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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리왕의 우방 존중 외교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6. 4. 20. 17:39
고대 중국에 있어 북방 흉노(匈奴)는 역대로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한고조 유방은 한(漢)나라 건국 직후인 기원전 200년 대군을 몰고 흉노를 정벌하기 위한 친정(親征)에 나섰지만 오히려 흉노의 왕 묵특선우에게 제압당해 평성 부근의 백등산에서 7일간 포위된 채 죽을 날을 기다려야만 했다. 천만다행히도 유방이 흉노에게 바친 뇌물이 통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으나(평성의 치욕), 이후 흉노에 공주와 조공을 바치며 내내 저자세 화친 정책을 유지해야 했다.

백등산 
백등산 전투 유지 모뉴먼트 
백등산 전투 재현도 
평성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다퉁시(大同市)로 추정된다. / 사진은 다퉁시에 있는 현공사(懸空寺)로 서기 491년(북위 태화 15년)에 지어졌다. 현공사는 '공중에 매달린 절'이라는 뜻이다.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재위 AD8~25) 역시 흉노정벌에 나섰다. 흉노를 제압하면 새로운 황제(왕망)의 권위와 인기가 치솟을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때 왕망은 고구려의 제2대 왕 유리왕(재위 BC 19~AD 18)에게 파병을 요청했던 바, 흡사 1600년 후에 일어난 명나라의 조선군에 대한 파병 요청과도 흡사하다. 그리고 전개 또한 비슷하니, 명나라가 북방오랑캐 후금을 정벌할 때 힘을 빌렸던 것처럼, 신나라 역시 북방오랑캐 흉노 정벌에 고구려로 하여금 힘을 보태게 한 것이었다.

한국은행 화폐전시관의 신나라 화폐 화천 당시 고구려는 고조선를 이루던 예맥족(濊貊族)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고,(그중에서도 맥족이 주축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만큼 고조선을 멸망시킨 중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컸다. 그런 마당에 신나라의 파병 요청이 마뜩할 리 없었지만, 유리왕은 소국의 국왕으로서 왕망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훗날의 광해군과 마찬가지의 처지가 됐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나라를 위해 파병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특히 흉노 정벌에 대한 파병이라니 더욱 내키지가 않았다.

중국 길림시 마오얼산에서 발견된 고조선 혹은 부여인 형상의 금동 얼굴 장식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선 유물 <한서/漢書> 위현전(韋賢傳)에는 "동쪽으로 고조선을 정벌하고 현도, 낙랑을 일으킴으로써 흉노의 왼쪽 팔을 끊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東伐朝鮮 起玄莵樂浪 以斷匈奴之左肩) 고조선을 정벌해(BC 108) 흉노의 왼쪽 날개를 끊었다는 뜻으로, 흉노와 고조선이 강한 연대를 구축한 맹방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리왕은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하는 고구려가 전통의 우방 흉노를 정벌하는 데 대한 딜레마를 극복하고 파병을 결정했다. 하지만 유리왕은 이때 광해군처럼 파병은 하되 따로 밀명을 내린 듯하니,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왕망 초에 구려(句驪)의 군사를 징발하여서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 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이에 요서태수(遼西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이 장수 엄우(嚴尤)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는 구려후(句驪侯) 추(騶)를 꼬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고구려 왕의 명칭을 하구려후(下句驪侯)라 부르게 하였다. 이에 맥인(貊人=고구려인)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이 더욱 심하여졌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유리왕이 파견은 했으되 신나라 군대의 명을 따르지 말라는 밀명을 내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 왕망도 이를 직감했던 듯 고구려 왕의 명칭을 하구려후(아랫 나라 고구려 제후)라 부르고 구려후 추(유리왕에 대한 비칭)를 목 베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 피살된 자는 유리왕이 아니라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였던 바, 왕망의 커다란 분노가 엿보인다. 아울러 왕망이 30만 대군을 동원한 흉노 정벌 역시 처참한 실패로 끝났으며, 이는 신나라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한 무리한 정책은 백성들의 삶을 황폐화시켰고, 결국 적미군(赤眉軍, 눈썹을 붉게 물들인 농민반란군) 등의 반란이 일어나 왕망은 황제 즉위 15년 만에 살해당하며 신나라는 멸망했다.
반면 이 같은 역사적 교훈과는 맞지 않게 이재명 정부는 오랜 우방인 미국과 이스라엘을 배척하고, 미국의 파병 요구는 묵살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눈치를 보며 뭉개지 말고 유리왕이나 광해군처럼 파병의 묘(妙)를 기해야 하는데, 이를 못하고 단세포적 사고의 결정을 함으로써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그저 미국의 감정만 샀다. 한마디로 약지 못하다. (반면 일본은 얄미울 정도로 대응을 잘한다)
아무런 이득도 없이 이스라엘은 또 왜 까는지 이해 못할 일이다. 제 주제도 모르고 수레를 막아서는 사마귀를 이르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에 참으로 어울리는 행동이라 여겨진다. 이재명이 말하는 실리 외교가 이런 것인가? 무엇보다 외무부장관 조현은 얼굴에 너무 감정을 드러낸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게다가 외무부장관의 직위에 있는 자가 어쩌면 저리도 표정 관리를 못하는지 그저 딱하기만 하다. 그리고 말의 무게가 너무 없다. 신임 미국대사 미셸 박의 아그레망을 거부할 자신도 미셸 박을 비토해야 한다는 조국당 김준형의 주장에는 왜 동조하는가?

지금은 황폐해진 망우산 제2보루에 대한 안내문 
보루가 있는 망우산 정상 
망우산에서 바라본 검단산 (왼쪽 아래) 
망우산에서 바라본 시루봉 고구려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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