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빌라도의 흔적에서 찾아본 레알
    성서와 UFO 2019. 4. 27. 23:38

     

    누군가의 말처럼 예수가 아니었다면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우리 현대인들은 전혀 모를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국의 황제도 아니요 그저 유대라는 작은 지역에서 한시적 지방관을 지낸 사람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예수 덕에 그는 역사에 남는 유명인이 됐고 기독교인들에게는 거의 입에 붙다시피 한 사람이 됐다.(그것이 앞서의 말처럼 사도신경 속의 악행의 인물로서 남아 유감이긴 하지만, 그러한 만큼 그의 명예 회복이 필요하리라 본다. 성서의 내용을 존중하자면 적어도 그렇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의견도 만만치 않으니, 실존 인물이었던 그가 있음으로 해서 예수의 존재 증명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이미 누차에 걸쳐 이야기했듯 역사적 예수에 대한 흔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그 치적은 미미하나 본디오 빌라도는 역사적 인물임에는 분명한 바, 그의 치세에 고난을 받은 예수 역시 역사적 인물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앞서 말한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의 한 줄 글에 매달려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반면,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기록은 요세푸스, 필로, 타키투스 등의 역사서에 난삽하리만큼 즐비하다.  

     

    여기서 난삽하다는 것은 복잡하다는 뜻도 되겠지만 복음서와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는 뜻이기도 하니, 우선 유대인 저술가 필로(Philo)의 글을 살펴보기로 하자. 서두를 달자면 필로는 그에 관해 가장 나쁜 기록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빌라도는 완고하고 무식한 자로서, 부패하며 폭력, 억압 및 불법적 처형을 자행하는 매우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이 글은 아그립파 1세가 칼리귤라 황제에 보낸 서한 중의 한 귀절을 필로가 자신의 저서 'legatio ad gaium'에 옮겨 적은 것이다. 따라서 필로가 직접 경험한 빌라도의 레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며, 여기서 상대를 비난하고 있는 아그립파 1세 역시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체포하고 야고보를 처형시키는 등의 업적(?)을 남긴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는 바, 정적 관계에 있던 빌라도에게 절대 좋은 소리를 했을 것 같지는 않다.

     

    * 이때 베드로는 감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지만 세베디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수의 제자 중 첫 순교자가 된다.(두 사건이 같은 때에 일어난 것은 아님)

     

     

    아그립파 1세(Marcus Julius Agrippa/BC 10-AD 44)의 흉상.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이자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칼리귤라 황제 시절 로마제국의 분봉왕으로 팔레스티나 전역을 다스렸다.(41~44년)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얻어맞았고 벌레에 먹혀 죽었다.(사도행전 12:23) 
    칼리귤라(AD 12-41)의 흉상.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양자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의 아들로 AD 37년 로마제국 제3대 황제에 올랐으나 통치 기간의 공포정치로 악명 높았다. 41년 부하 정치가에 의해 암살당했다.(사진은 히스토리 채널에 소개된 영화 '칼리귤라'의 포스터임) 

     

