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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와 사돈이 되고자 떼쓰는 북위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6. 4. 27. 12:54

     

    앞서 서울 소공동(小公洞) 의 유래를 말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서울시 중구 소공동은 조선초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살던 궁이 있던 데서 유래됐다. 경정공주가 살던 동네를 작은공주골, 살던 집을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洞名)으로 굳어진 것인데, 지금의 조선호텔과 황궁우 자리라 여겨진다. 경정공주와 남편 조대림이 살던 집은 1583년 선조의 아들 의안군이 거주하면서 200여 칸의 대저택으로 개축되었다.
     
    이 대저택은 임진왜란 때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그의 직할군 숙소가 되었고, 다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명군의 숙소로 쓰였다. 이를 계기로 이후 이곳은 명나라 및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인 남별궁(南別宮)이 되어 조선주재 공사관의 역할을 하며 조선의 내정을 간섭했다. 1895년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가 물러가자 고종은 이곳에 환구단을 세워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나 한일합방 후 일본은 그것을 헐어내고 조선철도호텔을 지었다. 현재는 웨스틴조선호텔이 위치한다. 

     

     

    조선철도호텔 자리에 지었진 웨스틴조선호텔

     

    경정공주에 대한 부연 설명 드리자면, 그는 조선 제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로,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의 친누나이다. 경정공주개국공신 조준의 아들인 평양부원군 조대림과 일찍 혼인했는데, 조혼의 배경에는 명나라의 추근댐이 있었다. 1392년 조선의 건국에 조금 앞서 건국된 명나라(1368년)는 아직 세력이 남아 있는 북원(北元, 북쪽으로 쫓겨간 원나라)과 조선과의 연대를 차단하고 내정을 간섭할 방안을 찾았다.

     

    명나라는 그 방법으로 조선 국왕의 딸과 명나라 황족을 혼인시키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 이방원은 경정공주의 혼인을 서둘렀던 바,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 조대림에게 시집보냈다. 이때 혼수로서 숭례문 안에 큰집을 지어준 것이 소공주댁이다. 이후로도 명나라는 조선의 왕족, 혹은 양반가의 딸을 공녀로 바치라는 요구를 해 와 조정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는데, 혹간 넋 빠진 자가 자진해서 자신의 가족을 공녀로 보내 출세의 발판을 삼았다.


     

    고양시 내유동 산79의 경정공주 묘

     

    그 대표적인 자가 바로 세종조의 한확(韓確, 1400~1456)으로 그는 미인으로 소문났던 자신의 두 여동생을 모두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 삼한갑족(우리나라 최고 가문)에 올랐던 바, 세종도 세조도 모두 그를 사돈 삼으려 애썼다. 유명한 세조의 며느리 인수대비가 바로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다. 한확의 위세는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거대한 유택이 방증한다. 마을 이름이 능내(陵內)가 된 것도 그에 연유되었으니, 그 동네에는 왕릉이 없지만 왕릉처럼 큰 무덤이 있는 곳이라 하여 능안 마을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69-5 환확의 무덤

     

    이런 지랄맞음이 구한말까지도 이어졌으니, 갑신정변 이후 감국대신으로서 조선에 주둔하며 왕 노릇을 하던 위안스카이(1859~1916)는 안동김문 양반가의 여식을 첩으로 두었다. 조선 정부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헌상한 여자였다. 위안스카이는 이때 그녀의 몸종 이씨까지 데려가 함께 첩으로 삼는 모욕적인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조선 주둔 10년 동안 조선인 여성 3명을 첩으로 두어 이들에게서 모두 15명(7남 8녀)의 자식을 얻었다.

     

    위안스카이는 1895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재빨리 첩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튀었는데, 중국으로 가서는 위안스카이 본부인에 의해 나이순 대로 서열이 정해져 몸종이던 여자가 졸지에 언니로서 윗사람이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의 자식 중 안동김씨에게서 태어난 위안커원은 장기와 마작의 달인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아들 위안자류는 미국에서 세계적 물리학자가 되었다. 김씨의 몸종 이씨에게서 난 위안커취안는 한때 황제 위안스카이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을 정도로 출중함을 보였으나 위안스카이 몰락 후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다 죽었다)

     

    1892년 조선 개국 501년을 기념해 주조한 이 닷량 은화는 두 번 주조됐다 / 위안스카이가 건방지다며 대조선의 대(大)를 지우게 한 까닭이다.
    위 주화를 찍어낸 인천전환국의 압연기 / 인천시립박물관

     

    조선의 역사는 처음부터 말(末)까지 이렇듯 서글프다. 모화(慕華) 사대주의를 추종한 까닭인데, 우리 대한민국이 거림낌없는 자주국이 된 2017년 이같은 서글픔이 되살아났다. 그해 12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베이징대학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같은 나라', 한국을 '작은 나라'라고 표현하며 중국 중심의 동북아 질서를 인정하고 중국몽(中國夢)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정말로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무얼 들은 거지....?'

