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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적에 대한 나의 결론성서와 UFO 2019. 4. 21. 01:09
내게 있어 과거에는 예수가 행한 기적들은 사실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성서에 써 있는 그대로를 믿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과거 신학도 시절, 의심 많던 문제 학생이 교수들과 다툰 내용 중에도 예수의 기적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 당시 그에 관해 가장 심했던 논쟁은 예수의 죽음이 '아버지의 뜻이냐, 자신의 뜻이냐 '는 것이지(나는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예수 본인의 의지라고 생각했다) 기적의 진위에 대해 다툰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러다 1996년 이후 예수가 행한 기적들도 의심의 범주 속에 들아오기 시작했는데,(말했다시피 1996년은 내가 UFO를 발견한 해이다. ☞ '나의 UFO 목격담') 이후로도 그것들을 해석하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차츰 그것이 정리되기 시작했으니 그 기적이란 것들의 대부분은 과장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이미 '방황하는 예수 II'에서 설명했다. 아울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배불릴 먹게 만들었다는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은 성서를 달리 해석함으로써 그것이 물리적 변화의 기적이 아님 또한 설명했다.(☞ '예수가 행한 오병이어 기적의 진실')
그에 대해 좀 덧붙이자면, 한국에서만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를 뿐 외국에서는 기적이라 칭하지 않는다. 정식 영어 명칭도 여러 사람을 먹이다는 뜻의 'Feeding the multitude'일 뿐이다. 하지만 여러 번 말했듯 한국의 기독교는 과장스럽고 유난스러운 데가 있어 뭐든 침소봉대해 해석하기를 좋아하는데, 급기야 이를 실현으로 옮긴 어느 신흥 성당의 성직자도 있어서 한동안 화제가 됐다.
그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갑자기 강대상 앞에 출애급기에 나오는 만나(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의 배고픔을 해결시켜주었다는 하늘의 음식)와 같은 밀가루 비스켓이 떨어지는 기현상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인데, 영상으로 보니 그것은 한 두 개가 아니라 수시로 떨어져내렸고, 이를 확인하러 온 바티칸 신부 앞에서는 정말로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마구 떨어졌다.(그 신흥 성당의 성직자는 이것을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도 했다)
나는 당시 지상파 방송에서에 방영된 그 영상을 보며 웃겨 죽을 뻔했었는데,(그것이 고발 프로그램이었음에도) 그 웃음도 잠시, 그 성직자가 자신의 오줌을 효력 있는 성수라 하며(그들은 율신액이라 불렀다) 신도들에게 나눠주고 마시게 했다는 대목에서는 정말로 우웩! 했다.(방송은 그 성직자 부부가 그동안 축재한 엄청난 부동산을 강조하며 끝이 났다. 누군가는 또 그들의 혹세무민에 당해 헌금을 바쳤다는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그들에 관한 처벌이 어찌 이루어졌는가는 그 이상의 관심을 끊어 잘 모르겠지만,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는 그 성당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관계자들을 모두 파문시켰다)
내가 이 더러운 이야기를 길게 쓴 것은 이른바 기적이라 하는 것들의 허황됨을 강조하고자 함지만, 이 기회에 예수의 비경제 활동도 한번 지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지금껏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아오지 않았으나 사실 예수는 공생애 3년 동안은 전혀 경제 활동을 안 했다.(전에는 목수로서 돈을 벌었음직하지만) 그렇지만 그 역시 먹고 살기는 해야 했을 터, 필시 제자들이 애써 잡은 고기를 축내거나(그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였으므로) 혹은 마태가 삥땅쳐온 세금의 일부를 생활비로 사용했을 것이다.