    하지만 요세푸스의 기록 '유대인 전쟁사'에서의 빌라도 역시 매우 포악하고 잔인한 자로 묘사돼 있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빌라도는 코르반(Corban, 성전 안에 보관된 유대인의 공금)을 유용해 수도관 건설에 사용했는데..... 이에 반대한 유대인들은 급습한 로마 군인에 의해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이를 본 유대인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에 게거품을 물 지경이었지만, 빌라도는 그 광경을 (마치 감상하듯) 앉아서 지켜보았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자면 유대 총독 재임 기간(AD 26~36) 중의 빌라도는 적어도 선정(善政)을 베풀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어쩌면 누가복음 13장 1절에 기록된 문구는 그의 레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야말로 진솔한 문장일는지 모른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이야기는 빌라도가 예수 재판과 상관없이 거론된 신약성서의 유일한 내용으로서, 꽤 신빙성이 있다. 당시 로마 총독의 처소가 있던 곳은 카이사레아(성서의 가이샤랴)였고 그곳은 갈릴리 지방에 있었다. 어쩌면 위에서 코르반이 유용된 수도 공사와 그때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의 그것일 수도 있다. 빌라도는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서나 혹은 실제적인 필요에 의해 헤롯이 만든 카이사레아의 수도교를 보수하거나 연장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바, 요세푸스가 말한 수도관(aqueducts)은 실제 카이사레아 수도교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그 수도교 공사를 완공한 후 헌정식을 카이사레아의 아우구스투스 사원에서 드렸을 터, 그 헌정식 제물에 희생된 유대인의 피가 섞이었음은 당연한 노릇이다.(여기서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었다'는 누가복음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성서학자는 드물다. 아무리 미치광이 정치가라 해도 사람을 죽여 그 피를 제물에 섞는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이사레아의 로마 유적.  가운데 보이는 돌기둥이 아우구스투스의 사원으로 짐작된다. 
    카이사레아의 히포드롬(전차 경기장) 유적 
    영화 '벤허'의 전차 경기 장면 (1959년 판)  

     

    탈진한 예수에게 물을 주는 벤허 (이로 인해 가족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결론은 사실 좀 진부했다) 


    카이사레아는 팔레스타인 땅, 지금의 이스라엘 공화국의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는 도시로 헤롯 대왕이 BC 22년부터 12년 간에 걸쳐 건설한 대규모 국제 항구였다. 헤롯은 이 도시를 당시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게 헌정했으며 아울러 도시의 이름도 카이사레아(카이사르의 것)로 명명했는데, AD 6년 이후 유대 재정 감독관 등의 로마 관리가 살았고 AD 21년 이후로는 로마 총독의 거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로마 2군단과 10군단의 본부도 이곳에 있었다.

     

    아래 카이사레아 수도교는 헤롯 건설 당시의 것으로 20km 떨어진 갈멜 산 남쪽 수원지의 물을 카이사레아의 시민들에게 공급했다. 미세한 경사로써 물의 흐름을 연결시켰던 수도교 건설기법은 로마가 자랑하던 하이테크 기술이었는데, 이후 빌라도 등에 의한 연장 및 보수 공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로마 수도교의 물은 도심의 공공시설은 물론 일반 가정에까지도 공급되었으므로 연장과 보수는 거의 상시적인 일이었다)
     

     

     

     

    카이사레아의 로마 수도교 


    그런데 1961년 6월 이곳에서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카이사레아 로마 유적 극장 발굴 현장에서 한 장의 두꺼운 석판(石板)이 출현했던 것인데, 거기에는 다름아닌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돌 한 장에 세계는 흥분했다. 고대의 금석문 중 빌라도의 이름이 발견된 첫 사례였기 때문으로, 이는 당연히 예수의 실존 증명에의 더없는 사료로서의 가치 매김이 되었다.

     

    그 돌에는 당대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게 헌정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던 바, 건물의 머릿돌 용도로 사용돼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후 '본디오 빌라도의 비명'(Pontius Pilate's Inscription)으로 명명되었고 현재 이스라엘 예루살렘 박물관에서 브리티시 박물관의 로제타 스톤만큼이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예수의 발자취를 좇으려는 세계 각국, 특히 한국인의 성지순례가 그치지 않는지라.....)

     

     

    예루살렘 박물관의 '본디오 빌라도 비명' 
    극장 건물이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헌정되었음을 말해준다. 비문은 손상이 심한 편이지만 내용의 파악에는 어려움이 없다.
    발견 장소 인근에 복제비가 세워졌다. 멀리 보이는 기둥은 헤롯 궁전의 주랑이다. 
    카이사레아의 로마시대 극장 

     

    최근 복원된  카이사레아의  극장. 2천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본디오 빌라도의 유물은 헤롯의 무덤이 있는 헤로디움에서도 발견되어졌다.(헤로디움에 관해서는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II' 참조) 일대의 왕궁 유적을 발굴하는 도중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가 출토됐던 것이다. 그 반지는 '본디오 빌라도 비명'에 비해 신뢰도가 떨어지는 유물이었지만, 빌라도라는 이름 자체가 흔치 않은 이름인 만큼 이 유물 또한 그의 것일 가능성이 점쳐진다.(본디 오는 집성촌이었던 시칠리 남부 마을의 이름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본디오 빌라도는 본디오 마을 출신의 빌라도라는 뜻이다)

