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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로왕의 외교 패착과 장수왕의 남진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6. 4. 24. 18:3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에 대해 "427년 봄 2월 평양으로 천도하였다(十五年 春二月 移都平壤)"는 단 한 줄의 기사만이 전한다. 500년 왕도(王都)를 옮기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어찌 됐든 우리는 그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를 한 것은 남하정책을 위해서라고 배웠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맞는 얘기일까? 

     

    광개토대왕 = 북진정책, 장수왕 = 남하정책, 이런 식으로 기계적으로 가르치고 배웠던 이 말은 사실 옳은 말이 아니다. 고구려본기에 쓰여 있는 대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해는 재위 15년인 서른세 살 때이다. 그러나 남하정책의 첫 삽을 뜬 해는 이후 48년이 지난 재위 63년 째인 475년으로, 당시 그의 나이 무려 여든두 살이었다. 48년이나 꿈적 않다가 여든두 살의 고령에 움직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노릇이다. 

     

     

    중원 고구려비
    1979년 충주 입석마을에서 발견된 5세기 고구려 척경비로, 높이 203cm 너비 55cm이다. 당시의 흥분이 잊히지 않는다.

     

    그가 장수했기에 망정이지(그래서 장수왕이다) 일찍 타계했다면 남하정책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장수왕이 남하하여 백제와 신라를 친 이유는 모종의 계획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 백제 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가 어찌어찌하다 고구려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어찌어찌에의 배경에는 필시 고구려와 북위의 긴밀한 외교관계가 한몫했을 터, 훗날인 491년,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북위의 효문제는 흰 위모(베 모자)와 베 심의(흰 옷)를 입고 동쪽 교외로 나가 장수왕을 위해 애도(哀悼)를 표했을 정도였다.

     

    고구려 남하의 배경은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 454~476)에게 보낸 '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 백제가 위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고구려 정벌을 청하는 표)'가 장수왕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니, 이를 읽은 장수왕은 백제가 북위에게 침략을 사주한 사실과 선조인 고국원왕을 거듭해 모욕한 사실에 대노한다. (※ '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는 <북위서>와 <심국사기> 등의 사서에 전문이 전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왕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으니,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정보에 따라 바둑 고수인 도림(道琳)을 승려로 위장 남파시켜 개로왕에게 접근하게 만든다. 이후 뛰어난 바둑 실력으로 개로왕의 환심을 산 도림은 궁궐과 사성(蛇城) 축조 등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하도록 사주하고, 개로왕은 이를 따랐던 바, 이로 인해 국고가 크게 낭비되고 민심이 이반하게 된다. 

     

     

    당시의 동아시아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한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棊局) / '자줏빛 나무에 그림이 새겨진 바둑판'이라는 뜻으로, 일본 나라 시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바둑판이다.

     

    이렇듯 사전 작업을 마친 장수왕은 475년 음력 9월, 82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5만 대군을 몰고 내려가 백제를 공격한다. 백제는 당연히 죽을 힘까지 동원해 저항했겠으나 결국 힘이 다해 한성백제 500년의 왕업이 끝나게 된다.(※정확히는 BC18년부터 AD475년까지 493년) 그 한성백제 마지막 날이 한·일의 사서에 전해진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의 기록에 전하길 개로왕 21년 겨울 고구려군이 와서 대성을 7일 밤낮으로 공격하였고 왕성이 함락되었던 바, 백제는 결국 위례성을 잃어버리고..... (百濟記傳 蓋鹵王 乙卯年冬 貃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일본서기 / 웅략천황(雄略天皇) 20년조>

     

     

    풍납토성 성벽 능선 / 풍납토성은 총 둘레 3.5킬로미터, 최대 너비 60미터, 최대 높이 13.3미터, 면적 약 24만 평의 방대한 규모의 도성이었다. 현재는 2.1킬로미터의 성벽만 남아 있다.
    천호대교 남단 쪽 풍납토성 능선
    풍납토성 북쪽 능선
    풍납토성 북문지
    위례성 당시의 북문 상상도
    풍납토성 내에 재현된 백제 민가
    백제 민가와 주거지 터
    백제 민가의 수혈식 창고 터
    수혈 주거지군
    풍납백제 문화공원 안 백제 시대 도로 / 길 양편으로 발굴 당시 주목받았던 배수 기능의 수로가 보인다. 3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이다.
    풍납토성 내 백제 주거지 상상도
    백제 최초 기단식 건물지 / 공동창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라ㅡ1호 건물지와 라-2호 건물지 / 궁궐 혹은 관공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呂자형 건물지
    동명왕 사당으로 추정되는 呂자형 건물지의 발굴 당시 사진
    위 건물지의 스캔 렌더링 / 한국 3d 솔루션(주)
    부근의 백제 우물
    발굴 당시의 우물 안 백제 옹기
    풍납토성에서 수습된 백제기와 / 한성백제박물관
    민가 바깥 쪽 풍납토성 내성 성벽
    하늘에서 본 풍납토성
    토성 내 부분적으로 본존되는 백제문화층
    보상 이전된 주택을 철거할 때 지표조사를 한 결과를 표시한 푯말들이다.
    천호대로와 연접한 풍납토성 바람드리길 / 풍납(風納)은 '바람드리'라는 순수 우리말에서 비롯됐다. 백제시절 풍납토성은 아마도 위례성으로 불렸을 것이다.

