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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산상수훈의 안티노미성서와 UFO 2019. 4. 22. 22:16
대학 시절 전공필수 과목이던 '기독교 논리학'은 내게는 참으로 버거웠던 과목이다. 이에 수업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괜한 두통이 찾아왔고, '오늘 결석해버릴까' 생각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실제로 그렇게 한 날도 있었다) 게다가 담당 교수도 매우 꼬장꼬장해 수업의 이해가 늦은 학생에게 가차없이 쓴소리를 해대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에 관한 기억 중에는 수업을 기도와 함께 시작하지 않은 몇 안 되던 교수진의 한 사람이란 것도 있다.(물론 끝에도 기도나 주기도문 따위를 외지 않던, 아무튼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 교수는 필시 시간 강사쯤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학교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없었고 수업도 남 몰라라 저만치 수준을 올려놓고 시작하는 바람에 모든 학생들이 당황해 했는데, 내가 기독교 논리학 시간이 결정적으로 싫어진 건, 언젠가 수업 시간에 멍 때리고 있던 내게 다음과 같은 느닷없는 질문이 덮친 후로부터였다.(그래서 그 질문 또한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다)
그날, 교수는 칠판 한 가운데 적혀 있는 'If Aristoteles is right, Zenon's paradoxes is valid(만일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면 제논의 역설은 타당하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이 조건적 명제를 두 가지 이상의 가언적 명제로 바꿔보라고 했다. 나는 그때 '머리 속에 하얘졌다'는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동시에 철저히 체득해야만 했다. 가언적 명제의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두 가지 이상의 답을 요구하다니..... 그것도 영작(英作)으로.
다행히도 교수는 답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교수의 의도인즉 내게 답을 얻겠다는 것보다는 수업 시간에 멍 때리지 말라는 지적인 듯싶었다. 하지만 그 댓가는 치러야 했다. 그 교수가 갑자기 진도를 거꾸로 뽑아 학생들 앞에서 공개 망신을 준 것이었다. 교수는 작정을 한 듯, 'If A is B, C is D'라는 쌩기초의 조건명제문을 칠판에 적은 후 떠들었다.
"아직까지 가언적 판단과 선언적 판단을 이해 못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군. 다시 말하지.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이후 이 두 가지 판단론으로써 윤리학의 핵심을 분리해 냈다. 말하자면 윤리학의 기본 뼈대가 무엇인가 하는 두 가지의 판단 근거를 마련했던 셈이지. 여기서 가언적 판단이란 정언적 판단 또는 선언적 판단에 맞서는 말로서, 여기 ‘만일 A가 B이면, C는 D이다’라는 형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느 가정 및 조건 아래에서 뜻을 세우는 판단을 말하는 것이다."
교수의 말은 기본명제문장의 A B C D에 ∨ 표시를 하며 이어졌다.
"여기서 'A가 B이면’의 부분을 판단의 전건(前件; antecedent), 'C는 D', 혹은 ‘A는 C'의 부분을 후건(後件, consequence)이라 한다. 즉 전건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나 후건에 대한 조건 혹은 근거가 되는 것이 되며, 이와 반대로 주장되어지는 것은 후건이 된다. 전건과 후건은 긍정과 부정에서 자유롭지만 그것들에는 상호 보편적 의존관계가 유지돼야 한다. 만일 너희가 이런 기초적 관계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예 지금 책가방을 싸는 게 낫다. 하지만 설마 이런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 돌대가리는 없으리라 본다...."
하지만 사실 나뿐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그런 기초적 관계의 이해조차 버거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는데, 진도는 이후로도 한참을 달려 칸트와 니체와 하이데거, 그리고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흐의 무신론적 변증법에 이르러 멈춰섰다. 신기한 건, 늘 걱정하고 있던 그 과목의 성적표에 예상과 크게 벗어난 높은 학점이 매개져 있었다는 사실인데, 아마도 open book으로 행해졌던 시험의 결과인 듯싶다. 학생들이 적어낼 엉뚱한 답안에 암담했을 교수가 이를 생각해 베푼 본의 아닌 관용의 수혜자랄까....? 그러나 그의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무지 애썼던 것은 사실이다.)