     

     

    빌라도의 반지
    반지가 발견된 헤롯 궁전의 발굴 사진

     

    기타, 빌라도에 관한 이야기들은 구전 상의 것도 꽤 많은 편이다.(이를테면 그가 로마 황제의 휘장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해 유대인의 반발을 샀다는 등의..... 나아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전한다) 하지만 굳이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빌라도가 실존했던 존재임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문제는 성서 복음서의 내용과 빌라도의 행적을 일치시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니, 그와 같은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유독 예수에 대해서만은 관대했다는 사실을 레알로 인정하기에는 낯 뜨거운 부분이 없지 않다.

     

    ~ 게다가 예수가 기소된 죄는 민중들을 혹세무민하고 납세 거부를 선동하였으며 자신이 왕으로 행동했다는 정치범적인 소지가 다분한 죄였던 바,(누가복음 23:1) 이런 자의 방면을 애쓴 빌라도의 행동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카이사레아에 있어야 할 빌라도가 마치 예루살렘에 주재하는 사람처럼 등장하는 것도 사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지만 성서학자들의 설명처럼 그때가 유월절이니 만큼, 그래서 민란 등의 소요가 예상되는 만큼 예루살렘에의 왕림은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민감한 시기이기에 정치적 성향으로 기소된 사람에의 동정과 편애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게다가 예수는 자신이 왕을 칭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시인을 한 상태이기에...../마태복음 27:11, 마가복음 15:2, 누가복음 23:3, 요한복음 18:37)

     

    민란의 지도자로 설명된 바라바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를 살펴보자면 요세푸스의 기록을 비롯한 당대의 어떤 기록에서도 유월절에 죄인 한 명을 풀어주는 관습을 발견할 수 없을뿐더러 당시의 총독인 빌라도가 향후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민란의 주동자를 풀어주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힘들다. 따라서 이 모두는 예수의 가치를 과장하기 위한 장치이거나(말하자면 바라바는 좀도둑에 불과한 인물이거나) 아예 픽션일 가능성이 있다.

     

    ~ 원어 성서에 'Jejus bar abba'라고 기록된 바라바의 이름('아바의 아들 예수', 그것이 바라바의 본래 이름이다. 그래서 '새번역'에는 원문을 살려 '예수 바라바'로 표기됐다)은 그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바, 바라바라는 강도를 예수와 비등한 비중의 인물로 설정하기 위한 마태복음 저자의 의중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여러 번 말했지만 당시 예수는 매우 흔한 이름이어서 지금의 우리 생각과는 달리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함에 있어서의 부담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 성서학자들의 말을 따르자면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유월절의 치안을 걱정해서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빌라도가 대규모 군중 봉기가 예상되는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에, 그 도화선이 될 수 있는 민란의 주동자를 풀어주는 일이 과연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J. 도미닉 크로산(미국의 성서비평학자)과 같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버리고 '예수 바라바'를 받아들인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유대인 비극에의 비유 같은 것"이라고 에둘러 말하거나,('Historical Jesus') 바트 어만(미국의 성서비평학자)의 주된 비평처럼 성서 저자들의 노골적 변개나 의도적 삽입을 의심하는 길밖에 없는 듯하지만,('Misquoting Jesus') 그 어느 쪽을 택해도 개운치는 않다.

