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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삼문의 충절지사 & 707특임단 김현태 단장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5. 10. 21:11

     
    1453년 계유정난의 현장이었던 종로 재동길과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집 터는 지척으로, 성삼문의 집 터 표석은 현재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다. 정독도서관 자리는 훗날 김옥균과 서재필이 살던 곳이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혁명과는 뗄 수 없는 자리인 듯싶다. 오늘은 내가 생각하는 조선 최고의 충신 성삼문을 돌이켜 살펴보고자 그가 살던 집 터를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성삼문 선생 살던 곳' 표석
    부근의 고택 / '진단학회 창립 터' 표석이 있다. 진단학회는 1934년 설립된 한국학 연구소이다.

     
    나는 과거 정독도서관에 다니며 그곳이 줄곧 성삼문의 생가라고 여겨왔다. '집 터 = 생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알고 보니 성삼문의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군(당시 홍주)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삼문은 1418년(태종 18) 홍주군 적동리 노은동(현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는 가본 적이 없지만 예전 지역 홍보물을 통해 성삼문의 생가지로 알려진 '노은리 고택'과 그의 위패를 모신 노은단을 본 적이 있다.

     

     

    성삼문의 생가로 전해지는 노은리 고택

     
    홍북읍 노은리에는 무덤도 전하는데, 아마도 가묘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 사육신 묘 내에 있는 성삼문의 묘와 충남 논산시 양촌리에 있는 성삼문의 묘는 모두 진짜이다. 한양 군기시 뒤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한 후 성삼문의 시신은 조선팔도에 회시(廻示) 되었는데, 그 시신 일부를 김시습 등이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매장한 것이 현재 사육신 묘 내에 있는 성씨지묘(成氏之墓)이고, 팔도로 보내진 시신 중 다리 한쪽을 매장한 곳이 현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8의 무덤이다.  
     
     

    노량진 사육신 묘 내의 성씨지묘
    묘소 내에 숙종 때 건립된 '6신묘비명'

     
    두서 없이 말하자면 구한말 조선 육영공원의 교사로 왔던 헐버트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에 매료되어 "한글은 과학적이고 간편하고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음성언어로서,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문자 중에 하나님에 틀림없다"(It is certainly one of the finest alphabets in existence)는 취지의 글을 해외 여러 매체에 기고했는데, 그중 한글 창제를 도왔다는 집현전 학자 중 성삼문에 관한 일화라며 아래의 같은 내용을 소개했다.   
     
    성삼문이 태어나기 직전 성삼문의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세 번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성삼문이 태어나기 전, 지붕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서 아들이 태어났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성삼문의 아버지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다음 날에 또 소리가 들리면서 같은 질문이 왔다. 또 아니라고 답변했다. 
     
    셋째 날에 똑같은 질문이 왔다. 그때 성삼문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났다고 대답하면서 왜 세 번 질문했느냐고 하늘에 물었다. 하늘에서 대답하기를 첫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세계에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이요, 두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났다면 그는 '조선에서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될 것'이며, 세 번째 질문하는 날 태어난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예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성삼문의 아버지는 세 번의 질문이 있었다는 뜻에서 아들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했다. 헐버트는 그 글의 끝 구절에서 '실제로 성삼문은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아들 중 하나였으며, 한글 창제에 크게 공헌하여 모든 사람이 훌륭한 문자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라며  세 번째 질문의 의미와 똑같은 인물이 되었다고 했다. (이상 <파란 눈의 한국인 헐버트>에서 발췌)  
     
     

    훈민정음 해례본

     
    하지만 계유정난이라는 정변(政變)이 그의 인생을 다른 쪽으로 몰고 갔다. 1452년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탐냈다. 이에 그는 한명회, 권람, 홍윤성, 양정 등의 심복들과 1453년 계유년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의 권신을 참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유명한 계유정난이다.
     
    이때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는 왕명을 빙자해 권신들을 입궐시켜 살해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살생부(殺生簿)로 여기 이름이 적힌 자는 다 죽었다. 일환으로써 한명회는 자객을 보내 재동과 그 인근에 살던 윤처공, 이명민, 조번, 김대정, 원구, 허후, 이우직 등의 문무대신을 살해했는데, 재동은 당시 살해된 자들이 흘린 피와 피비린내를 덮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재(灰)를 가지고 나와 뿌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 잿골, 즉 재동이 갑오개혁 이후 재동(齋洞)이라는 한자명으로 등록되었던 것이다.
     
    아래 사진은 퍼시벌 로웰(1855~1916)이 찍은 1883년의 재동길로 우리에게 익숙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책의 저자이다. 하버드대학교를 나온 그는 젊은 시절 극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일본을 여행했는데, 여행기간 중인 1883년 5월, 마침 미국으로 가는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報聘使, 조선 수호통상사절단) 일행을 만나게 된다. 주일미국공사의 요청으로 보빙사 일행을 미국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게 된 로웰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고, 이에 고종이 그해 12월 그를 국빈으로 초대했다.  
     
