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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룟 유다를 위한 변론(II) - 그의 몸 속에 들어간 사탄은?
    성서와 UFO 2019. 5. 19. 00:38


    가룟 유다가 유대인인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유대의 어느 지방 사람인지는 불분명하다. 당대의 유대는 협의(狹義)로는 사마리아 남쪽의 옛 남유다왕국의 땅을 의미하나 일반적으로는 남유다 · 사마리아 · 갈릴리 · 페레아 · 데카폴리스를 모두 포함시킨 지역을 가르켰다.(아래 <그림1>) 하지만 그 모두를 포함시켜도 지금 우리나라의 전라남북도를 합친 정도였을 터, 그 작은 땅에서 어느 지역 사람인가가 뭐 그리 중요하겠냐 여겨지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높은 인구 밀도와 오랜 역사, 그리고 다양한 인종이 거쳐간 그 땅은 지금의 이스라엘 땅 이상의 복잡성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 유대인은 자만적인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했고 거기에 지역적 분파 의식도 강했는데, 그들의 분파 의식은 그야말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것으로 그 뿌리는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열두 아들로부터 시작되었다.(이른바 12지파) 이후 여호수와의 가나안 땅 침략 후 각 지파가 가나안 땅을 나눠가짐으로 본격적인 지역 분파가 형성되었던 바, 그와 같은 분파 의식은 마태복음 예수의 사역 초기 기록에도 잘 드러난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태복음 4:12-16)


    앞서도 말했지만 예수가 갈릴리 땅 가버나움(가파르나움)으로 간 것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호수 주변에 디베랴(티베리아스)라는 당대 황제의 이름을 딴 신도시를 건설하여 본래 갈릴리·페레아 분봉국의 수도였던 치포리(세포리스)로부터의 천도를 단행한 때문이었다.(AD 20년 경) 이에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호수변으로 몰려들게 되었는데, 수도 디베랴에 들어갈 처지가 못되었던 사람들은 그 다음의 큰 도시인 가버나움으로 가 정착하였다.


    위 마태복음의 내용에서는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온 것에 무슨 거창한 뜻이라도 있는 듯 말하고 있지만, 그가 그곳에 온 것은 단지 수도의 이전에 따른 인구 이동에 연동된 것 뿐이었다. 당시 예수는 치포리 아래(약 6km) 나사렛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갈릴리 호수변의 신도시로 이주하는 마당이라 그 역시 사람들을 따라 그곳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의 가버나움 정착은 수도의 이전으로 인한, 즉 치포리 마을 쇠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물론 예수 필요에 따른 선택도 있었다.(☞ 예수가 말한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진 사탄' -그 거대 집단의 반격)

     


    〈그림 1〉 1세기 유대 지도와 예수의 이주 경로()



    또 마태복음에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 어쩌고 하는 것은 12지파 중의 하나인 과거 스불론과 납달리의 영역이라는 구약의 잔재가 남음일 뿐, 지금 그들의 후손이 다스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 땅은 지금은 엄연히 로마제국에 속해 있었고 그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로마제국의 분봉왕이 된 헤롯 안티파스(헤롯대왕의 둘째 아들)였다. 그리고 북조(北朝) 사람들, 즉 이스라엘 왕국에 속했던 10개 지파는 앗시리아 제국의 이주정책과 인종말살정책(혼혈정책)으로 진작에 사라져버렸던 바, 지금와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 어쩌고 하는 것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만큼이나 의미없는 일이었다.(☞ '교회가 곧 성전이라는 착각')


    ~ 다만 남조(南朝)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하지 않았고, 그후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복속되어서도 요행히 순혈을 이을 수 있었다. 그들이  바로 유다 지파의 후손이었는데, 거기에 베냐민 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일부 섞여 이른바 유대인(유다 사람)이란 불리게 된 것이었다. 그들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천시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 역시 본래 같은 민족이었지만 시대의 불행으로 인해 앗시리아인을 비롯한 여러 이민족의 피가 섞이게 되었던 바, 예수 시대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이방인보다 못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경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 이야기 III' )



    〈그림 2〉 이스라엘 12지파의 분포와 영역(BC 1200년 경)



    〈그림 3〉 예수 시대의 갈릴리 · 사마리아 · 유대의 경계



    예수는 그곳에서 곧 사역을 시작했던 바, 위 마태복음의 내용은 다시 아래 문장으로 연결된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태복음 4:17-22)