     

    문재인의 이 같은 발언은 사드 갈등을 해소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도였다고는 하나 굴종 외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안 해도 될 말을 쓸데없이 뱉은 것임에 분명하니 (나는 지금도 그 원고를 써 준 참모가 어떤 놈인가 궁금하다) 그 결과로써 돌아온 것은 방문기간 3박 4일, 총 10끼의 식사 중 8끼의 '혼밥'이었다. 청와대가 뭐라 변명을 했든 이런 경우는 전례를 찾기 힘든 외교 홀대로서, 중국의 한국 길들이기의 일환에 더도 덜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우리나라 역사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문재인의 처량한 '혼밥'

     

    과연, 고구려 때는 어땠을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5세기 장수왕 때도 중국에서는 고구려의 공주를 보내라는 청을 넣었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으로는 유연, 북위, 후연 등과 국경을 접했는데, 이중 강국으로 군림했던 북위는 계속해서 장수왕의 딸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 고구려조를 보면 북위 문명태후(文明太后)는 헌문제(獻文帝) 탁발홍(拓跋弘, 454~476)의 후궁으로써 장수왕의 딸을 원해 청을 넣었다. 

     

    곤란해진 장수왕은 '공주는 이미 출가했으므로 조카딸을 대신 보내겠노라' 했다. 그럼에도 북위는 '상관 없으니 보내기만 해달라'며, 제후인 안락왕(安樂王) 탁발진(拓跋眞)을 국경까지 보내 예물을 전달했다. 아무도 보내기 싫어 핑계를 댔던 장수왕은 신하들을 의견을 들어 이번에는 '그간 조카딸이 죽었다'고 둘러댔다. 이쯤되면 북위가 화를 낼만했겠으나 웬걸, 그렇다면 '종친 딸의 한 명을 선발해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북위의 이 같은 끈질긴 청혼은 동아시아의 강대국 고구려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북위 황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혈족을 아내로 맞음으로써 고구려와의 결혼동맹을 맺고자 노력했다. <위서>에는 '이 혼사는 현문제가 급서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고 쓰여 있는데, 이후로도 북위는 고구려와의 혈연동맹을 통한 우방으로서의 확실한 외교관계를 원했던 듯, 고구려 여인 고조용(高照容, 469~497)을 효문제(孝文帝)의 부인으로 맞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북위로 시집간 고구려 여인 문소황태후 고조용'에서 자세히 살펴 본 바 있다. 

     

    ※ 본문과는 상관 없는 얘기이나, 어제 일요일 오후 아차산에서 만난 등산객 남녀에게 미안한을 전한다. 망우산 쪽에서 넘어온 이들은 시루봉을 물었고, 나는 자세히 알려줬다. 그런데 헤어지고 생각보니 내가 가르쳐준 곳은 시루봉이 아닌 홍련봉이었다. 일대의 산을 너무 잘 안다는 자만감이 부른 신중치 못한 대답이었다. 물론 오후 4에 가까운 만큼 그 장소에서 시루봉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말씀 드렸고, 그들도 하산길인 만큼 더 이상의 등반은 없었을 테지만, 다른 곳도 아닌 산에서 길을 잘못 가르쳐준 점에 사과의 말씀을 아니 드릴 수 없을 듯하다. 이 블로그를 꼭 보았으면 좋겠다. 

     

     

    아차산 고구려 2보루 / 5~6세기 고구려가 남진을 위해 한강 북쪽에 쌓은 보루군(群)이다.
    아차산 3보루
    3보루가 있던 해발 295.7m 아차산 정상
    아차산 3보루 안내문
    아차산 4보루 / 100명 안팎의 군사들이 생활하던 병영이 있던 곳이다.
    4보루 성벽 / 좌우로 치(稚)가 돌출 돼 있다.
    치에서 바라본 한강
    왼쪽이 돌출된 치(치성)이다. / 치는 고구려 성의 특징으로 3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으며 평시에는 망루 역할을 한다.
    위에서 본 치
    병영 추정 건물지가 있던 곳 / 온돌 유구가 발견됐다.
    3m 깊이의 저수조가 있던 곳
    아차산 4보루 안내문
    유구배치도
    아차산 6보루
    높이 3.9m의 아차산 3층석탑
    안내문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해발 180m 지점의 넓은 암반 위에 위치하며, 주변에 사찰과 관계된 유적이 조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산천의 지세(地勢)를 바로잡기 위한 비보(裨補) 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형식과 양식, 결구 수법 등이 고려 초 충청과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일시적으로 성행한 백제계 석탑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 언뜻 신라탑 같으나 직접 대면하면 백제탑의 느낌이 다가온다.
    이 탑은 찾기가 의외로 어렵다. / GPS로도 찾기 어려우므로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있으면 댓글을 올려주시길 바란다. 우미내 고구려 대장간마을로부터의 첩경을 안내해 드리겠다.
    탑 인근에서 본 한강
    절벽 아래의 아차산 범굴사
    범굴사 삼존불
    범굴사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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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