     

    풍납토성에서 농성전을 벌이던 개로왕은 고구려의 공격이 거세지자 7일째 되는 날, 지금의 올림픽공원 내의 몽촌토성으로 이거해 농성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마저 함락당했던 바, 지금의 올림픽파크텔 방향인 서문으로 나와 도망가다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 등에 의해 붙잡혔다. 그리고 아차산 밑에서 결국 참수당해 죽으니, 당시의 상황을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가 리얼하게 증언한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 고구려의 고위관직명)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재증·고이는 두 글자로 된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이어 남성(南城)을 공격하니 성 안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체포해 말에서 내려 절을 하게 한 다음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었으며,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몽촌토성 앞 백제 주거지가 있던 곳 / 그곳은 지금도 주거지이니 과거에는 진주아파트단지가 있었고 현재는 잠실 레미안아이파크 아파트단지가 위치한다.
    몽촌토성역 1번 출구에서 본 레미안아이파크 아파트단지 / 앞 도로에는 한성백제 시대에도 잡석과 점토를 섞어 20~50cm 높이로 단단히 다진 길이 700m, 폭10~20m에 달하는 포장도로가 있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하면서 도로를 개축해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었다.
    2022년 진주아파트 재건축 당시의 발굴 사진
    발굴 때 출토된 곡옥형 석재 1점
    위 석재가 발견된 백제인 주거지 / 한성백제박물관 자료
    개로왕이 농성한 몽촌토성과 해자
    개로왕이 도망간 올림픽파크텔 쪽
    몽촌토성 성벽과 아차산
    몽촌토성 출토 백제군 창 / 한성백제박물관
     

    장수왕은 내친김에 남한강까지 진출해 신라와의 사이에 새로운 국경선을 긋고 근방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이후 평양으로 개선한 장수왕은 479년 다시 북으로 진출해 몽골계의 유연(柔然)과 함께 다싱안링 서쪽 산록의 거란계 지두우(地豆于)를 분할했다. 고구려와 유연이 지두우를 분할한 것은 고구려에 적대적이던 물길(勿吉=말갈) 등 지두우 인근 부족들이 북위 및 백제와 통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지금은 중원고구려비 전시관에 보관돼 있는 비문

    장수왕의 업적이 드러나는 지도 (출처: 동아일보)
     

    이상 개로왕과 장수왕의 외교정책을 보며 느끼는 것은 훌륭한 외교가는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기회를 잡으면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작금의 대한민국 지도자들은 경거망동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그러다가는 개로왕처럼 나라의 큰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에 대해 피력한 윤명철 교수의 글을 옮겨본다. 내가 이제껏 접한 학설 중 가장 타당성 있는 내용이다.  

     

    광개토대왕(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에게는 두 개의 시대적 과제가 있었다. 하나는 강대국의 완성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종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일하는 일이었다. 장수왕은 초기에는 산업을 발전시키고, 무역을 활발하게 하며 불교를 수용하는 등 내부 안정에 주력했다. 바야흐로 즉위 15년째가 되던 해 그는 토착세력들의 반발과 실패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이는 당시 급변하는 국제질서와 큰 연관이 있다.

     

    중국의 화북 지방은 선비족인 북위로 통일되었고, 양쯔강 하류의 강남 지방에는 한족의 송나라가 건국됐다. 소위 남북 분단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북방 초원에서는 몽골족의 일파인 유연이 유목국가를 세웠다. 유연은 424년 기병 6만 명을 동원하여 북위를 공격했다. 남쪽에서는 백제가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가야와 왜(倭)도 발언권을 높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동아시아는 4개 강대국을 중심으로 중소 국가들이 새판을 짜는 전환기였던 것이었다. 만약 장수왕이 해양력을 더 강화시킨다면 동아 지중해의 중핵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평양 천도를 새 정책의 핵심과제로 선택했다. 평양은 내륙에 있지만 대동강 하구(남포항)를 통해서 황해와 이어진 훌륭한 항구도시이다. 1866년에는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들어왔다가 공격을 받고 전소된 일도 있었다. 황해의 해상권을 확보하고, 해양과 대륙으로 이어진 해륙 교통망을 발달시키는 데 유리한 거점이다. 국내성이 갖지 못한 장점이기도 했다.

     

    장수왕은 이 점을 간파했고, 평양을 중심으로 등거리 외교망을 구축하였다. 북위와는 황해북부항로로 긴밀하게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도 활발하게 하였다. 동시에 송나라와의 전략적 교류도 잊지 않았다. 439년 장수왕은 송나라에 전략물자인 군마 800필을 보낸다. 대규모의 선단이 황해를 1000여 km 항해해 난징까지 항해한 것이다. 479년에는 호시(화살) 석궁 등 무기를 수출하기도 했다.

     

    장수왕은 유연과 송나라를 연결하면서 중간의 북위를 포위하고 압박하는 조정자 역할도 했다. 우리 민족 사이에는 적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백제 및 왜가 중국 지역과 교류하는 것을 해상에서 봉쇄하고, 신라 등이 중국지역과 외교관계를 맺는 일에 개입하였다. 평양 지역은 물류 거점(허브)과 국제문화의 교차점 역할도 할 수 있었다. 남포항을 출항한 선단들은 여러 나라와 무역을 했다. 동남아시아와도 간접무역을 했고, 일본열도, 제주도와도 무역을 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 궁성 안학궁을 지었다. 이 사진은 안학궁을 보위하고 있는 대성산성의 남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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