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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강화 진무영과 대한민국 국방한국의 근대가 시작된 그곳 인천 2026. 1. 6. 23:07
앞서 I편에서 강화도 갑곶진(甲串津)에서 벌어진 역사상의 역대급 전투들을 소개했다. 적당한 표현은 아니겠지만, 이상을 보면 갑곶진은 가히 대한민국 전쟁 1번지라 불려도 하자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갑곶진은 이미 수차례 교란되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운 지경이며, 게다가 갑곶돈대는 1965년 그 자리에 강화대교가 착공되며 성채의 흔적마저 파괴돼 사라졌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러 온 구로다와 동행했던 사진사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아래 사진을 다시 소환해 보면 갑곶돈대는 돌출된 바위 위에 여장(女牆)이 둘러진 형태이고, 그 아래쪽으로는 수문이 나 있으며, 성벽(강화외성)이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875~1894년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강화부지도>에서도 이 형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바로 이 자리에 강화대교가 건설되며 부득불 돈대는 1976년 그 남쪽의 치성(稚城, 돌출 성벽) 자리에 조그맣게 복원되었다.

갑곶돈대와 수문 
<강화부지도> 속의 갑곶돈대와 수문 
갑곶돈대? /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첩의 여장이 40개였다는 본래의 돈대는 없어졌고 10개의 여장이 둘러진 가짜 돈대가 진짜인양 복원됐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갑곶돈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위의 장소는 병인양요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 아닌 셈이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1866년 갑곶전투가 벌어졌을 때 조선군은 프랑스 함대의 함포사격에 도망가기 바빴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선군도 포대가 있었으니 갑곶 전쟁박물관 앞에 놓인 홍이포가 당시 사용되던 화포이다. 하지만 포탄 자체가 폭발하는 서양의 화포와 달리 단지 쇠뭉치를 날리는 형태였고 정확성마저 부족해 사실 무용지물이었다.

갑곶 전쟁박물관 앞의 홍이포 
옛 포대 자리에서 바라본 염하 
갑곶 전투를 그린 그림 / 그림과 달리 양군의 격전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시 말하지만, 강화 53개 돈대 중 요충의 으뜸으로서 8문의 대포가 설치됐던 갑곶돈대는 지금 없어졌다. 같은 제물진의 관할이었던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도 없어지고 그저 흔적만 남았는데, 갑곶돈대 북쪽의 세 돈대 중 망해돈대는 옥포제방을 축조하며 성돌을 떼어가 완전 폐허가 되었고, 제승돈대는 해병대 부대 내에 있어 들어가 볼 수 없으나 역시 폐허가 되었다는 소문이다. 그 나머지 하나인 염주돈대를 어렵사리 찾아갔지만 이 또한 흔적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염주돈대 터 
안내문만 외로이 서 있다. 
남쪽에 돈대 면석이 조금 남아 있다. / 기록에 따르면 염주돈대는 여장이 23개, 둘레가 84보라고 되어 있는 바, 갑곶돈대보다는 작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탐방객들이 주워 놓은 기와편과 사금파리 / 돈대 내부에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다. 아마도 수직하는 병사들의 숙소였을 것이다. 
염주돈대에서 바라본 문수산성과 염하 
일제강점기의 염주돈대
1679년 병조판서 김석주가 작성한 염주돈대 시방서에는 "예전에는 산꼭대기에 담장을 두른 듯한 성을 쌓았지만 지금은 직사각형의 돈대를 설치할 계획이다. 북쪽으로 제승돈의 제승정에 닿고 남으로는 갑곶진에 이르는 곳으로 근처에 잡석이 많아 용이할 듯하다"(頂舊有治築 狀如周墻 今宜設直燉 北距制勝亭 南距甲串津 雜石在其傍)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상의 기록과 <강화부지도> 속 그림을 참고해 보면 염주돈대는 아마도 서쪽 해안의 계룡돈대와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화군 내가면 황청리 282의 계룡돈대 
계룡돈대의 여장은 33개, 둘레가 79보로서 규모면에서도 염주돈대와 비슷하다. 
