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5호 16국 시대(304~439년)는 삼국을 통일한 서진(西晉)이 멸망한 후, 흉노(匈奴)·선비(鮮卑)·저(氐)·갈(羯)·강(羌) 등 5개 이민족이 화북지방으로 진출해 회수(淮水) 이북에 16개 나라를 세우며 난립하던 시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조(前趙: 304~329)가 건국된 304년부터 북위(北魏: 386~534)가 중원을 통일한 439년까지를 가리키며, 즈음하여 회수 이남에서는 한족(漢族)이 세운 동진·송·제·양·진의 다섯 나라가 교체되며 북위·북제·북주 등의 북쪽 나라와 남북조시대를 형성한다.
5호16국시대의 중국과 당대의 고구려 / 북연은 고구려 옆나라 후위를 이은 나라이다. (그림 출처: 다음 엽기사진실)
4세기 후반, 화북지방에서는 선비족이 세운 신흥강국 북위가 떠오르며 주변 나라들을 압박하는데, 그중에는 요서에 위치한 북연(北燕, 407~436)이라는 나라도 있었다. 북연은 5호16국시대 고구려 사람 고운(高雲 재위: 407~409)이 요서로 진출하여 세운 나라이나 고운이 죽은 뒤에는 한족인 풍발(馮跋, 재위: 409~430)이 황제가 되어 북연을 이끌었다. 그러다 제3대 황제인 풍홍(馮弘) 때에 북위의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북위는 침공에 앞서 고구려에 자신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서신을 보냈다.
북연황제 풍발의 초상1965년 중국 요녕성 조양시 서관영자(西官營子)에서 풍발의 동생이자 풍홍의 형으로 북연의 재상이었던 범양공(范陽公) 풍소불(馮素弗)의 무덤이 발굴되었다.풍소불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돼 500여 점의 귀중한 유물이 수습되었다.무덤의 주인을 확인시켜준 '범양공장'(范陽公章)풍소불의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등자 / 요녕성박물관북위의 기마토용 / 프랑스 체르누스키 박물관북위의 기마대 / 북위는 20만 이상의 강력한 기마대를 운용했던 강국이다. 1953년 서안(西安) 초양파(草場坡) 출토품
436년(장수왕 26) 침공을 시작한 북위는 연나라의 요충 백랑성(白狼城)을 함락시키고 북연의 수도 화룡(和龍)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자 북연 소성제(昭成帝) 풍홍은 밀사 양이(陽伊)를 급파해 고구려 장수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장수왕은 북위의 불간섭 경고를 무시하고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이 이끄는 수 만의 군사를 화룡으로 보내 북연을 도왔는데, 그해 5월 북위 군대에 의한 화룡 포위가 지속되자 풍홍은 결국 자신의 백성과 일족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하게 된다.
고구려 장수왕 재위 26년 시절의 중국
그때 화룡의 귀부인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피난민들의 가운데 서게 하고 그 주위를 북연의 군사들이 호위했다. 그리고 수십 리에 이르는 긴 행렬의 끝을 갈로와 맹광이 지켰는데, 북위의 군사들은 그 행렬을 보고도 고구려군과의 충돌이 두려워 수수방관했다고 하며, 북위에 약탈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지른 용성(화룡성)의 불길이 열흘간이나 타올랐다고 한다. 이때 장수왕은 북위 황제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의 풍홍 송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였던 바, 아마도 북연 태조 고운과의 종족의 인연(敍宗族) 때문이 아니었겠나 여겨진다.
북위 개마무사고구려 개마무사
하지만 풍홍은 이 같은 고마움을 망각한 채 황제랍시고 장수왕을 낮추어 보았다. 또한 다시 세력을 키워 독립정부를 수립하려 시도하는 등 오만하고 주제 모르는 행동을 보였고, 이에 분노한 장수왕은 풍홍을 고구려의 외곽지역인 북풍(北豐, 선양으로 추정됨)으로 강제 이송시켰다. 그러자 풍홍은 장수왕의 처사에 반발해 남조 송나라로 재망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풍홍은 실제로 송(宋)과 접촉하였으니, 송 태조 유의륭(文皇帝 劉義隆, 407~453)은 왕백구(王白駒)를 파견하여 풍홍을 데려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던 장수왕은 438년 손수(孫漱)와 고구(高仇)를 보내 풍홍과 그 식솔 10여 명을 죽여버렸다. 그러자 풍홍을 데려가고자 했던 왕백구가 군사 7,000명을 이끌고 고구려군을 습격하였고, 이 불의의 기습에 고구는 전사하고 손수는 사로잡히게 된다.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통구 12호분의 포로 참수도
그러나 왕백구가 고구려 땅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살아남을 재간은 없을 터, 그도 고구려군에 사로잡혔다. 분노한 장수왕은 왕백구를 참수하려 했지만, 송나라와의 외교마찰을 염려한 신하들의 만류로 죽이지 않고 본국으로 압송했다. 이 사건이 적힌 <삼국사기>에는 이에 관한 더 이상의 언급은 없으나, 왕백구에게 사로잡힌 손수는 그에 앞서 풀려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의 작금의 외교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간다고는 하나, 위에서 말한 고구려 장수왕 때처럼 민감하고 다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의 고구려는 중국의 황제를 직접 처단할 만큼 강력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복잡한 동아시아 정세를 살펴 화를 누르고 확전을 경계하는 절제된 외교술을 구사하고 있다.
5세기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도 그러했거늘, 그보다 국력이 달려 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마구 성질을 드러내며 감정 섞인 외교를 구가하고 있다. 방구석 여포의 권력에 취한 것도 같다. 그럼에도 말릴 생각은 아니하고 외교 천재라며 명비어천가를 불러대는 꼴을 보노라면 부끄러움을 넘어 심각한 위기감까지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