     

    이쯤 되면, '그렇다면 왜 빌라도는 예수를 방면하기 위해 노력했을까'에 대한 대답을 해야겠는데, 나는 이미 전편에서 그에 대한 답을 비쳤다. 빌라도는 예수를 단순히 과대망상증의 소유자쯤으로 여겼던 바, 이런 자를 극형에 이르게 만드는 것보다는 때려 방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겼던 것이었다. 자신의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어디를 보아서도 이 예수라는 자는 스스로 왕이 될 힘이 없는 자였고, 또한 민란을 선동하거나 일으키거나 할 위인은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빌라도의 눈으로는 예수보다는 오히려 산헤드린의 성직자들이 민심을 선동하고 있는 듯 보였을 터, 그들이 사형을 원하고 있는 이 자를 풀어주어 굴욕을 주고자 했던 심리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는 단지 그뿐이었지만, 워낙에 유대인들의 사형 요구가 거셌던지라 나중에 결국 포기를 하게 되는 상황에의 이해는 누구나의 생각과 똑같다.(결과만큼은 성서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찌 됐든 빌라도는 예수의 사형언도를 내린 사람이었고, 더불어 후세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던지라(성서적으로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의 죄가 대속될 수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여러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이를테면 이후 그가 아내와 더불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거나,(실제로 꼽트교와 같은 일부 기독교 교파에서는 그들 부부를 성자와 순교자로서 숭배하고 있다) 중압감과 자책감에 자살을 택했다거나,(가장 대중적인 이야기다) 이 일로 좌천되어 결국은 폐인으로서 생을 마감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전하지만, 이 가운데 역사적 사실로서 밝혀진 것은 없다.

     

    가장 가까운 것은 마지막의 좌천설이다. 그는 실제로 AD 46년 로마로 불려갔고 이후 그의 이름은 다른 어떤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처분과는 하등 무관한 일로, 그즈음에 일어난 사마리아인들의 폭동에 적극 대응하지 못한 일에 대한 문책이었다. 당시 사마리아에서는 타헤브라는 사마리아식 메시아를 자처하는 어떤 인물로 인한 대규모 민족 봉기가 있었고 이에 대한 미온적 대응이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에 의해 로마의 관료들에게 보고되었던 바, 이에 대한 문책성 경질이 발생했던 것뿐이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 고난의 장소를 소개하고자 한다.

     

    카이사레아와 예루살렘의 위치.  두 장소는 사실 유대의 극과 극이다.(아래 쪽 화살표 예루살렘 바로 밑이 헤로디움이다) 
    빌라도가 머물렀던 정소로 추정되는 안토니우스 요새. 학자들은 빌라도가 헤롯의 궁전이었던 프라에토리움이나 성전 옆 안토니우스의 요새에서 예수의 재판을 주재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는데, 나는 안토니우스 요새 쪽을 염두에 두고 있다.(사진은 예수 당대의 예루살렘 미니어처임) 
    대제사장 가아뱌의 집터에 지어졌다는 '닭 울음 교회'. 예수의 재판이 있던 곳을 찾는 일은 사실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명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은 그 장소의 추정에 매력있는 단서가 된다.(요한복음 18:27) 예수는 안네스의 집으로부터 이첩된 가야바의 집에서 약 6시간 정도 구금돼 있다가 건너편에 있는 안토니우스 요새로 끌려간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는 길.  가아뱌의 집 입구의 이 화살표 지점에서 베드로가 울었을는지 모른다. 베드로는 집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으므로.(마태복음 25:75) 표지판이 나름 위트 있다.^^
    새벽에 가야바의 집을 나온 예수는 언덕길을 걸어 안토니우스 요새에 이른다. 하지만 그곳은 지금 흔적조차 없다. 637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슬람인이 성전산 인근의 건물을 모두 허물고 바위 돔 사원을 짓기 위한 부지를 마련한 것인데, 691년 바위 돔 사원이 완성된 이후로는 일대에 축대가 건립되며 주변이 모두 사원 마당이 되었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세력이 약화된 20세기 초 인근에 '선고 교회 (Church of the Condemnation)'를 세워 예수 고난의 제1처로 삼았다. 
    고대 예루살렘 지도.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본디오 빌라도의 조각상

    그라고 추정되는 로마시대의 조각상은 3가지쯤 되는데, 나는 이 조각상을 선택했다.(왠지 그럴 것 같아서.....)

     

     

    안토니우스 요새의 위치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보기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