* 성직자들이 신도들의 헌금을 당연시 여김은 성서의 본문(창세기 14:20, 28:22, 말라기 3:10 등)을 억지춘양 격으로 해석한 면도 있겠지만, 그 저변에는 위와 같은 예수의 공밥(공짜밥) 심리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예수의 공밥 심리는 한번쯤은 심판받아야 함에도 지난 2천 년 간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바, 나는 오히려 그것이 기적 같다)
아울러 이 기회에 말하거니와 목회자들도 당연히 직업을 가져야 한다.(매우 무리한 주문이겠지만) 그리고 쉬는 주말에 목회의 봉사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직자의 길이라 본다. 그저 주말의 이빨 한번으로 한 주간 피땀 흘려 일한 사람들의 수입 10분의 1을 가져가겠다는 것, 어찌보면 이건 도둑놈 심보나 진배 없다. 게다가 그들의 대부분은 세금 한푼 내지 않는다.(일부 양심적인 목회자들의 자진 납세를 본 적은 있다)
예수의 생활비가 치유의 기적에 대한 민중들의 답례금으로 충당됐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불치의 병을 고쳐주었는데,(더구나 그는 때로는 죽은 사람까지 살려냈다) 답례를 하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언하거니와 예수가 불치의 병을 고쳤거나 죽은 사람을 살려냈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보다 앞서 갔을 선진 의학 상식에서 비롯된 간단한 치료가 가능했으리라 여겨질 뿐이다. 그러므로 앞서 게재한 아래의 그림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될 것이며,(앞서 말한대로 이와 같은 기적은 외계인이 지닌 선진 기술의 도움을 받았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오히려 이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은 예수 이상의 놀라운 치유능력을 보여주는 사이비 성직자들을 양산해내는 데 일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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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시각장애인을 침을 뱉어 갠 진흙을 눈에 발라 치료한다.(요한복음 9:6) 그런데 살펴보면 뭔가 좀 안 맞다. 죽은 나자로를 살릴 때도 그 주문은 '나오라' 한마디였던 바,(요한복음 11:43) 그저 '눈 떠라'하면 그만인 것을 왜 더럽게 침에 겐 진흙을 바르고 있는지....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의 내가 믿고 있는 예수의 기적은 그의 첫 번째 기적이라 불리는 가나의 기적 하나 뿐이다. 가나라는 곳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서(아마도 동생 야고보의 결혼 잔치로 짐작되는) 술이 떨어져 애태우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본 예수는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둔갑시키는 이적(異蹟)을 행하는데,(요한복음 2:1-11) 언젠가도 말했지만 사실 이것은 기적이라 하기보다는 기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주정(酒精, 에탄올) 제조의 기술을 알고 있으면 오랜 기간의 발효 없이도 술을 제조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것이 물로 된 포도주(붉은 와인이 아닌)라는 대목과, 처음 내온 것과 맛이 다르다는(더 맛있었다) 하객들의 칭찬 대목에서도 그 제조 방법이 상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타의 기적들은 모두 크게 과장됐거나, 작은 치유의 소문이 훗날 성서의 작자들에 의해 제멋대로 침소봉대된 것이다. 예수 치유의 기적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각장애인의 치료 뿐인 바, 아마도 백내장 수술과 같은 외과적 개안(開眼) 치료 쯤은 가능했으리라 본다.(구한말 의료 선교사들이 행했던 그것처럼) 이는 내가 달리 근거가 있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식 선에서 생각한 것이지만, 그것이 상식 선이라는 점은 오히려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병자들을 치료함에 있어 종종 화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가복음 1장 41절에서 한센병 병자의 처치(處置)에 있어 예수는 분명 화를 냈고,(원어 성서의 orgistheis가 영역 성서에서는 fill with compassion으로 오역되어 한국어 성서에서도 '불쌍히 여기다'로 표현됐지만)* 3장 5절의 손 곱은 장애인 앞에서도 화를 냈으며, 9장 23에서 나오는 정신병 아이의 아버지 앞에서도 노한 반응을 보인다.(할 수 있거든 도와 달라는 말에 그게 무슨 싸가지없는 소리냐며)
* 원어 성서의 그리스어로 '불쌍히 여기다'는 splangnistheis이다.
나는 예수가 이들을 모두 치료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문맥과 동떨어진 예수의 이같은 역정은 치료가 불가능한 자들이 모여듦에 열이 받은 때문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예수는 이들을 모두 깨끗이 치료하였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같은 대목에서는 화를 내거나 노여움을 표하거나 하는 등의 표현이 사라진다. 앞서 '루가가 말하는 예수 탄생의 비밀 II'에서도 말했듯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Q문서를 베낀 것인 바, 이상의 변형은 성서의 복음서가 저자들의 입맛에 맞게 얼마든지 변개(變改)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예가 된다.
* 위의 성서 대목을 잘 읽어보면(아니 대충 봐도) 예수의 이같은 역정은 분명 문맥과는 동떨어져 있다. 예수가 화를 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쉽게 설명하자면, 성서에 '예수가 어떤 병자는 치료하고 어떤 병자들을 치료하지 못했다'고 쓰여지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렇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만일 예수가 성서에 쓰여진 그대로 만나는 모든 병자들을 치유시키고 다녔다면 로마의 역사서 곳곳에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옳다. 기록 남기기를 좋아한 로마라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놀라운 기적들은 오직 복음서에만 존재할 뿐 로마의 그 어떤 기록에서도 배제돼 있다.
*그리되면 예수는 신적인 존재에서 유리(遊離)되므로 성서의 저자들은 어쩔 수 없이 모든 병자들을 완치시킨 자로 둔갑시켜야 했을 것이다.상식 선으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예수가 행한 이같은 행적들이 채록되지 않음은 불가사의의 범주에 속하는 일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유대 땅이 변방이라 해도 그곳은 분명 총독이 파견된 로마의 영토였던 바, 채록에서 벗어날 리가 없다. 요즘으로 치자면 이 화제의 인물에 대한 방송 기자나 작가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 번을 양보해 그곳이 변방이기 때문이라 치면 로마의 유명 사가(史家)나 작가의 글에서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나 '유대인 전쟁사'에는 나와 있어야 옳다. 앞서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II'에서 말했다시피 요세푸스는 그 책들 속에 헤롯 왕이 종창을 앓았다거나 신체 어디 쯤이 썪어 고름이 흐르고 구더기까지 나왔다는 민망한 내용까지도 세세히 담았다.