육군박물관 소장 염주돈대 평면도 갑곶진을 평가하자면, 사실 병인양요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76년,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신형 무기와 800명의 일본군을 실은 7척의 함선을 이끌고 상륙한 곳으로써 더 의미가 깊다.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군을 굴복시킨 일본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구로다를 파견해 판중추부사 출신의 조선 전권대사 신헌(申櫶)과 통칭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한다.

조일수호조규문 
신헌(1810~1884) 
구로다 기요타카(1840~1900) 
구로다가 타고 온 다카오(高雄)호 
운양호 사건을 일으킨 배 운요(雲揚)호 
운요호 미니어쳐 / 일본은 1868년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건조된 배수량 245톤의 이 최신형 군함으로 1875년(고종 12) 9월 20일 조선의 초지진과 영종진을 공격했다.
잘 알려진 대로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조약이다. 아울러 대표적 불평등조약으로서 조선은 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로 인해 나락으로 향하는 발길을 딛게 된다. 조선이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이유는 근대법에 대한 무지도 있었지만, 일단은 일본의 공격에 눌렸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운요호의 침략에 있어 10년 전 프랑스의 침입(병인양요)이나 4년 전 미국의 침입(신미양요) 때와 달리 물리치지 못하고 판판이 깨졌고, 구로다는 열무당 회담장에서 그와 같은 싸움을 결과를 상기시키며 일본측의 일방적 주장이 담긴 조약문에 날인하기를 요구했다.
일본군은 갑곶진에 도착한 1876년 2월 27일 당일에도 다카오마루(高雄丸)를 비롯한 7척의 군함에서 함포사격을 해대며 무력을 과시했다. 아무 곳에도 기록이 없지만 나는 그때 조선 대표단의 오금이 저렸을 것이라 생각하며, 회담장에서 문구 몇 자를 고치는 선에서 조약문이 체결된 것도 그 때문이라 여겨진다. 구로다는 조약 성사의 공을 바탕으로 백작, 육군중장, 내각총리대신이 되었고, 일본제국 최고훈장인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을 받았다.

구로다 일행이 통과한 갑곶진 진해루 /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두 번째 사진으로 짐작된다. 문 앞에 구경꾼들이 모여 있다. 
2020년 복원된 진해루 
옛 사진과 달리 현판을 안쪽에 달았다. / 고증 오류로 여겨진다. 
가와다 키이치가 찍은 강화 진무영 사진 / 이곳 진무영 열무당(閱武堂)에서 강화도조약이 체결됐다. 전에도 말했지만 강화도조약이 서문 앞 연무당(練武堂)에서 체결됐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 모습 / 진무영 자리에는 강화읍사무소가 들어섰다.
그런데 1866년 프랑스 극동함대와 1871년 막강 미 해병대의 공격을 물리친 강화 진무영의 군인들이 1875년 일본군의 공격에는 왜 그렇게 무력했을까? 가장 큰 원인은 그간 무관에게 주어졌던 강화 진무영의 지휘권이 문관에게 넘어간 일이었고, 다음은 고종이 친정(親政)과 더불어 창설한 친위부대인 무위소(武衛所)의 운영에 진무영에 들어갈 예산을 전용했기 때문이었다. 무위소는 고종이 자신의 주변과 궁궐수비를 위해 만든 새로운 군영(軍營)이었다.
무위소는 의장대와 취악대(군악대)까지 거느린 허례허식에 쩌든 군대로서 적어도 국방에 필요한 실군(實軍)이 아니었음에도 고종은 무위소에 포도대장 후보자 추천권, 전군(全軍)의 통수권, 나아가 화폐 주조권까지 부여했다. 반면 강화 진무영은 1874년 영장(營將)인 종2품 진무사가 미관말직의 문관으로 교체되고 예산도 대폭 깎이었다.
