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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신자는 잘 산다 II /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타인·고질·고모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6. 3. 24. 15:54

     

    앞서 '배신자는 잘 산다 / 예식진과 연남생의 경우'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식진(祢寔進)과 연남생(淵男生)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은 그 배신의 기록이 사서에는 물론 묘지명에 생생히 새겨져 있어 빼박 민족배신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지만, 덕분에 당대에는 잘 살았고 그 후손들도 호의호식했다. 2010년 4월 중국 산서성 서안시 장안구 곽사남촌(郭社南村) 귀인(貴人)묘에서 발견된 예식진의 아들 예소사(祢素士)와 손자 예인수(祢仁秀)의 무덤이 이를 증거한다.

     

     

    예소사 묘지명의 덮개돌 탁본
    예소사 묘지명 탁본

     

    무덤에서 발견된 예식진과 그의 형 예군, 그리고 예소사와 예인수의 묘지명(墓誌銘)에는 배신자 예식진과 그 후손들이 당나라 장안에서 모두 떵떵거리며 잘 살았음을 증언해 주었는데, 특히 손자 예소사의 묘지명에는 그가 백제인의 후손이며 그 할아버지가 당나라 황제 고종에게 의자왕을 끌고 가 바쳤다는 기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2007년 8월 '백제 멸망의 진실 - 예식진의 배신'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백제의 멸망에 예식진이라는 항장(降將)이 있었음을 최초로 밝힌 제주대학교 김영관 교수는 예인수 묘지명에 의자왕의 피체사실이 분명히 표현된 것을 두고, "손자인 예인수에 이르러서는 백제인의 정체성을 잃고 당의 백성으로 동화되는 과정이 드러난다"며 "백제 멸망의 악역을 담당해 놓고도 책임의식이 희박해져 노골적으로 할아버지의 활약상을 거리낌 없이 서술하게 된 것"이라는 소견을 밝힌 바 있다. 

     

     

    예인수 묘지명의 뚜껑돌 탁본
    예인수 묘에서 출토된 서수(瑞獸)상
    예인수 묘에서 출토된 12지신상 토용
    예인수 묘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
    예인수 묘에서 출토된 향로

     

    고구려의 경우에 있어서는 연남생과 그의 아들인 천헌성(泉獻誠), 증손자 천비(泉毖) 등도 관직을 받고 호의호식했다(당고조 이연의 '연'을 피휘하여 '천'으로 성을 바꾸었다)는 사실 및 1922년 1월 20일 중국 하남성 낙양시 북쪽 교외의 밭에서 발견된 그들의  묘지명에 대해서 앞서 밝혔다. 당시 연남생의 관직은 아버지 연개소문에 이은 대막리지(大莫離支)였던 바, 최고 관직에 있던 자가 자기 나라를 들어 바치는 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더욱 용서하기가 힘들다. 

     

     

    2005년 확인된 중국 낙양시 북망산 인근 밭의 연남생 일가 무덤 (권덕영 부산 외국어대교수 제공 사진)
    연남생의 묘지명 / 92X92cm
    연남생 묘지명의 뚜껑돌 탁본
    연남생 묘지명

     

    그런데 고구려 멸망의 선봉에 선 고구려인은 연남생뿐만이 아니었으니 668년 9월 고구려군과 나당연합군의 평양성 전투에 참가한 장수 이타인(李他仁, 609∼675) · 고질(高質=고성문, 626~697) · 고모(高牟, 640~694)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운 자들이다. '이타인 묘지명'에 의하면 이타인은 나라가 망할 기미가 있음을 알고 당나라 장수 이세적에게 투항했다고 하는데, 연남생과는 별개로 행동한 듯 보인다. 하지만 대막리지였던 연남생이 투항해 당(唐)의 대군을 끌어온 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이타인 묘지명 탁본

     

    이타인은 당시 동북 변방 12주와 말갈 37부(部)를 통솔하는 책주도독(柵州都督) 겸 총병마(總兵馬)였다. 그러나 당군의 선봉이 되어 석성(石城)을 공략해 무너뜨리고 평양성 공격에도 참여했는데, 평양성 성문을 연 승려 신성(信誠)과 공모한 인물로 짐작된다. 묘지명에서 언급된 석성은 개주의 백석성(白石城)으로, 백석성의 함락으로 대당전쟁의 추(錘)가 기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멸망 후 이타인은 당의 수도 장안으로 가 종3품인 우융위장군(右戎衛將軍)을 받았다. 당시 이타인의 나이 60세였다.

