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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롯데호텔 부근에 살았던 역관 홍순언 이야기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6. 5. 27. 19:16

     

    앞서 '공산사상의 한반도 유입 과정 & 좌빨 결성 장소'에서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를 좌빨 박헌영이 1925년 4월 17일 김약수·김재봉 등 십 여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어 한국 최초로 공산당이 조직된 역사적(?) 장소라고 소개한 바 있다. 1925년 당시 그곳에 있었던 유명한 중국음식점 아서원에서 일어난 일로, 이후 그 자리에 반도호텔과 롯데호텔이 차례로 지어졌던 것이다.  
     
    당시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을 김약수는 해방 후 제헌국회의 초대 부의장이 되기도 하는 바, 당시 좌빨들의 활약이 얼마나 대찼는가를 알 수 있다. 김약수는 1949년 이문원, 노일환 등 소장파 국회의원들과 함께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등 좌파 색깔을 드러내다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김약수는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에 의해 석방되었으며, 곧바로 북한 정권에 합류하여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55년 박헌영 숙청 당시 함께 축출되었고 이후 험지로 보내져 노동에 종사하다 1964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선공산당 창당된 아서원
    김약수 (1890~1964)

     
    그렇다면 롯데호텔 앞에  조선공산당 창당에 관한 표석이 있을까?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자면 없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한번 찾아보았는데, 뜻밖에도 롯데호텔 정문 앞 인도 쪽에 놓인 표석이 보였다. 하지만 내용이 달랐으니 제목은 고운담골이었고 임진왜란 때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명나라에 갔을 때 여인을 도와준 일로 보은단(報恩緞)이란 글씨를 수놓은 비단을 받았다 하여 보은단골이 고운담골로 변음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고운담골 표석
    부근 롯데면세점 앞 왜식(倭式) 조경
    소공동 롯데호텔서울

     
    역관 홍순언(1530~1598)에 대해서는 전에 들은 바가 있다. 하지만 그가 살던 집이 이 근방이라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 또 이 근방이 임오군란 때 죽은 탐관 영의정 이최응이 살던 곳이라는 기록을 본 듯도 하니 홍순언은 꽤 좋은 동네에 산 셈인데, 그런데 서울 강남구 청담근린공원 내에도 조선시대 역관 홍순언과 명나라 여인의 국경을 초월한 의리와 보은 이야기를 담은 '홍순언과 강남녀의 전설'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찌 된 일일까? 

     

     

    청담근린공원 내의 '홍순언과 강남녀의 전설' 비석
    청담근린공원 내에 있는 직산현감 권대균과 부인 남원양씨 묘 / 위 스토리와는 무관함
    위 무덤의 문석인
    청담근린공원 내에 있는 사헌부 감찰 권란과 부인 파평윤씨 묘 / 위 스토리와는 무관함
    공원 내 청담정


    이유인즉 간단하다. 홍순언은 당시 경기도 광주부에 속했던 청담골 산골에서 태어난 미천한 서얼이었으나 역관으로 입신한 후 당시 조선의 최대 외교 현안이었던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한 덕에 공신에 책훈되고 당릉군(唐陵君)에 올라 어엿한 양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4대문 안 도성 양반골에서 살게 된 것이다. '종계변무'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기록인 <태조 고황제 실록>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은 일을  말함이다. 
     
    '종계(宗系)'는 가문의 혈통을, '변무(辨誣)'는 억울한 무고를 가려내어 밝힌다는 뜻으로서, 조선 초기부터 200년간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으나 해결하지 못한 국가적 난제였던 바, 실제로는 간단한 일이 아니라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일개 역관인 홍순언이 해결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홍순언은 그동안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바로 고운담골이라는 동네 이름에 담겨 있는 바, 축약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선조 시절, 서얼 출신의 역관 홍순언은 명나라 북경에 사신단을 따라갔다가 호기심에 통주 홍등가를 찾았다. 그런데 자신을 접대하기 위해 나온 기녀는 화려한 빛깔의 옷이 아니 수수한 흰 옷을 입은 미녀였다. 그것이 마치 상복 같다는 느낌이 든 홍순언이 의아해 연유를 물었더니 아닌 게 아니라 그러했다. 여인이 이르기를, 자신은 절강 사람으로 부모와 함께 북경으로 이사왔으나 갑자기 부모가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이에 장례비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홍등가에 나온 것이라며 눈물을 떨구었다. 
     
     

    연행로와 통주의 위치

     
    애처로운 마음이 들은 홍순언이 장례비용을 물었더니 삼백 금이라고 했다. 그 금액이 적지 않았지만 본래 의협심이 강한 홍순언이었던 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 금액을 내주었다. 여인은 감격해 이름을 물었지만 홍순언은 자신의 이름자조차 가르쳐주지 않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자 여인도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버텨 결국 성(姓)만을 가르쳐주고 자리를 떴다. 
     
