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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환우에게 드리는 글- 절규하던 화가 뭉크의 인생 2막미학(美學) 2020. 3. 5. 07:50
앞서 수차례에 걸쳐 언급했듯, 코로나 19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전세계 5,000만 명을 희생시킨 1918년의 스페인 독감에는 미치지 못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산을 계기로 지금껏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세계에 대해 훑었는데, 언급한대로 그 팬데믹으로 인해 많은 유·무명의 예술가들이 유명(幽明)을 달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걸리면 다 죽는 것은 아니었으니 회복된 유명인사들도 적지 않다. 열거하자면, 프랭크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만화가 월트 디즈니, 미국 작가 캐서린 앤 포터, 일본 작가 구시다 구니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 등이 그들이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뭉크(Edvard Munch,1863-1944)에 대해 말하려는데, 그는56살 때에 스페인 독감에 걸렸지만 이를 잘 극복해 82세까지 장수한 케이스다. 그리고 단지 그를 대표로 내세웠을 뿐 그 외에도 스페인 독감을 극복한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해서 말이거니와, 혹 불행히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감염된 분이라 할지라도 강한 의지로써 극복해 주시기를 앙망한다. Best that you can do! You need struggle and wriggle! (내가 외는 주문. 글을 쓰는 본인도 현재 흉막암과 싸우고 있음)
노르웨이 1000 크로네 화폐의 뭉크
앞면에는 뭉크의 얼굴과 그의 작품 '멜랑꼬리'의 일부가, 뒷면에는 '태양'과 이젤이 도안됐다.
카이젤 수염으로 유명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
제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인물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서둘러 전쟁을 끝냈으나 죽지 않고 83세까지 장수했다. 나쁜 짓을 한 놈이긴 하나 한쪽 팔이 없는 선천적 장애를 극복한 인물로서는 귀감이 될 만하다.
얄타회담의 3거두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의 3인은 스페인 독감 팬데믹 외에 각각 우울증, 소아마비, 하지장애를 극복한 불굴의 위인들이다. 스탈린의 장애에 대해서는 '스탈린은 왜 티무르의 무덤을 열었나?(II)'에서 다룬 바 있다.
뭉크의 '스페인 독감 이후의 자화상'
1919년, 56세에 그린 그림으로 스페인 독감에서 회복된 이후 약 30년간 오히려 왕성한 작업의지를 보였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소장
뭉크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인해 가난, 절망, 우울과 같은 음습한 단어가 가까이 있었다. 게다가 가족 모두 병약했으니 그의 어머니는 5살 때, 가장 친했던 누나 소피아는 15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여동생 로라는 정신쇠약증을 앓았고, 5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에 성공했던 남동생은 결혼 직후 죽었으며, 아버지 역시 비슷한 시기에 유명을 달리했다. 가족력이 이러한데 뭉크 혼자 건강했을 리는 만무할 터, 그가 22살 때 그린 아래 그림은 그의 환경과 정신세계가 어떠하였는지를 방증한다.
'죽음의 방' 1885, 오슬로 뭉크 뮤지엄
절망하는 어머니 앞의 소녀는 오히려 달관한 듯한 얼굴이다. 1886년 뭉크가 '병든 아이'라는 제목으로 석판화 버전을 마련했다. 런던 테이트 갤러리
뭉크는 오슬로에 있는 미술 공예학교에 잠시 다닌 적이 있다.(아버지의 반대로 오래 다니지는 못했음) 그때 그의 선생이었던 노르웨이의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스는 뭉크에게 프랑스의 인상주의 미술을 소개했다. 이에 뭉크는 인상주의 미술을 직접 접하기 위해 1885년 파리를 여행하는데 그후 돌아와 그린 그림이 아래의 '저녁 시간'이다. 뭉크는 과연 그림에는 천부적이었는지 불과 1년도 안 된 시간에 프랑스 인상주의 화풍을 재현해낸다.