    이처럼 예수가 끌어모은 사람은 거의가 어부로서, 그들은 예수의 부름에 순순히 따른다.(그들이 예수의 부름에 응한 것도 순진한 어부였기에 통할 수 있었던 것이지 디베랴의 도시 깍쟁이들이었다면 필시 한참을 공을 들여야 했을 터, 예수가 티베랴에 가지 않고 가버나움으로 갔던 것은 나름대로의 신의 한 수였음)

    다른 직업군(群)인 사람은 마태가 유일했다. 마태는 하급 세금 징수원으로 있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케이스였다.(번외의 얘기지만 여기서 예수가 마태를 꼬시는 아래 문장과 그에 연접된 문장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마태가 아니라는 훌륭한 방증이 된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떄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태복음 9:9-10)


    ~ 마태복음은 철저히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등장인물들은 오직 '그들'로서 관찰될 뿐 '우리'로 표현되지 않는다. 만일 마태가 썼다면 설령 1인칭 '나'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마태라 하는 사람'(a man named Matthew)'이라는 식의 표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바트 어만 '예수 왜곡의 역사' 참조)


    마태복음에서는 이처럼 예수 제자의 진영이 갖춰지기 시작하는데, 다만 거기서 유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등장하는 것은 중풍 환자, 시각장애자, 언어 장애자 등의 중증 병자들을 모두 고치는 놀라운 기적들을 펼쳐 이름을 얻고 난 후였다.(앞서 '예수의 기적에 대한 나의 결론'에서 충분히 설명했거니와 이 치유의 기적들은 모두 사실이 아닐진대, 다만 이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문장이 종횡무진의 기적을 보이는 문장 속에 숨어 있다. 마태복음 9장 34절의 바리새인들의 '카더라 통신'이 바로 그것인데, 이상에 대해서는 이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리라)


    예수 제자들의 진용, 이른바 12제자의 진용은 예수의 종횡무진한 기적 쇼가 잠시 멈추고 설레발 타임으로 들어가기 직전 등장한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태복음 10:1-3)


    위 문장을 지금까지 예수가 제자들을 포섭한 순서에 대비하자면 가룟 유다는 가나안 사람 시몬과 함께 제자 대열에 가장 늦게 합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또 유이(有二)한 타 지역 사람이었으니 시몬은 가나안 출신이었고 유다는 가룟 출신이었다. 여기서 시몬의 출신지인 가나안은 그 협의(狹義)의 뜻을 알 수 없으나 그는 '침묵의 제자'라는 별명답게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내내 조용했던 바, 그의 출신지를 문제 삼을 것은 없어 보인다.(혹자는 그것이 히랍어 카나이오스kanaios서 온 것으로서 시몬이 열심당에 속한 혁명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시종 조용했던 그의 행실에 비춰보면 그다지 설득력이 실리지는 않는다) 


    그와 반면 가룟 유다는 대형 사고를 터뜨렸던 바, 그의 출신지로 여겨지는 가룟이란 단어는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앞서 '유다는 왜 예수를 밀고했나?'에 소개한 내용 외에도 별별 잡스러운 주장까지 나왔지만 역시 들을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다만 가룟 유다의 히브리어 표기인 이스가리옷(Iscariot)이 유다 남부지방인 '케리옷' 출신의 남자(사내)를 뜻한다는 보편적 해석을 따른다면 그가 예루살렘 출신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이것은 예루살렘 대제사장과의 친분의 개연성이 느껴지는 복음서의 내용에서 기인된 전통적 해석법이기도 하다)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케리옷'이란 지방이 어디인지는 여지껏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이 적어도 갈릴리 지방은 아닐지니 그의 출신은 남유다일 수밖에 없다.(<그림 3>을 보면 갈릴리 지방의 남쪽 경계는 사마리아인데, 유다는 사마리아인은 아니니 그 건너 지역인 남유다 지방에서 왔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가정한다면 그는 <그림 1>의 실선을 따라 가버나움까지 온 셈이다) 언뜻 남유다에서 가버나움까지의 여정이 멀게 느껴질는지 모르나 서두에서 말했듯 유대의 전체 면적이라 해봐야 우리나라의 전라남북도를 합친 정도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나의 추론을 펼치자면, 우선 그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 애논에서 예수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거나 혹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멀리 유다 남쪽 지방에서부터 가버나움까지 찾아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스스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청한다. 예수가 그런 그를 특별히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터, 그 문하에 들어가게 되지만 앞서 말한 지역색으로 인해 왕따와 같은 텃세를 경험해야만 했다. 하지만 워낙에 영민했던 유다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예수의 신임을 얻어냈던 바, 급기야 세무 공무원 출신의 마태를 밀어내고 그룹의 자금관리인이 된다. 