브리시티 박물관에 전시된 논리학 아버지들의 흉상
왼쪽에서 부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크리시포스, 에피쿠로스 순인데, 한 여성이 센스 있게 그 다음에 자리를 잡아 사진을 찍었다.^^ 이중 크리시포스는 다소 생소할 터....
크리시포스의 흉상
크리시포스는 BC 280~206년 활동한 그리스 철학자로 스토아 철학을 체계화한 사람이다. 건물의 '주랑'이란 뜻의 스토아라는 말도 그가 만든 스토아 학원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중세 신의 학문인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크리시포스의 이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그중에서도 특히 크리시포스의 논리학은 기독교 논리학의 바탕이 됐다.
제논의 것이라 전해지는 흉상
제논은 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아킬레우스와 거북이'를 비롯한 유명한 역설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전해지지만, 정작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실존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생전의 기록이 약간이라도 존재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논리학의 비조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 논리학 시간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때 배운 안티노미에 대한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에 대한 '다음백과' 설명은 아래와 같다.(배운대로 설명하자면 어려울 것 같아 보다 '다음백과'를 찾아 내용을 빌려왔는데, 사실 그 해석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일단 읽어는 보자. 모처럼 하는 셈치고.....)
역설(paradox)이라는 용어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비판철학의 아버지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이 무제약자를 파악하려고 함으로써 모순을 낳는다는 주장을 펴 안티노미, 즉 이율배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이를 통해 순수이성이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칸트는 우주가 시간적으로 시초를 가지며 공간적으로 한계를 가진다는 명제(정립)와 그 반대 명제 모두에 관한 논증을 제시했다. 같은 방식으로 칸트는 다음과 같은 3개의 명제에 대해서도 지지논증과 반대논증을 제시했다. ① 모든 복합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② 모든 현상이 충분한 '자연적' 원인을 갖는 것은 아니다.(즉 우주에는 자유가 존재함) ③ 우주 안이나 우주 밖, 둘 중의 하나에 필연적 존재가 있다. 칸트는 앞의 2가지 안티노미를 사용하여 시간과 공간을 어떤 의미에서 정신이 부여한 틀이라고 추론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란 인식자가 사물의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인식자의 둘레를 돈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상(감각에 알려지거나 경험된 대로의 사물)과 본체를 구분함으로써 4가지 안티노미를 해석했다. 칸트는 인간은 현상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본체를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세기 들어 안티노미를 해결하기 위한 더욱 특수한 제안들이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한 해결책들은 그 철학적 의미를 놓고 논란이 계석되고 있기 때문에 칸트의 안티노미 이론은 여전히 유력하다 할 수 있다.
이상 '다음백과' 설명의 전문(全文)을 옮겨봤는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해석 치고는 조금 어려운 편이다. 저술자는 이율배반으로 설명한 안티노미를 패러독스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했는데, 일본인이 만들어낸 이 단어들이 정말로 원 뜻을 대변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 개화기의 일본 학자들이 서양의 '필로소피(philosophy)'를 해석함에 있어 '철학(哲學, 지혜의 학문)'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건 나름 참신했다.('필로소피'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므로) 하지만 이후 그 속의 철학 용어들을 해석하고자 만들어낸 단어들에 있어서는 견강부회도 많았던지라..... 그래서 중역(重譯)에 중역을 거듭한 한국의 철학서들은 요상한 내용들이 많아 읽어도 뭐가 뭔지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내내 일본의 것들을 빌렸는지라 달리 할 말은 없다. 아무튼 슬프다.
~ 내 생각에는 안티노미를 번역함에 있어서도 이율배반이란 말보다 기존의 단어인 '모순'을 활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나 여겨지지만, 다음처럼 물어보면 그 또한 대답이 궁하다. "그렇게 똑똑하면 니네들이 하지 그러셨어요?"
슈퍼맨 임마누엘 칸트?
매거진 '필로소피 나우(Philosophy Now)'는 그가 과연 시공간의 지배자였는가를 묻고 있다. 그가 말한 안티노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함이다.
어찌됐든 안티노미의 의미는 이제 충분히 전달됐을 터,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성서 속에 나타난 예수의 안티노미를 다루어보자. 예수의 안티노미는 사실 성서 전반에 나타나지만, 그중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실린 이른바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의 지고지순한 가르침은 그야말로 안티노미의 극치를 이룬다.
2편으로 이어짐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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