     

    이미지 사진 / 영화 '홍등' 속 공리

     
    몇 년이 흘러 그 여인은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石星)의 계처(繼妻, 아내가 죽은 뒤 새로 맞이한 정식 아내)가 되었다. 여인은 자신의 남편 석성에게 과거 홍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혹시 조선 사신 중에서 홍씨 성을 가진 역관이 있다면 보은(報恩)해 주십사 부탁했다. 하지만 몇 해를 가도 홍씨 성을 가진 역관은 출현하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홍순언이 과거 여인에게 내준 돈은 그의 개인 돈이 아니라 공금이었고, 결국 귀국해 공금횡령죄로 하옥됐기 때문이었다.
     
    형을 마치고도 홍순언은 역관으로 복직하지 못했다. 홍루에서 공금을 탕진했다는 나쁜 죄질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서 말한 '종계변무'가 그를 역관으로 복직시켰다. 배경에는 1854년 갑신년 임금 선조가 연행사(燕行使) 역관들에게 반드시 문제를 해결할 것과, 그대로 돌아올 경우 엄벌에 처할 것을 선포한 일이 있었다. 이에 난망해진 역관들이 꾀를 내었으니, 자신들의 돈을 염출해 홍순언이 횡령한 돈을 메워주고 그를 복직시켜 정사(正使) 황정욱을 보필해 명나라로 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네가 우리 대신 죽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가 홍씨임을 확인한 예부의 관리들이 몇 차례 바쁜 걸음을 보이며 이것저것을 묻더니 곧 조양문(朝陽門)으로 그를 안내했다. 순간 홍순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첫째는 조양문으로부터 빈관(賓館)까지 깔린 비단 때문이었고, 둘째는 빈관 앞에 서 있는 어떤 부부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모르겠으나 그 옆에 서 있는 여인은 몇 해 전 자신이 통주에서 은혜를 베풀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홍순언이 비단을 밟고 빈관 앞에 이르자 석성이 맞으며 옛 일을 기억하느냐 물었다. 홍순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석성은 그 여인이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고는 감사의 절을 받으라고 했다. 이에 여인이 무릎을 꿇었고 홍순언은 황급히 사양했으나 거듭된 청에 결국 절을 받았다. 그리고 곧이어 펼쳐진 연회에서 본론이 다루어졌다. 석성은 홍순언에게 정례적인 연행사가 아닌데 북경은 어인 일로 왔는가를 물었고, 홍순언은 기회다 싶어 '종계변무'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며 목적을 솔직히 밝혔다.
     
    이후 석성의 노력으로 <태조 고황제 실록>의 이성계 족보가 사실에 입각해 고쳐졌는데 그것이 불과 보름만이었다. 조선 왕실에서 200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일을 홍순언이 15일 만에 해낸 셈이었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그렇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홍순언이 귀국에 앞서 석성의 집을 찾았을 때 석성의 부인이 비단 열 필이 들어 있는 자개 상자를 선물로 내밀었다. 홍순언은 한사코 거절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지만 석성의 시종이 압록강까지 쫓아와 상자를 놓고 갔다. 
     
    의주부 객관에 이르러 비단을 살펴보던 홍순언은 또 한 번 놀라마지않았다. 그 열 필 비단의 끝에는 모두 "보은단(報恩緞, 은혜를 갚는 비단)"이란 글자가 정성껏 수놓아져 있었던 것이니, 현재 롯데호텔 앞 고운담골 표석에 쓰여 있는 보은단(報恩緞)이란 글씨를 수놓은 비단을 받았다 하여 보은단골이 고운담골로 변음되었다는 내용은 바로 이 일화를 말함이다. 
     
     

    의주부 지도 / 남양주 실학박물관의 전시물로 '압록강과 통군정이 그려진 의주부 지도로서, 조선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과 보내는 사람들이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곳'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이야기는 당대에 꽤 유명했던 듯,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靑邱野談>,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김지남의 <통문관지/通文館志>,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 등에 두루 수록되어 전하며 버전이 39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책에는 이 중국 여인이 강남 절강성 출신이라 하여 강남녀로 기록된 곳도 있고, 원씨(袁氏) 여인이라고 성이 기록된 곳도 있는데, 위 이야기는 <연려실기술>을 참고했음을 알려둔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역사서 <연려실기술>

     

    아울러 <선조실록>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있으니, 1584년 변무주청사 황정익과 서정관 한응인 등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자 너무도 기뻤던 선조는 이 사실을 종묘에 고하고 죄수들을 사면했다. 아울러 사신단에게는 광국공신(光國功臣)을 봉했는데 역관 홍순언은 2등 당릉부원군에 봉하고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큰집을 하사에 살게 했다. 면천은 당연한 것이었으니 그의 아들 홍운은 1602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손자 홍효손은 숙천부사를 지냈다.

     

    이와 같은 홍순언의 조건 없는 베풂은 결과적으로는 자신과 그의 가문을 모두 살린 셈인데, 더 나아가 나라까지 구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 석성은 마침 병무상서(현 국방부장관) 자리에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원병 파병을 적극지원하였으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누적 파병 인원 약 16만~21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파병이 이루어지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대군이 파견된 명나라 2차 파병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선조의 통역을 맡은 사람도 바로 홍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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