    예수가 세례식을 행했던 애논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는 자신도 제자들을 이끌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다. 그래서 예수와 요한은 이곳에서 동시에 세례를 베푸는 어색함을 연출하게 되고 그로 인한 갈등도 생겨난다.(요한복음 3:22-30) 그러면서도 서로 이곳을 고집한 이유는 단 하나, 물이 많아서였는데 그것은 오늘날도 그러하다.



    그러면서 유다는 자연히 예수와 접선하는 UFO를 목격하게 되고 그가 외계 행성 바벨로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앞서 '고대의 엑스 파일, 유다복음서'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유다의 이와 같은 영민함은 예수도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유다의 영민함은 오히려, 사람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온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거룩한 대속(代贖)'을 이루려는 예수 의지에의 수단으로 이용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는 유다에게 자신을 밀고하게끔 만드는데, 그 댓가로서 제시한 것이 네가 모르는 그 세계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유다는 결국 그 새로운 세계(저들의 외계 행성 '바벨로')에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의 밀고를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는데, 그러자 예수는 계속 이를 종용해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한복음 13:20-30)


    다른 제자들은 예수와 유다 사이의 묵계를 알 리 없었던 바, 이와 같은 종용이 무엇 때문인지 알지 못했고, 이어진 예수의 아래의 말도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이 같은 내용들은 오직 '유다복음서'를 빌어야만 해석될 수 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요한복음 13:31-33)


    이상을 'JUDAS'의 저자 피터 스탠퍼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데, 발췌하지 않은 전문을 그대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해 '유다, 증명된 이야기' 섹션에 속한 관련 패러그래프를 그대로 옮겨본다. 앞서 말했듯 그 책에는 외계인 운운의 내용이 없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도 궁금해 하며 이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독자들에게 그 답을 묻는다. 그럼에도 이 내용을 읽으면 '유다복음서'의 비밀, 그리고 4대 복음서의 서로 앞 뒤 안 맞는 이야기들에 대한 궁금증의 답변을 절로 얻게 되는 조금은 신비롭고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유다복음서'를 빌리지 않고서도 진실에 접근하고 있는 피터 스탠퍼드의 혜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질문을 받은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이 빵 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예수는 빵조각을 적셔서 유다에게 건넨다. 이쯤되면 모든 게 분명해졌다. 마침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더 빨리, 더 분명하게 배신자를 지목했다. 요한(복음 저자)은 바로 그 순간의 유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그가 빵 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러면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식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에 빵을 신호로 삼아 사탄이 유다의 몸에 들어갔다고 기록한다. 요한에 의하면, 바로 이 순간이 유다가 배신자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이미 그 전에 두 차례나 유다가 배신할 것이 암시되었음을 고려하면, 예수는 유다의 몸에 사탄이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어서 요한은 또 다른 대사를 덧붙임으로써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때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이후로 유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아주 중요한 대사다. 이 대사는 예수와 유다가 사전에 서로 공모했음을 암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탄 앞에서 예수가 체념하며 내뱉은 말일까? 확실한 것은, 이 순간에도 예수와 유다와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유다의 몸에 사탄이 들어갔기에 예수가 유다에게 던지는 말은 마치 유다의 몸에 있는 사탄을 겨냥한 것처럼 훨씬 직설적이다. 예수의 직접적인 지목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다른 제자들이 여전히 배신자의 정체에 대해 모른다고 기록하면서, 그 이유로 앞에서 언급했던 유다의 성격을 재차 언급한다.


    "그러나 거기 앉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도,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자루를 맡고 있으므로,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자루를 맡고 있으므로, 예수께서 명절에 그 일행이 쓸 물건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유다는 그 빵 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상당히 모호한 대목이다. 게다가 요한은 이 대목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하고 있다. 즉, 유다가 천성적으로 악인(돈에 눈이 먼 구두쇠 자금관리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유다가 악마에 사로잡힌 꼭두각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이처럼 사대 복음서는 결코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물론 이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은 기독교 기본 교리에서는 하나로 융합된다. 사탄은 특별히 악인에게 잘 들어가는데, 악한 자일수록 사탄에게 쉽게 넘어가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유다는 배신이 본인의 책임이기에 오랜 세월을 거치도록 저주를 받아 마땅한가? 아니면 유다는 신이 예비한 계획과 사탄의 계약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과 악의 대결에서 희생된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인가?

     

     * 3편으로 이어짐



    빌라도의 법정으로 끌려가는 예수를 숨어 지켜보는 유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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