17,046명에 달했던 군인의 숫자도 격감했으니 무위소로 약 2천 명 정도가 빠져나갔고 나머지 군인들도 다른 살길을 찾아 나섰다. 어느 집단에서나 운영비가 줄면 사기가 더불어 꺾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남아 있는 군인들에게서 흥선대원군 시절의 패기를 기대하기는 힘든 노릇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전쟁이 터졌다고 따로 힘이 날 리 없었으니, 일본의 침입에 무력했던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다. 급기야 1881년 강화유수 이재원은 "진무영 지출 명목의 세입 중 인삼세(人蔘稅)가 모두 무위소에 이관되어 진무영 비용을 마련할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삼남(三南) 각 고을에서 비용을 거두어야 합니다"라는 소(疏)를 올렸는데, 이때는 이미 진무영 병사들 봉급이 10개월 이상 밀려 있는 상태였다. 임오군란의 전주곡이 울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며 방위병 복무 경력의 안규백이 국방부장관으로 기용되는 코미디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는 강감찬, 김종서, 권율도 문관 출신이었다고 강변했다. 그건 그렇다 해도 그 김종서나 권율이 훈련을 게을리했다거나 경계를 게을리했다거나 하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안규백 취임 이후 대한민국의 국방은 정말로 코미디가 되고 있으니 훈련에 있어서는 실탄 사격 대신 입으로 빵, 빵 소리를 내고, 경계에 있어서는 "북한군이 도발을 하더라도 경고사격을 하기 앞서 사격 필요 상황평가부터 하라"는 국방부의 해괴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상황평가하는 동안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내려올지도 모르겠다.
또한 작년 12월에는 합동참모본부가 북한군의 군사분계선(MDL) 침범 판단 기준을 바꿔 "군사분계선 애매하면 1953년 유엔군 기준선을 비교해 더 남쪽을 MDL 기준으로 삼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군이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MDL을 해석해 준 것이라며 "사실상 MDL이 후퇴한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새해 들어서는 더욱 기막힌 이야기가 들려왔던 바, 강원도 양구 모 사단에서 위병소 경계근무 중 총기 대신 삼단봉을 휴대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가 "무장한 적이 침투했을 때 막을 수 있겠냐"는 지적이 제기되자 철회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명령을 내린 놈은 이적죄로 처벌해야 마땅하다.
이보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지난 연말부터 육해공군과 해병대 각급 부대에 '전력운영비'가 내려오지 않아 일선 군부대은 물론 방산업체들까지 자금 부족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선 부대들은 물품구매비와 외주비, 그리고 연말연시 장병 격려 행사비 등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으며, 전역하는 장병에게 지급하여야 할 적금마저 지불하지 못하다가 일주일 후 간신히 지불했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1조 8천억 원에 달하는 국방비가 지급되지 않고 있는 이 초유의 사태에 대해 재정과 국방 당국에서 모두 이렇다 할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나랏돈을 함부로 쓰다 국방비까지 축낸 것인지, 아니면 국방비를 다른 데 전용한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러다 군인 월급까지 주지 못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배가 엉터리 항해사의 운항 미숙으로 좌초돼 모래톱에 처박힌 느낌이다.
강화외성의 관문 진해루 / 강화외성은 강화도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고려 고종 20년(1233)에 축조한 성으로, 북쪽의 적북돈대부터 초지진까지 그 길이가 약 23km에 이른다. 
진해루와 신 강화대교 
진해루에서 본 신·구 강화대교와 염하 
통제영 학당 표석 / 고종 30년에 건립된 조선 최초 해군사관학교 자리의 표석이다. 
부근의 옛 우물 자리 
조선 태종 때 만든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표석 / 1970년 강화대교가 개통될 때까지 육지와 강화도를 이어주던 최단코스의 나룻터로, 강화도로 유배된 연산군과 광해군, 호란 때의 인조와 소현세자도 이 나루를 건넜으며, 강화도령 철종도 갑곶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갔다. 
석축로 표석 옆에 한복을 입은 성모 마리아상이 서 있다. 근방에 갑곶순교성지가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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