나는 본 블로그는 처음 시작함에 있어 그 서두를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가 과연 실존 인물임이 확실한가를 스스로 물었던 것인데, 이는 그만큼 역사적 예수에 대한 흔적이 미미한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흔적일랑 오직 요세푸스의 기록만이 유일하다.(후세의 가필일지 어쩔지는 몰라도 '예수'라는 이름이 등장하는책은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가 유일하고, 나머지 책들에서 등장하는 예수와 비슷한 이름의 사람들은 예수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 ☞'예수의 정체에 관한 4가지 질문 I')
1755년 런던에서 발행된 '유대인 고대사'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아랍인 형상으로 묘사되어진 최초의 책일 듯하다. 하지만 요세푸스의 형상은 아래의 흉상에 가장 근접한다.
요세푸스의 흉상이라 추정되는 로마 조각상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요세푸스는 예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의 기적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다. 이것은 예수의 그것들이 훗날 크게 부풀려졌거나 혹은 저작되었다는 방증이다. 심각한 것은 이와 같은 창작들이 급기야 현대 의학을 도외시하는 현실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내가 걸거리에서 받은 아래의 부흥회 광고 짜라시는 차마 보여주기도 민망한 내용이지만 기독교의 폐혜를 주목하는 의미에서 한번 올려봤다. 이러한 광고들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사람들의 심정을 악용한 수익 창출의 수단임에 분명함에도 종교적 믿음의 문제인지라 사기로 고소하기도 힘들다.
앞에는 수십 명 목사의 얼굴들이 등장하고, 뒤에는 이와 같은 허황된 말이 써 있었다.
~ 주위에서 보면 우리 목사님께서 안수기도로써 병을 치료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데, 그 결과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결국 죽었거나 더욱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사의 기도, 혹은 치유의 힘을 믿고 치료를 소홀히 한 까닭이다. 오랜 병석의 환자들이 플러시보 효과로써 일시적으로 호전현상을 나타낸 경우는 보았으나 역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주변에 환자가 생겼을 때 벌어지는 한바탕의 굿판과도 같은 중보 기도라는 것도 그러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중보 기도의 뜻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드리는 기도'로 설명돼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사람이 중첩해 드리는 기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중보 기도는 과연 효력이 있는걸까? 이에 대해서는 리처드 도킨스가 2006년 4월 '미국 심장학회지'의 연구 발표를 빌려 이미 명백한 결말을 내렸던 바, 그 내용은 옮겨 싣자면 다음과 같다.
"연구진은 용감하게 모든 조롱을 무시한 채 보스턴 인근 심신 의학연구소의 심장학자 하바트 벤슨의 지휘로 240만 달러의 템플턴 연구비를 쓰면서 연구를 진행했다..... (중보) 기도를 받은 환자들과 그렇지 않은 환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이 기도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환자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예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자신이 기도의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안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심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신이 제 정신이 아닌 실험이 못마땅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한 것일까? 자신이 기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안 환자들이 좀더 스트레스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무익한 효과가 밝혀진 중보 기도
한마디로 중보 기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로부터 비롯된 중압감은 상태가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인데, 나는 이 실험 결과를 보고 갑자기 과거에 꽤나 유행했던 피라미드 파워 신드롬이 생각났다. 피라미드의 구조에는 초과학적인 무엇이 작용되는 바, 관이 놓였던 꼭대기로부터 3분의 1 지점에서는 음식이나 동물의 사체가 부패되지 않으며, 식물의 성장 촉진, 사람의 힐링 등에 효과가 있다나 뭐라나 하는 내용의 것들이었다.
이것은 1930년대 프랑스의 앙투안 보비스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이후 체코에서는 면도날의 재생에도 효과가 있다 하여 '쿠푸 면도날 재생기'라는 것이 특허를 받기도 했으며, 국내에서도 피라미드 모양의 고깔을 접어 머리에 쓰는 사람들이 왕왕 있었다.(두통을 없애주는 힐링 효과가 있다나 뭐라나) 하지만 Mythbusters(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의 호기심 해결 프로그램)의 실험 결과 이 모든 것은 거짓으로 판명났으며, 매달렸던 면도날은 미세하지만 오히려 더 산화됐다.(아마도 공기에 양쪽 면이 다 접촉된 때문이리라)
무익한 효과가 밝혀진 피라미드 파워
이상은 전통적 망상이 실제와는 괴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는데, 그것의 대표적 사례는 아마도 종교일는지 모른다. 아무튼, 소위 예수의 기적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러한 바, '만들어진 신'의 첫 머리에 실린 다음과 같은 말로서 진실의 끝을 갈음하려 한다.
"개인이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 하고,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 한다" -로버트 퍼시그-
* 그림 및 사진의 출처: google jp.
- 성서의 불편한 진실들
- 국내도서
- 저자 : 김기백
- 출판 : 해드림출판사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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