 약 2㎞, 좁은 곳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김포에서 손짓을 하면 보일 수도 있는 그야말로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하지만 그 가까운 거리를 몽골의 대군은 넘지 못했다. 일찌기 바다를 보지 못했던 몽골군으로서는 이 같은 바닷물길 자체가 공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17세기 발생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도 조선 왕실은 이곳 강화도로 피신했다.

<위키백과>에서 도해한 염하 
염하, 갑곶, 문수산성을 볼 수 있는 곳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는 쉽게 염하를 건너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청나라도 육군은 강하고 수군은 약세였음은 분명하나 염하보다도 광대한 흑룡강과 송화강 물줄기를 이웃하며 살았던 바, 물을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내(軍內)에 명나라 수군 장수였다가 항복한 공유덕과 경중명이 있었다.
이들은 김포나루에서 화포와 1만6000여 명의 군사를 작은 선박에 나누어 태운 후 신속히 염하를 도강해 갑곶진을 공격했다. 반면 강화도 수비 책임자인 강도(江都)검찰사 김경징은 매일 술만 마시며 경계마저 게을리했던 바, 난공불락의 강도성은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 '무능한 자가 군통수권자가 되었을 때 / 김경징의 경우')

가장 먼저 공파된 강화도성 북문 그로부터 230년 후인 1866년, 염하의 요새 갑곶돈은 또 한번 불바다가 됐다. 조선정부가 프랑스 신부를 참살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조선에 쳐들어온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은 먼저 강화도 초입의 영종도 영종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염해를 거슬러 올라와 갑곶돈을 함포사격했다. 그 엄청난 화력에 갑곶돈을 방어하던 강화부의 군인들은 놀라 도망하고 프랑스군 600명은 어렵지 않게 상륙하여 강도성을 공격했다. 1866년 10월 15일의 일이었다.

