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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와 산상설교의 안티노미
    성서와 UFO 2019. 4. 23. 08:52

    * 이 표현이 더 적당한 듯해 2편에서는 제목을 바꿔보았다. 사실 헬라어 원문에는 '수훈'(垂訓)이란 말도 '설교'라는 말도 없다. 단지 'beatitude'(영어로는 blessed)로 표현될 뿐이니, 직역하자면 '산상의 축복'이다.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실린 예수의 이 산상에서의 가르침은 지고지순 그 자체이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자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복음 5:38-45)



    산상설교(Sermon on the Mount) 산, 혹은 The Beatitudes 라고 불리는 갈릴리 호수 인근의 야산(왼쪽 언덕)


    산상설교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


    구글 맵으로 본 산상설교 장소



    여기서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는 새로운 말들을 늘어놓는다. 이른바 신약(新約, the New Testament)이다. 앞서 '엘리야와 모세를 태우고 나타난 서기 30년의 UFO'에서도 말했듯, 이 산상수훈으로 인해 과거의 구약(the Old Testament), 즉 여호와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옛날 약속은 예수를 통해 맺어진 새로운 약속, 즉 신약으로 변모된다. 이같은 중대한 의미 부여와 함께 그 가르침 자체의 지고지순함으로 인해 기독론자들 사이에서 예수의 산상설교는 특별히 '성서 속의 성서'라고 불리기도 하며, 톨스토이는 '종교의 요체'라 극찬해 마지않았다.





    영상으로 재현된 예수의 산상설교



    혹자는 이와 같은 예수의 설교가 본인의 창작이 아닌 후대인(복음서 저자)의 창작이라고도 말한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구약성서 시편이나 잠언, 혹은 유대 구전 법률인 탈무드 등의 내용에 대한 차용이라는 것이다. 특히 산상설교 서두의 이른바 팔목(八福)이라는 것은 그 책들의 완전한 표절이라 주장되고 있는 바, 아닌게 아니라 의지만 있다면 신구(新舊) 두 책들 사이에서 표현의 유사성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문장들이다.(찾자면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편 37:11)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시편 24:3-4)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마태복음 5:8-9)


    하지만 내게는 이같은 차용이나 표절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예수가 했든 후대인이 했든/저작권도 없던 시절이니 사실 내용만 좋다면 얼마든지 빌려 쓸 수도 있는 일이고, 또 그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산상수훈의 대부분이 실현 불가능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말이 아무리 좋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터인데, 산상설교라는 고결한 가르침은 실제로는 그 행동을 원천적으로 제약하고 있다. 이를 테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는 문장은 하등 쓰일 데 없는 무의미한 문장이다. 여기서 예수는 원천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불합리한 주문이다. 이는 논리학적으로는 형용모순(adjective contradition)*에 해당되는 것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뜨거운 얼음, 비 내리는 달밤, 둥근 사각형, 유리 철제품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즉 예수는 이와 같은 형식모순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 꾸며 주는 말의 내용이 꾸며지는 말의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일.


    동양에서는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라는 표현이 존재한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즉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되는 철천지원수(하늘에 사무치도록 한이 맺힌 원수)를 말함이다. 이를 테면 부모를 죽인 원수 등을 말함인데, 이런 자를 사랑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위와 같은 말을 하는 기독론자에게 묻고 싶다. 그러한 당신들은 왜 당신들의 원수인 사탄을 사랑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내가 이렇게 물으면 필시 그들은 펄쩍 뛸 것이다.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말이 어디 있냐며. 이 또한 형용모순인데, 바로 그와 같은 형용모순을 예수는 갈릴리 인근의 산 위에서 제자들과 대중들에게 설파했던 것이다. 그외에도 예수는 유사한 논리적 오류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늘어놓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그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는 말과 행동이 달랐으니, 아래의 성서 내용은 예수의 산상설교가 얼마나 형용모순에 치우친 황당한 가르침이었는가를 방증한다.(한글 성서에서는 예수가 뺨을 맞았다는 사실을 애써 감췄던 바, 부득이 NIV의 내용을 빌려왔다)


    When Jesus said this, one of the officials nearby struck him in the face. "Is this the way you answer the high priest?" he demanded. "If I said something wrong," Jesus replied, "testify as to what is wrong. But if I spoke the truth, why did you strike me?"(예수가 이렇게 말하자 곁에 섰던 관리 하나가 예수의 뺨을 쳐 이르되 네가 감히 대제사장에게 이 따위로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거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요한복음 18:22-23)


    예수는 자신이 뺨을 맞자 그 잘잘못을 따지며 대들었을 뿐 결코 다른 쪽 뺨을 내밀지 않았다. 예수는 그간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가르쳐왔던 것이다.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짓, 이는 졸장부들이 보여주는 대표적 행동으로, 이와 같은 동료들은 조직 내에서도 기피인물 1순위이며, 상사들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차마 대놓고 경멸하지는 못하지만) 그런데 성인이라는 예수는 그와 같은 행동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고 있는 바, 그야말로 안티노미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 예수의 산상설교를 희화한 만화


    * 그림의 출처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379636&m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국내도서
    저자 : 김기백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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