이후 오슬로에서 연 첫 개인전의 호평으로써 프랑스에서 2년간 국비 유학을 하게 되는데, 이때 그린 그림이 인상파 양식의 '봄날의 카를 요한 거리'(Spring Day on Karl Johan Street)와 표현주의 양식의 '저녁 때의 카를 요한 거리'(Evening on Karl Johan Street)이다. 아마도 방향(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을 망설이던 시기였던 듯하다. 그리고 그 최종선택은 표현주의였으니 1892년 베를린 개인전에 대한 평론가들의 격렬한 논쟁(예술이냐, 장난이냐)을 통과한 후 유럽 화단의 존재감 있는 화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저녁 시간' 1885, 뭉크 뮤지엄
'봄날의 카를 요한 거리' 1891, 라스므스 마이어스 컬렉션
'저녁 때의 카를 요한 거리' 1892, 라스므스 마이어스 컬렉션
아마도 이때가 그의 화가 인생에 있어서의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이니, 이후 뭉크는 아래의 유명한 '절규'를 시작으로 정신장애를 겪게 된다. 어떤 지면에선가, '절규'를 실제 자연 현상(인도네시아 화산 폭발에 따른 대기 변화)에 놀란 뭉크의 충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을 본 적이 있는데 다분히 억지춘양의 해석이다. 이 그림은 뭉크가 거리에서 겪은 공황장애의 고통을 그림으로 옮긴 것으로서 하늘이 붉은 빛으로 바뀌는 환영(幻影)에 놀라 소리를 질렀음이다. 이 그림의 원어 제목은 'scream(비명)'이다.
* '절규'는 1895년 석판 인쇄물을 제외하고 모두 4종의 버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장면을 두 점은 파스텔, 나머지 두 점은 템페라(안료에 수성 용매를 섞어 만든 물감)와, 유화+템페라+파스텔로 그렸다. 아래 첫 번째 작품(1983년)이 우리에게 친숙한 '절규'로서 오슬로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 있고, 두 번째 파스텔 작품(1895)은 개인 소장품이다. 또 다른 파스텔화(1893년)와 템페라화(1910)는 오슬로의 뭉크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다.
'절규'(1893년)
가장 널리 알려진 버전으로 유화물감, 템페라, 파스텔, 크레용을 이용해 판지에 그렸다.(91x73.5cm)
'절규' 파스텔화(1895년)
2012년 5월 소더비 경매에 나와 1억 1,992만 달러(1,355억 원)을 기록, 역대 최고가를 갱신했다.(79x59cm)
'절규' 템페라화(1910년)
오슬로 뭉크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으며, 2004년 도난당했다 2006년에 되찾은 바로 그 그림이다.
'병실에서의 죽음' 1893,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가족들 중에서 또 누가 죽었는지 여동생 잉게르가 초췌한 얼굴로 병실에 서 있다.
'여동생 잉게르' 1892,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뭉크의 신경쇠약증은 자연히 술을 가까이 할 수 밖에 없었다. 1895년에 그린 '팔뼈가 있는 자화상'과 1906년에 그린 '포도주 앞에서의 자화상'까지는 병이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게다가 1908년부터는 정신분열의 증상까지 보였다. 하지만 그 무렵 다행히도 야콥슨 박사를 만나 8개월 간의 치료 끝에 효과를 보게 되었으니 아래 '야콥슨 병원에서의 초상화'는 아직 기력이 없기는 해도 어느 정도의 회복이 감지된다. 이에 1909년 6월, 뭉크는 코펜하겐 야콥슨 병원에서의 치료를 마치고 오슬로로 돌아온다.
'팔뼈가 있는 자화상'(석판화) 뭉크 뮤지엄
'포도주 앞에서의 자화상' 1906.
'야콥슨 병원에서의 자화상' 1909.
그와 동시에 뭉크는 오슬로 대학 대강당 벽화 공모전 소식을 듣게 된다. 노르웨이의 모든 예술가들이 그 공모에 뛰어들었다는 소식과 함께. 대가의 승부욕이 일었던 것일까? 뭉크는 오슬로 대학 벽화 제작을 인생의 전기로 삼겠다고 마음 먹고 주최측에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데, 그 주된 테마를 태양에 둔다. 그동안 칙칙한 그림만 그려오던 그가 태양을 소재로 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태양이 그의 두번 째 인생에 떠오르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난 뭉크는 이제 그 태양 아래서 질주하는 말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 '피요르드의 일출'
오슬로 대학의 대강당 벽화 '태양'
오슬로 대학 대강당 벽화(부분)
오슬로 대학 대강당 벽화 '태양'과 '역사'(부분)
오슬로 뭉크 뮤지엄
'질주하는 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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