     

     

    개주의 위치
    개주의 고구려성 흔적

     

    '이타인 묘지명'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공뿐 아니라 부여(扶餘)에서 일어난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한 공도 쓰여 있다. 그는 부여에서 고구려 유민의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황명(皇命)을 받고 부여로 가 우두머리를 제거하고 반란을 진압했는데, 그 공으로 우영군(右領軍)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이타인 묘지명'은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부여 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을 알려주기도 하였으나 그것이 같은 고구려인에 진압된 씁쓸한 역사의 편린도 함께 전해주었다. 


    고질(高質)도 당에 투항해 고구려 정벌에 나선 인물이다. 고질은 고구려 명문가 출신으로 조부 고식(高式)은 최고위직인 막리지를 지냈으며, 아버지 고량(高量)은 장관급인 위두대형(位頭大兄)에 대상(大相)을 겸했고 책성도독(柵城都督)을 지냈다. 고질은 위두대형으로 장군(將軍)을 겸했으며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당나라로부터 명위장군(明威將軍) 등을 제수받았다. 그 아들 고자(高慈, 665~697)는 아버지의 공훈에 힘입어 우무위장상(右武衛長上)에 올랐다.

     

    고구려 멸망 후 고질은 696년 여하도 토격대사(濾河道討擊大使)에 임명되어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거란군 토벌에 나섰고 아들 고자는 아비를 따라 종군하였다. 고자는 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장무장군(壯武將軍)을 제수받기도 하였으나, 697년 5월 거란군과의 전투가 벌어진 마미성(磨米城) 남쪽에서 부자가 모두 전사했다. 당 조정은 그들 부자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700년 12월 귀족 묘지인 악양 낙양 합궁현(合宮縣) 평미향(平樂鄕)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고자 묘지명 탁본
    마미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본계시(本溪市, 번시시) / 본계시는 중국 요녕성 동부에 위치한 산간 도시로, 고구려 때는 요동성과 봉황성을 연결하는 전략 요충지였다.

     

    사료를 미루어보면 고질 부자는 영주를 탈출한 대조영 등 고구려 유민들을 추격하다가 마미성 일대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자의 나이는 33세였는데, 이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 부자는 끝까지 고구려 유민들을 괴롭히다 죽었다. 전에는 고자의 아버지가 고문(高文)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6년 중국 삼진출판사(三秦出版社)에서 발간한 <전당문보유(全唐文補遺) 천당지재장지특집(千唐志齋藏志特輯)>이라는 책자에 전문이 수록됨으로써 이름이 고질, 자(字)가 성문(性文)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묘지명 탁본과 출토지, 그리고 크기 등에 관한 서지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 천당지재라는 컬렉션은 고자(高慈)ㆍ고진(高震)ㆍ고현(高玄)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 묘지명을 수장한 곳으로 유명한데, <천당지재장지특집>에는 또 다른 민족배신자 고모(高牟, 640~694)의 묘지명 탁본도 실려 있다. 고모는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당시 평양성을 지키던 무장이었으나 배신하여 당군(唐軍)에 군사기밀을 넘기고 내통했으며, 후에 당나라에 귀순해 종3품 우(右)표도위대장군을 역임했다.  

     

     

    고모 묘지명 탁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배신자의 최후는 비참하다는 통설과 달리 배신자와 그 후예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근 이혜훈이라는 정치가는 좌우에서 모두 말살되는 전형적인 배신자의 최후를 맞아 화제가 되었고, 한동훈은 그쪽으로 진행 중이다. 보수 우파 쪽에서 보면 한동훈은 위에서 말한 예식진이나 이타인 못지 않은 배신자이며 그 떨거지도 마찬가지일 텐데, 법원의 일부 판사들은 그와는 무관하게 그 떨거지들의 징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인용 결정을 내려줌으로써 내부 분탕질을 돋우는 듯하다. 배신자의 최후가 영화(英華)가 되는 장면을 또다시 보게 될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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