갑곶돈에서 바라본 염하 
당시 프랑스 장교 쥐베르가 그린 그림 / 프랑스 군함의 함포사격으로 성문이 포연에 휩싸인 가운데 프랑스군이 상륙을 시도하고 있다. 장소는 특정되지 않았다. 
갑곶진 진해루 이에 동문을 지키던 초관 김재현은 프랑스군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남문을 지키던 이시원 이지원 형제는 병사들과 함께 쫓기다 결국 동반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에 강화부는 단 하루 만에 함락되었고, 이후 프랑스군은 약 한 달 동안 강화부성을 노략질했던 바, 강화부 내아(內衙)에서 발견한 19 박스 분량의 은괴(銀塊)와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는 책 중 가치 있어 뵈는 책 345권을 골라 자신들의 함선으로 옮겼다. 당시 이 일을 수행했던 도세리 중령은 본국의 해군성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전과 보고를 올렸다.
11월 16일 우리는 강화읍의 고문서 서고(외규장각)를 발견했는데 조선의 국왕이 소유하고 있는, 하지만 드물게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조선의 역사와 전설, 문학 등에 관한 신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대단히 미려하고 중요해 보이는 책들을 골라내 내용을 확인하고 규정에 따라 목록을 작성했습니다. 이 책들은 각하는 물론 국립도서관에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될 것으로 여겨지므로 조만간 본국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프랑스군에 공파된 강화부성의 남문 
강화 외규장각 / 이곳에서 프랑스군이 훔쳐간 책들 중 의궤(儀軌: 조선 왕실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가 지난 2011년 영구대여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강화부궁전도(江華府宮殿圖) 속의 외규장각 
쥐베르가 그린 외규장각 그림 / 위 강화부궁전도 속 형태와 흡사하다. 프랑스군은 문자 그대로 종횡무진하였던 바, 다시 염하 건너편의 문수산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초관 한성근은 포수 50명과 함께 분전했지만 성의 함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성은 파괴되었는데, 남아문(암문) 성채에 남은 총탄의 흔적은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말해준다.
하지만 조선군도 그대로 당하지는 않았으니 서울을 출발한 훈련도감 군사 500여 명이 10월 18일 강화도 건너편인 김포 통진에 도착했다. 순무영 천총(千總) 양헌수가 이끄는 부대로서, 통진에서 문수산성 한성근 부대를 흡수해 전열을 재정비한 양헌수는 11월 5일 은밀히 염하를 도강해 정족산성을 점령했다. 조선군이 정족산성에 포진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11월 9일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재건된 문수산성 남문 희우루 
문수산성에서 바라본 염하와 갑곶 / 양헌수는 야밤에 이 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으로 잠입했다. 
무수히 많은 총탄의 흔적이 보이는 남아문 
문수산성 안내문 
갑곶돈에서 바라본 강화대교 / 멀리 문수산성 희우루가 보인다. 하지만 160명의 소총수를 이끌고 정족산성을 공격한 올리비에는 크게 패했던 바, 전사자 6명을 포함한 60~70명의 사상자를 낸 채 물러갔다. 반면 양헌수 부대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으니, 조선군의 반격을 걱정한 프랑스군은 결국 강화도에서 완전 철수해 산둥반도 쯔푸항(芝罘港)으로 돌아갔다. 동방의 소국 조선에 패해 돌아온 프랑스는 이후 두고두고 뻬이징 외교가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쥐베르가 그린 정족산성을 공격하는 프랑스군 모습 
성 위에서 응사하는 장면과 성루의 조선군에 세밀하다. 
정족산성 남문 종해루(宗海樓) 
전쟁기념관에 재현된 남문 전투 모습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양군의 무기 / 위가 조선군의 화승총이고 아래가 프랑스의 머스캣 소총이다. 프랑스는 조선을 침공하기 앞서 베트남을 침입해 점령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정부에서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것이 구실이 됐다. 1858년 다낭에 상륙하는 프랑스 해병대는 이듬해 쟈딘 성(사이공)을 점령하고 이어 베트남 전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베트남과 달리 프랑스는 조선에서 단 한 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의 칩입에 대비해 양성한 훈련도감의 군대가 그만큼 강했던 것이다.
다만 염하라는 지명을 남겼다. 염하라는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부터 근대의 <대동여지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책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병인양요 당시 조선을 침공한 프랑스군이 그린 해도(海圖)에는 '리비에 살리'(Rivière Salée)라는 지명이 쓰여 있다. 문자 그대로는 '소금 강'이나 '염분이 많은 강'이라는 것이 본래의 뜻이었을 게다.
이 해도는 1866년 9월 18일 로즈 제독이 기함(旗艦) 프리모게호와 포함(砲艦) 타르디프호, 통보함 데루레드호를 직접 지휘해 강화해협을 거쳐 한강 양화진까지 탐색하며 만든 것으로서, 이후 병인년 2차 칩입 때 사용됐다. 이후 이 해도를 일본이 입수해 1876년 강화도 침공 때 사용했는데, 그 지도에서는 프랑스어 '리비에 살리'가 '소금 강'이라는 뜻의 '시오카'(鹽河)로 변했고, 이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며 지명이 굳어지게 됐다.
조선에서는 예로부터 강화해협을 갑곶강(甲串江)과 착량(窄梁)으로 불렀다. 착량은 '짠물 해협'이라는 뜻으로 프랑스어 '리비에 살리'와 같은 의미이다. 1783년 발행된 <강화부지(江華府誌)>에는 '고려 고종 때 몽골병이 갑곶강에 이르자 장수 이광(李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방비에 나섰다'거나 '우왕 3년(1377)에 착량의 손돌목에 이른 왜구(倭寇)의 배 50여 척을 불태웠다'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강화부지>에 90여 년 앞서 발행된 <강도지(江都誌)>에는 동강(東江)으로 기록돼 있다. 그래서 염하라는 말 대신 우리 말인 '강화 동강'으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동강은 강화도의 동쪽에 있는 강이라는 뜻이라 한다.

갑곶돈의 옛날 사진 /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러 온 구로다와 동행했던 사진사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사진이다. 
갑곶돈의 옛날 사진 / 성공회 신부가 1893년 강화 나루터의 성 니콜라회당을 찍은 사진이다. 건물 뒤쪽으로 갑곶돈이 보인다. 
지금의 갑곶돈대와 염하 / 왼쪽으로 구(舊)강화대교가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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