    그는 조선에 머물 때 아마도 영의정 홍순목의 집에 묶었던 듯하니, 보빙사 일행 중에 그의 아들 홍영식이 포함돼 있던 까닭이었다. 로웰은 홍순목 집앞 사진의 제목을  'The Street of Ashes', 즉 '재동길'이라 했다. 그 거리 왼쪽,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홍순목의 집으로, 로웰은 '나의 집은 (지게꾼) 나뭇단 전경의 왼쪽에 있다'(My house over on the left, brushwood in foreground)고 했다. 그 1년 뒤 홍영식은 자신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며 청나라 군대에 살해당했고, 홍순목은 며느리, 손자와 함께 이 집에서 자살했다. 이 길의 끝 왼쪽에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집이 있었고, 조선초에는 성삼문의 집이 있었다.
      
     

    퍼시벌 로웰이 찍은 재동길
    2026년 찍은 재동길 / 왼쪽에 헌법재판소가 보인다.
    영의정 홍순목의 집 자리에 1993년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위 인사들은 단종을 폐위시킨 뒤 수양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 사람이 곧 세조이다. 그리고 곧 이에 반대하는 내란이 꿈틀대었던 바, 성삼문을 비롯한 일단(一團)의 절의지사(節義之士)들이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기도가 있었다. 하지만 거사를 치르기 전 김질의 변절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성삼문은 국문을 받고 처형됐다. 성삼문 일가는 멸족을 당했으니 아버지 성승을 비롯해 동생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과 아들 성맹첨, 성맹년, 성맹종 등 남자는 모조리 주살당하고 조부 성달생의 묘는 훼철되었다.  
     
     

    세조의 친국이 행해졌던 경복궁 사정전 앞

     
    배신자 김질은 어찌 되었을까? 당시 성균관사예(성균관 유생들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관직)였던 김질은 성삼문의 제안으로 단종 복위 거사에 동참하였으나 갑자기 겁을 먹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세조에게 성삼문의 계획을 밀고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 역사적으로는 역적임에 분명하지만 세조에게는 충신이었을 터, 크게 신임을 받아 공조판서·병조판서·우참찬·경상감사를 거쳐 삼정승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좌의정이 된 뒤 한명회·신숙주 등과 함께 원로원을 꾸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리다 편안히 죽었다.  
     
     

    포천시 내촌면의 김질 묘

     
    성삼문이 죽은 뒤 그의 글도 따라 모두 폐기되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유추해 볼 길이 없는데,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성삼문이 1447년의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할 때 그가 제출했던 시권(試券, 과거 시험의 답안지)이 중요한 정보원이 된다고 말한다. 거기서 성삼문은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 되고 법은 정치의 도구가 된다"고 썼던 바, 풀어보자면 "마음이 고약한 놈이 정치를 하면 나라가 개판이 되고, 법은 그 고약한 놈은 도구가 된다"는 뜻이다. 마치 누구를 꼭 집어 말하는 듯하다. 
     
    그는 또" 모진 추위 뒤에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있고, 격동하는 물굽이 아래는 반드시 깊은 못이 있나니, 치란(治亂)이 서로 잇대는 것은 고금이 동일하다"고 썼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만고불변의 진리인 듯하니, 아무리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는 자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치란(治亂)의 세월에 심판받게 된다. 치란은 '혼란에 빠진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내란 어쩌구하는 소용돌이에 많은 사람들이 빨려들어 직을 잃거나 직업을 잃거나, 감옥에 가거나 혹은 거기에 더해 퇴직연금까지 반토막 되는 불운을 겪고 있다.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이러한 불운에 얽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좌절해 권력 앞에 굴하거나 협조해 죄를 경감받으려는 비겁함을 보이고 있어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충절의 의인이 있어 주목하게 만드니 바로 김현태 단장이다.

     

    그는 2025년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발동한 비상계엄령에 특수부대인 707특임단을 이끌고 국회로 출동했다가 2025년 2월 내란중요임무종사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검찰 특수본에 의해 불구속 기소됐다. 그는 이로 인해 여러 번 법정에 섰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또한 비겁한 모습이나 일체의 정치색을 드러냄이 없이 사실만을 진술함으로써 적어도 나의 눈에는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참군인이요 모처럼의 진짜 사나이로서 비쳐졌다. (질질 짜는 군 지휘관도 있던 마당이었다)

     

    그는 이로 인해 육사 졸업 후 줄곧 몸을 담았던 군을 떠나게 되었던 바, 바로 눈앞에 있던 스타(장군)의 자리를 잃었을 뿐 아니라 파면되어 군적을 박탈당했고 군인 연금 감액 조치까지 받았다. 그것이 민주당에 협조한 다른 장교들과 차별적이라 공분이 일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에 한마디 원망도 없는데, 얼마전인 2026년 5월 8일, 이재명의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내란 프레임에 희생된 군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뜻을 밝혔다. 부디 진짜 사나이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6년 1월 헌재에 증인출석하는 김현태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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